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公義)를 위한 인성교육, 환경교육, 통일교육, 세계시민교육, 죽음교육!
학습자의 마음속에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진리가 들어 있다는 만두모형 교육관이 찾아가는 우리의 미래교육!
『오래된 미래교육』은 ‘만두모형 교육관’이라는 창의적인 교육관과 한국교육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담은 교육서이다. 그렇다면 ‘만두모형 교육관’은 어떤 것일까? 우리의 전통적인 교육모형을 만두모형이라고 한 것은 주자가 마음을 만두로 비유한 데에서 따온 것이다. 주자는 습개경襲蓋卿이라는 제자에게 “마음은 본성을 본체로 삼으니, 마음은 본성을 떡이나 만두의 알갱이처럼 가지고 있다. 생각건대 마음이 이치를 갖추고 있는 까닭은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즉 우리 마음은 만두와 같이 그 속에 온갖 잡다한 이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두모형 교육에서 교육이란 외부의 지식을 교사로부터 전달받는 것도 아니요, 학습자 자신의 잠재능력을 최대한 신장시키는 것도 아니다. 학습자가 자신의 마음을 탐구하여 우주 삼라만상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탈현대 문명의 발상지를 꿈꾸며 이상적인 교육의 길을 향해 가다
‘만두모형 교육관’은 우리의 전통교육사상을 기반으로 탈현대 교육의 구조를 설계하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이 책은 ‘지금, 왜 새로운 교육관이 필요한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우리 사회는 지난 50여 년간 서구 현대 문명이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경제성장과 정치적 민주화를 압축적으로 이루어냈다.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우리 사회는 현대 문명에 내포한 모순들이 가장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곳이기도 하다.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자살률, 특히 OECD 평균의 8배에 이르는 노인들의 자살률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모든 새로운 문명은 중심부가 아니라 주변부에서 나타난다. 문명의 중심부는 그 문명의 전개과정에서 발생하는 모순들을 완화시킬 많은 제도적 장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런 측면에서 현대 문명의 가장 약한 고리인 우리나라가 장차 탈현대 문명의 발상지가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정보혁명은 이미 새로운 문명의 물질적 토대로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이러한 물질적 토대 위에 우리는 모든 존재가 인드라망과 같은 네트워크를 통해 영적으로 서로 교감하는 평화롭고 행복한 문명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 문명이 제도적?구조적 장치를 통해 구축되었다면 우리가 설계하는 탈현대 문명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각성을 통한 존재의 수직적 상승에 의해 달성될 수 있으니, 그런 의미에서 탈현대 문명의 실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탈현대는 크게 두 가지 변화를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노동 중심의 사회에서 여가 중심의 사회로의 변화이고, 또 하나는 분리 독립된 개체로서의 세계관에서 통일체적 세계관으로의 변화이다. 전자의 변화는 필연적인 것이다. 정보화라는 커다란 물결은 인류의 오랜 염원인 노동 없는 삶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우리의 선택 사항이다. 우리는 현재와 같이 자아를 분리 독립된 개체로 간주하여 자아 확대를 위한 투쟁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모든 존재와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는 우주적 존재로서의 ‘나’를 발견하기 위한 삶을 살아갈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만두모형 교육관은 후자의 삶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주물모형 교육관, 도토리모형 교육관, 그리고 자기극복을 위한 만두모형 교육관
노동력의 가치를 높이는 현대 교육은 생산 방식의 변화에 따라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소품종 대량생산을 위주로 하는 현대 전기의 교육은 주물모형의 교육으로, 다품종 소량생산을 위주로 하는 후기의 교육은 도토리모형으로 전개되었다. 전자는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교육내용에, 후자는 학습자의 흥미와 소질을 계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로크가 아동은 태어날 때 백지와 같다고 말했듯이, 인간이 태어날 때 아무런 본유관념도 갖지 않으며, 따라서 그 인간의 선악은 의도된 환경, 즉 교육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각은 서양 교육의 초창기부터 지배적인 흐름이었다. 이러한 교육관을 '주물모형'이라고 부르는데, 주물이 쇳물을 부어 넣어 일정한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이듯이, 교육이란 아동에게 일정한 교육내용을 전달하여 그 사회에 적합한 인간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교육관이다. 이는 근대 자본주의의 이념적 토대가 되는 자유주의 사상과 결합하여 자유주의 혹은 인문주의 교육으로 정착되었다.
루소 이후 아동은 비로소 인격체를 가진 존재로 점차 인식되었고, 교육이란 아동의 성장 가능성을 최대한 신장시키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이를 ‘아동 중심 교육관’, ‘도토리모형’이라고 부르는데, 도토리 속에는 이미 커다란 참나무로 자랄 가능성이 들어 있으므로 교사는 그 도토리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물도 주고, 거름도 주고, 가지도 쳐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토리모형의 원조는 소크라테스이며, 오랜 암흑기를 거쳐 루소의 아동 중심 교육관을 낳고 이는 페스탈로치와 프뢰벨을 거쳐 존 듀이로 계승되었다.
‘만두모형 교육관’은 학습자의 마음속에 우주 삼라만상의 진리가 들어 있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일견 도토리모형과 유사한 듯하지만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도토리모형이 점진적이고 누적적인 데 반해 만두모형은 돌발적이고 순간적이다. 도토리 싹이 한참 동안 웅크리고 있다가 한순간 커다란 참나무로 훌쩍 자라는 일은 없지만, 만두모형 교육관에서는 씨앗과 나무 사이의 거리가 없다. 학습자는 이미 거대한 참나무이고, 성인聖人이고, 부처다. 다만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만두모형 교육관에서는 학습자를 잠자는 성인, 잠자는 부처라고 한다.
또 도토리모형의 교육목표는 자아실현인데, 교육은 학습자의 특기와 소질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서 최대한 발현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반면에 만두모형에서는 도토리모형의 자아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한다. 도토리모형의 자아란 분리 독립된 개체로서의 자아, 원자와 같은 개인이지만, 만두모형에서는 분리 독립된 개체를 우리가 극복해야 할 허상이라고 본다. 우리는 분리 독립된 개체라는 허상을 넘어서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두모형 교육은 그 목표를 자기극복自己克服 혹은 극기克己로 표현한다.
교사관의 차이-지식 전달자, 조력자, 교육의 중심으로서의 교사
주물모형의 전형적인 교사상은 아테네의 가정교사인 교복(敎僕, Paidagogos)과 소피스트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가르치는 사람의 신분이나 위세가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이 배우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교육내용, 즉 지식을 소유하고 있느냐였다.
도토리모형에서 전형적인 교사는 루소를 들 수 있다. 주물모형 교사가 지식을 적극적으로 주입하는 것과 대비해서 도토리모형의 교육을 소극적 교육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서 교사는 학습자의 주어진 잠재능력을 최대한 발현하도록 도와주는 조력자 역할을 담당한다.
만두모형에서 교사의 역할은 어떤 것일까? 깨달음이 책이나 교사로부터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탐구하여 스스로 깨닫는 것이라면, 교사의 존재는 무의미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 있듯이 전통교육에서는 교사를 교육의 삼 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시하였다. 조선시대의 교육적 인간상이 “경전에 밝고 행실을 닦아 가히 남의 스승이 될 만한 자(經明行修 道德兼備 可爲師範者)”라고 했듯이 교육의 목표는 곧 자신이 스승이 되는 것이었다.
도량모형의 학교-우리가 추구해야 할 오래된 미래
저자의 학교에 대한 생각도 분명하다. 도량(道場) 모형의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학교는 우리의 영혼을 성장시키는 곳이 되어야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주물모형 교육관에서 도출되는 공장모형 학교, 도토리모형 교육관에서 도출되는 시장모형 학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고 종속적인 것이다. 이제 우리의 학교는 도량(道場) 모형으로 돌아가야 한다. 도량모형의 학교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이다.”
그리고 청년 실업 문제 해결과 탈현대 실현을 위한 교사 양성과 관련하여 조선시대의 선비와 같은 수행 프로그램에 대해 국가나 사회가 적극 지원해주자는 구체적인 제안을 하기도 한다.
한국의 전통교육-마음공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2부 한국의 전통교육’은 위기에 처한 우리 교육을 위한 대안을 찾고자 전통교육의 역사를 탐구하고 있다. 유교, 불교 등 전통교육의 역사와 방식을 망라하고, 조선 후기 ‘한국의 페스탈로치’라고 할 수 있는 장혼의 교육이론까지 살펴본다.
그렇다고 만두모형 교육관이 단순히 우리의 전통교육의 바람직한 측면을 계승하자는 주장은 아니다. 그것은 서구의 현대적 교육관이 초래한 개인과 개인 간의 무한 경쟁, 인간과 사회와의 갈등, 인간의 자연 파괴로 인한 인류 공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의 극복은 다른 무엇보다도 교육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저자는 그 극복의 대안을 우리의 전통교육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나는 미래교육의 가장 유사한 모습을 조선시대의 서원교육이나 불교의 승려교육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21세기는 ‘마음교육의 세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막 시작된 21세기는 사이버 공간 말고도 사람들의 정기와 마음을 뺏는 환경들로 가득 찰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마음을 잃지 않고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관(觀)하는 공부가 무엇보다도 필요하게 됩니다. 따라서 공교육이나 민교육이 담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마음교육이 될 것입니다.”
한국의 근현대 교육-공의(公義)를 위한 교육으로 나아가다
‘3부 한국의 근현대 교육’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를 짚어보는 데에서 시작하여, 근현대사 속의 우리 교육을 연구한 결과물이다.
민족 결집의 힘이 최고조에 달한 일제강점기의 교육구국운동과 국내외를 넘어서 방대하게 전개되었던 민족교육운동을 소상하게 살펴보는 것은 물론, 일제 식민지 교육의 잔재 청산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있는 미군정기의 교육 주도 세력들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간다.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 사건’ 등 교원노조운동의 역사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리고 1980년 7?30 교육조치와 과외금지 상황의 의미, 교육을 수요자 중심으로 개편해 교육경쟁력을 강화하고 이를 국가경쟁력 강화로 연결함을 목표로 내건 1995년 5?31 교육개혁이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으로 비판받게 되는 과정까지도 일관된 논지로 꿰뚫어보고 있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공의(公義), 즉 공공의 정의를 위한 교육을 주장한다. 이는 공동체의 정의를 실현하는 인간을 육성하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을 주시함으로써 공동체에 헌신하도록 하는 인성교육, 자연과 내가 하나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 환경교육, 남북한의 대립과 갈등을 넘어서 평화와 공존을 배우는 통일교육, 세계시민으로서 자국의 문화적 전통을 체득하고 나아가 상대 문화의 장점을 이해하는 세계시민교육, 죽음을 삶의 선택 기준으로 삼는 죽음교육 등 공공의 정의를 위한 교육에 관한 한 ‘평등교육’은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화의 추세가 거세질수록 교육의 공공성과 평등성은 더욱더 절실하게 필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