새롭게 번역하고 최장집 교수가 해제하는 고전 12권,
그 첫 번째 책 베버 편
이 책은 지난 2010년 여름에 진행했던 최장집 교수의 정치철학 강의를 바탕으로 한 첫 번째 결과물이다. 강의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마키아벨리, 홉스, 로크, 루소, 흄, 애덤 스미스, 몽테스키외, 제임스 매디슨, 알렉시 드 토크빌, 막스 베버 등 12강좌로 이루어졌고, 처음에는 이를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사상가 한 사람을 제대로 다루기도 어려운데 12명을 한 권에 묶어 낸다는 것은 벅찬 일이므로, 한 사상가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해 그 사상가의 텍스트와 함께 한 권씩 구성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최장집 교수가 제안했다. 이 책은 최장집 교수가 1백 쪽이 넘는 분량으로 베버의 정치철학에 대해 쓴 해제와, 박상훈 박사가 새롭게 번역한 베버의 핵심 텍스트인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엮은 것이다.
왜 정치철학인가?
오늘의 한국 사회와 정치의 현실이 철학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가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정치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우리 자신부터 정치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정치의 수준이 향상되기 위해서는 먼저 정치에 대한 이해 방법이 좋아지거나 최소한 궤를 같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 스스로부터 정치에 대한 판단력과 상상력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정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방법에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정치 언어가 풍부해져야 하고 지적 사고의 기반도 튼튼해져야 한다. 정치에 대한 사고의 지평을 뚜렷하게 확대했던 정치철학의 거인들로부터 배워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왜 베버인가?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어떤 정치가가 한국 사회에 요구되는가를 둘러싸고 논의가 한창이다. 구체적인 여러 인물들이 후보로 거론되기도 한다. 이는 곧 정치가로서의 자질과, 그를 평가할 수 있는 윤리적 판단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이 책이 중요한 것은 정치란 무엇이고, 정치가란 어떤 존재인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 고전 중의 고전이며, 이 책만큼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책이 없기 때문이다. 평생토록 베버는 학자이면서 동시에 정치가가 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끊임없이 탐색했고, 또 고민했다. 정치적 사실 내지 진실을 객관적으로 규명하는 학자로서의 역할과, 정치에 뛰어들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와 대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정치인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55세에 이 책을 썼으며, 그다음 해에 사망해 이 책은 사실상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베버가 텍스트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를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진지한 것이라면, 정치 자체는 항상 책임의 도덕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명으로서의 정치』는 정치인이 가져야 할 정치 도덕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그 이상을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텍스트로부터 정치를 이해하는 방법과 아울러 이성적인 정치적 판단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베버는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를 구분함으로써, 두 개의 대립적이고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명제가 동시에 가능할 수 있다는 이율배반적 구조가 정치 행위의 본질적인 측면이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그는 인간적 현실이 얼마나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것인가, 그리고 얼마나 이중적이고 모호한 것인가를 동시에 일깨워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 행위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균형적 판단, 절제, 나아가서는 겸허함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오늘날 베버를 읽는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정치와 권력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패러다임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커다란 지적 자원과 만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베버에 대한 오해와 외면
베버는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20세기 초까지) 문화·예술·철학·과학뿐만 아니라 역사와 사회과학이 최고로 흥성했던 시기의 기라성 같은 대학자들 사이에서도 특별한 지위를 갖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치철학자 셸던 월린은 “조직의 세계와 창의적 개인 간의 고뇌에 찬 긴장을 베버만큼 명료하게 드러낸 사람은 없다.”라고 하면서 그를 “가장 위대한 사회학자”라고 말했다. 이렇게 사상가들의 존경과 경외심을 한 몸에 받는 베버지만, 한국에서만큼은 좌우파를 막론하고 제대로 이해되거나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보통 베버는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식의 책임 윤리가, 권력 정치가, 나치즘이나 파시즘에 논리적 기반을 제공한 정치학자라는 오명을 갖는다. 그러나 베버에 대해, 그가 신념 윤리를 폄하하고 책임 윤리만을 강조했다는 기존의 해석과는 달리, 베버는 신념 윤리 없이 책임 윤리만을 가진 정치가를 최악의 정치인으로 보았다. 베버는 강한 신념에 기반을 둔 책임 윤리를 말한다. 이 책의 제목이 ??소명으로서의 정치??인 것도 이 때문이다.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라는 두 가지 깊은 심연 속에서 고민하기를 바라는 것이 베버의 진정한 의도다. 그는 또한 권력 정치가를 경멸했다. 내적 자긍심 없이 권력의 추구 그 자체를 즐기는 정치가는 정치의 비극성 앞에서 공허한 삶을 살다 좌절할 운명을 걷게 될 것이라 말했다. 그는 빌헬름 2세를 권력 정치가의 대표적 사례로 꼽았으며 “죽을 때까지 비판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진보파들 또한 베버를 읽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맹목적으로 베버를 배척했고 베버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았다. 때로는 베버의 ‘가치중립’ 또는 ‘가치판단으로부터 자유’와 같은 주장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최장집 교수는 해제에서 “근본적으로 가치중립은 연구자가 지닐 수 있는 문화적·종교적·이념적 그리고 어떤 종류의 희망적 사고의 영향도 배제하고, 도덕적인 문제를 사실과 뒤섞지 않으며 사실 그 자체에 접근하고 탐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말은 연구 주제의 선정, 이론과 방법론의 선택에 있어서까지 연구자의 가치나 감정을 배제할 수 있다거나, 연구자의 연구 목적과 의도 자체가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사회현상이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지적 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베버의 생각에 가깝다. 그리고 “베버가 니체와 같은 가치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성에 대한 그의 강조, 경험적 지식에 대한 그의 열정 덕분”이라는 그의 평가 또한 생각해 볼 만하다.
베버는 대중 투표제적 지도자 민주주의를 대안으로 주장했는데, 이는 권위주의 내지는 파시즘을 옹호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역시 잘못된 이해이다. 대중 투표제란 그간 한국에서는 ‘국민 투표제적’으로 잘못 번역되어 온 plebiscitarian의 새로운 번역이다. 이는 헌법 제?개정이나 국가적 중대 사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보통선거권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여러 형태의 제한 투표제를 반대하면서 대중의 직접 투표에 의해 리더십이 선출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베버는 민주주의를 법적?합리적 정당성이 아니라 카리스마적 정당성에 기초한 지배 형태로 분류한다. 따라서 현대의 통치 체제로서 민주주의는 대중 투표제를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하는 것이고, 대중의 투표를 조직하기 위한 정당 조직을 핵심으로 하는 지도자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베버는 지도자가 있는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말한다. 지도자가 없는 민주주의에서는 대중 권력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도당들의 지배 내지 관료의 지배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베버에게 지도자와 이를 따르는 추종자 집단은 모든 정치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따라서 좋은 지도자 내지 유능한 리더십 없는 정치는 그에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자유주의의 소극적 정치관을 넘어선다.
당시로서는 꽤 과격한 주장이었던 대중 투표제적 지도자 민주주의를 이야기한 것은, 당시 독일 정치의 문제(첫째, 의회의 무력함, 둘째, 전문적인 행정 관료의 강함, 셋째, 독일 정당의 특성으로서 세계관을 달리하는 이념 정당들의 존재)에 대한 그의 비판적 평가 때문이다. 그는 독일 정치의 운명이 정당성을 잃은 융커(귀족), 통치력을 못 갖춘 부르주아라는 조건 때문에 프롤레타리아나 인민이 불행해지는 것으로 귀결될 것으로 봤다. 따라서 이 비관적 상황을 개척할 대안적 리더십을 가진 인물이 대통령 직선제를 통해 지도자가 되지 못한다면 10년 후쯤에는 ‘반동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실제로 그가 강의를 마친 지 12년 만에 나치가 집권했다. 이 점에서 그는 나치즘을 옹호한 사람이 아니라 반동의 도래를 피하기 위해 독일의 정치인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하려 했다고 할 수 있다.
“내 강의는 여러분들을 여러모로 실망시키게 될 것이다”―소명으로서의 정치란
이 책은 1919년 뮌헨의 한 진보적 학생 단체인 ‘자유학생연맹’의 초청에 의한 강연문이다. 당시는 독일 현대사에서 가장 혼란한 위기의 시대였다. 패전으로 인한 독일제국의 붕괴, 그리고 새로운 공화국의 건설, 급진 생디칼리스트와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했던 혁명적 봉기가 주요 도시에서 발생했다.
베버에게 강연을 요청했던 학생들은 이런 정세에서 자신들이 어떻게 개입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듣고 싶어 했다. 그러나 베버는 강연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여러분의 요청으로 이 강의를 하게 되었지만, 틀림없이 내 강의는 여러분들을 여러모로 실망시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강의를 마칠 때쯤 이렇게 말한다. “친애하는 청중 여러분, 10년 후에 이 문제에 대해 우리 다시 한 번 이야기하자.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그때는 이미 반동의 시대에 접어들었을 거라는 두려운 생각을, 나는 갖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때는 여러분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그리고 솔직히 나 자신도―바라고 희망했던 것들 가운데 실제로 실현된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마 ‘전혀 아무 것도’ 실현되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겠지만, 누가 봐도 거의 성취된 것이 없을 것이다. …… 이 밤이 서서히 물러갈 때, 이 봄날의 꽃이 자신들을 위해 화사하게 피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살아남아 있게 될까? 여러분 모두는 그때 내적으로 어떻게 되어 있을까? 비분강개해 있을까 아니면 속물근성에 빠져 세상과 자신의 직업을 그냥 그대로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러나 이내 이렇게 말하는데, 이 부분이야말로 ‘소명으로서의 정치’에 대한 것이다. “정치란 열정과 균형적 판단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구멍 뚫는 작업이다. 만약 이 세상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하면서도 불가능한 것을 잡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마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하지 못했을 거라는 말은 전적으로 옳고 모든 역사적 경험에 의해 증명된 사실이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해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확신을 가진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
베버 ‘잘’ 읽기
베버는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고들 하지만 실제로는 잘 읽혀졌다고 말하기 어렵다. 사실 베버의 글은 악문으로 유명하다. 독일에서도 선생들은 학생들에게 영문 번역본을 읽도록 권할 정도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앞에서도 말했듯이, 베버의 글은 읽는 사람에 따라 정반대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복합적이다.
따라서 이 책의 해제 부분에서는, 베버의 정치철학에 대해 기존 국내외 논의를 충분히 섭렵하면서, 한국 정치에서 베버를 이해하는 데 고려해야 할 중요한 주제를 깊이 다루려고 했다. 2부 번역본은 베버가 어떤 상황에서 그 말을 했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문단 중간 중간에 첨언을 했으며, 역주 또한 충실하게 달아 주었다. 또한 원래 텍스트는 장별 구분이 되어 있지 않았으나, 새로운 번역본에서는 내용에 맞게 장별로 나누고, 장별 내용도 소제목으로 구분해 이해하기 쉽게 했으며 페이지 양쪽에 중요한 구절들을 뽑아 가이드가 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