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서는 예이츠 작품의 성과 사랑, 그리고 정치의 측면에 대한 이해는 지금까지 국외 예이츠학계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져온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1980년대부터 그의 작품의 정치적 주제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 오다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차적으로 성과 사랑의 주제에 대한 연구가 주류를 이루어 온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근에 와서는 그의 아내와 공동으로 실시했던 자동기술(automatic script)과 관련된 많은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면서 지금까지 숨겨져 왔던 그의 삶의 성적인 측면에 대한 연구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그 결과 그의 작품에 대한 이해 역시 한층 더 깊어져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국외 예이츠학계의 동향과는 달리 국내 학계의 경우에는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아직도 매우 미미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한국예이츠학회에서 매년 두 번씩 발간하고 있는 『한국예이츠저널』의 내용이 이를 잘 말해준다. 예이츠의 시가 한국 대학의 모든 영문학과에서 강의되고 있는 현대영미시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또한 적지 않는 대학원생들이 학위논문 주제로 그의 시가 선택되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이제 국내의 예이츠 연구도 좀 더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서의 출판은 하나의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예이츠의 초기 시에 나타난 성과 사랑, 그리고 정치
이 글은 성과 사랑의 관점에서 예이츠의 초기 시작품들을 읽어보면서 거기에 드러나 있는 정치적 의미들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이 글이 초기 시를 중심으로 하게 된 것은, 그 시가 후기 시에 비해 성과 사랑의 주제를 보다 중요하게 다루고 있어서라기보다 후기 시에 대해서는 이미 몇 편의 논문을 통하여 살펴보았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예이츠의 후기 시는 성과 사랑의 주제를 다룸에 있어 다른 시기의 시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적인 면을 보여주는데, 이는 당시의 아일랜드 사회와 문화에 대한 시인의 비판적 시각과, 그 비판을 보다 효과적으로 극대화하기 위한 시인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젊었을 때와 늙었을 때의 여자」(“A Woman Young and Old”) 시편들이나 미친 제인(Crazy Jane) 시편들이 남성인 시인 화자 대신에 여성 화자를 등장시켜 여성의 육체와 성적 욕망을 노골적으로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은, 바로 성 문제에 있어서 극도로 보수적이고 억압적이었던 당시의 아일랜드 가톨릭 사회와 문화에 대해 효과적인 비판을 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이츠의 초기 시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의 초기 시는 성과 사랑의 주제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으며, 그것의 정치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려는 것이 이 글의 의도이다.
우리는 흔히 예이츠의 초기 시에 대하여 말할 때 그 여성적인 특성을 지적한다. 우선 시의 리듬이나 단어의 사용이 그렇고, 의미의 구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 예이츠의 초기 시는 그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성의 문제와의 관련성을 드러내고 있다. 예이츠의 시전집 맨 앞에 놓여 있는 두 작품 「행복한 목동의 노래」(“The Song of the Happy Shepherd”)와 「슬픈 목동」(“The Sad Shepherd”)을 우리는 이러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한 쌍을 이루고 있는 이 두 작품은 시인을 상징하는 목동을 등장시켜 그의 노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보여준다. 앞의 작품에서 시의 화자인 목동은 전쟁, 철학, 과학 등을 거부하고 “말만이 참으로 좋은 것”(Words alone are certain good)이라고 단언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말”이 바닷가의 조가비를 통해서 “노래”가 되고 그에게 “위안”을 주게 된다는 점이다.
웅얼거리는 바닷가에 가서
메아리를 간직한 구부러진 조가비를 모아서,
그 입술에 대고 그대의 이야기를 하라.
그러면 그대의 괴로운 사연
교묘히 노래로 바꿔 들려주며,
마침내 그들이 그 연민의 노래 속에
진주빛 형제애로 사라질 때까지
그대를 위안하게 되리라.
Go gather by the humming sea
Some twisted, echo-harbouring shell,
And to its lips thy story tell,
And they thy comforters will be,
Rewording in melodious guile
Thy fretful words a little while,
Till they shall singing fade in ruth
And die a pearly brotherhood. (VP 66)
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시의 화자가 거부하는 전쟁이나 철학, 과학 같은 것들은 모두 남성적인 세계를 구성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고, 반면에 그리스신화의 요정 에코(Echo)처럼 그의 말을 받아 노래로 바꾸어 다시 그에게 들려주는 조가비는 여성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작품 「슬픈 목동」에서 조가비가 여성으로(“her wildering whirls”) 표현된 것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준다. 그렇게 보면, 「행복한 목동의 노래」는 남성 시인의 자아가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에서 여성성의 작용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에 「슬픈 목동」은 그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앞의 시가 보여준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을 보여준다. 먼저 하늘의 별들과 바다, 그리고 이슬방울에게 자신의 슬픔을 하소연하고 그들로부터 위로 받기를 원했던 목동은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이번에는 바닷가의 조가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것이 노래가 되어 다시 자신의 마음속으로 되돌아올 때 슬픔이 사라지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앞의 시와는 사뭇 다르다. 자신의 소리를 들어달라는 시인의 하소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끼리만 웃고 노래하는 하늘의 별들과, 여전히 옛날처럼 혼자서 울고 있는 바다, 그리고 자신이 떨어지는 소리만을 듣고 있는 이슬방울과 마찬가지로 조가비 역시 목동이 불러주는 노래를 잊어버리고 그의 노래를 “분명치 않는 신음소리”로 바꿔버린다.
그리고 그는 진주조개 가장자리 가까이에서 조용히 노래했다.
그러나 바닷가에서 외롭게 사는 슬픈 조개는
그를 잊어버리고, 그녀의 어지러운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모든 노래를 분명치 않는 신음소리로 바꿔버렸다.
Then he sang softly nigh the pearly rim;
But the sad dweller by the sea-ways lone
Changed all he sang to inarticulate moan
Among her wildering whirls, forgetting him. (VP 69)
다시 말해서, 이 시는 앞의 시와는 달리 원형적으로 여성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물들과 시인 사이의 소통불능 혹은 단절을 보여줌으로써 앞의 시에서 우호적으로 표현되었던 여성성과의 관계가 때로는 모호하고 어려운 것이 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목동(시인)을 “행복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슬프게” 만들기도 한다.
예이츠의 초기 시의 여성성이 내포하고 있는 이러한 복합적인 의미는 이 시기의 다른 작품들, 예를 들어 「골왕의 광기」(“The Madness of King Goll”)와 「퍼거스와 드루이드」(“Fergus and the Druid”), 그리고 「잃어버린 아이」(“The Stolen Child”)와 「요정나라를 꿈꾼 남자」(“The Man who dreamed of Faeryland”) 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시들은 모두 아일랜드의 신화와 전설을 소재로 하고 있는 작품들로서, 앞의 두 작품은 두 왕의 이야기를, 뒤의 두 작품은 요정나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첫 작품 「골왕의 광기」는 왕으로서의 권력과 전쟁의 세계를 버리고 자연의 세계를 선택한 어느 왕에 대한 시이다. 앞에서 살펴본 목동에 관한 시들에서처럼, 이 시의 전반부에 묘사된 정치권력과 전쟁의 이야기는 남성적인 세계를 의미하고, 후반부에 묘사된 자연물들은 여성적인 세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자연의 세계로 도피한 골왕이 오래된 악기(tympan)를 연주하면서 자연의 여신(Orchil)을 노래하는 것 역시 시와 여성성의 관련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악기 줄이 끊어지며 골왕이 슬피 탄식하는 것으로 이 시가 끝난다는 점이다.
When my hand passed from wire to wire
It quenched, with sound like falling dew,
The whirling and the wandering fire;
But lift a mournful ulalu,
For the kind wires are torn and still,
And I must wander wood and hill
Through summer's heat and winter's cold.
내 손이 현에서 현으로 옮겨갈 때,
그것은 내리는 이슬방울 같은 소리로
휘돌며 떠도는 불길을 잠재웠네.
그러나 슬픈 절규 외쳐라,
그 감미로운 현들 끊어져 잠잠하고,
여름의 열기와 겨울의 추위 속에
난 숲과 산을 떠돌 수밖에 없으니. (VP 86)
이는 마치 「슬픈 목동」에서 바닷가의 조가비가 목동의 노래를 “신음소리”로 바꿔버리는 것과 같다.
「퍼거스와 드루이드」 역시 제목의 두 인물을 등장시켜 그들이 대변하고 있는 두 세계를 대비시켜 보여준다. 아일랜드의 왕이었던 퍼거스는 왕 노릇하는 것이 싫어 코나하(Conchubar)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드루이드처럼 자연 속에서 살면서 그의 “꿈꾸는 지혜”(dreaming wisdom)를 배우고자 한다. 다시 말해 그도 골왕처럼 자신이 왕으로 살았던 남성적인 세계로부터 벗어나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드루이드의 여성성의 세계로 가고자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이동이 단순히 기쁨과 행복만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왕위를 버리고 자신의 꿈과 지혜를 배우겠다고 고집하는 퍼거스를 만류하며 드루이드가 그에게 건네는 말 속에 분명히 드러난다.
제 술 없는 백발의 머리와 움푹 팬 야윈 뺨과
칼도 들어 올릴 수 없는 이 두 손을 보십시오.
이 몸은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갈색 갈대처럼 부들부들 떨린답니다.
어느 여인도 저를 사랑한 적 없고, 어떤 남자도 제 도움을 원치 않습니다.
Look on my thin grey hair and hollow cheeks
And on these hands that may not lift the sword,
This body trembling like a wind-blown reed.
No woman's loved me, no man sought my help. (VP 103)
여기에 묘사된 마르고 지친데다 극도의 외로움 속에서 떨고 있는 드루이드의 모습은 줄이 끊어진 악기를 들고 슬피 탄식하고 있는 골왕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두 세계 사이의 긴장관계는 「잃어버린 아이」와 「요정나라를 꿈꾼 남자」에서도 계속된다. 두 작품 모두 요정나라의 이야기지만, 전자는 요정들에 의하여 “눈물로 가득한” 이 세상으로부터 요정의 나라로 끌려가는 아이의 이야기를, 후자는 요정의 나라에 대한 꿈 때문에 인간사회에서의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해진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작품들이 보여주고 있는 요정의 나라는 과연 어떤 곳이며,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곳은 한마디로 인간의 모든 근심, 걱정, 그리고 슬픔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중요한 것은, 두 작품이 행복한 요정의 나라를 예이츠의 외가가 있었던 곳, 그래서 그가 어렸을 때 자주 가곤 했던 슬라이고(Sligo) 주변의 구체적인 자연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요정의 나라가 자연, 인간의 어린 시절, 더 나아가 어머니의 존재와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그곳은 어머니의 품안과도 같은 평화와 안식의 세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곳은 앞의 시들에서 골왕이나 퍼거스가 왕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가고자 하는 자연과 예술의 세계, 혹은 드루이드의 “꿈꾸는 지혜”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한마디로 그곳은 남성 시인에게 꿈과 음악과 지혜가 가능하게 해주는 여성적인 낙원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요정의 세계 역시 예이츠 초기 시가 보여주고 있는 여성성에 대한 지향의 또다른 표현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요정의 나라가 아무리 행복하고 평화로운 낙원 같은 곳이라고 해도 그곳으로의 이동이나 지향은 인간에게 희생과 대가를 요구한다. 「요정나라를 꿈꾼 남자」가 보여주고 있듯이, 그 꿈 때문에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사랑을 잃고(1연),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돈도 벌지 못하고(2연), 그를 모욕하는 자들에게 복수하지도 못하며(3연), 심지어 죽어서도 안식을 찾지 못하는(4연) 남성의 경우가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잃어버린 아이」의 경우에도 마지막에 가서는 그 아이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될 평화롭고 정겨운 인간 세상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요정 나라로의 이동이 온전히 행복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Away with us he's going,
The solemn-eyed:
He'll hear no more the lowing
Of the calves on the warm hillside
Or the kettle on the hob
Sing peace into his breast,
Or see the brown mice bob
Round and round the oatmeal-chest.
우리와 함께 가고 있는
진지한 눈의 아이.
그는 더 이상 따뜻한 언덕 위
송아지 울음이나 화로 위 주전자가
그의 가슴에 불러주는 평화의
노래 소리 듣지 못하리라.
혹은 갈색 생쥐들 귀리뒤주 주변을
들락거리는 것 못 보리라. (VP 88))
이는 앞에서 살펴본 작품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결국 예이츠의 초기 시가 여성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직면한 두려움이나 불안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작품들이 드러내고 있는 여성성에 대한 지향과, 그에 따른 불안감이나 두려움은 어떤 정치적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우리에게 이 시기 예이츠가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이루고자 했던 바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간략하게 얘기하자면, 비록 그는 영문학의 전통으로부터 시를 배웠고 영어로 시를 썼다고는 해도 그는 엄연한 식민지 아일랜드의 시인이었고, 따라서 아일랜드의 정치적, 문화적 독립을 위해 자신의 시가 큰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갈망했다. 한마디로 아일랜드 민족주의운동의 시적 대변자가 되기를 원했다. 이러한 목표 하에 그는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에 참여하였고, 특히 아일랜드의 정신적, 정서적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신화, 전설, 민담, 민요 등을 발굴하여 자신의 시 창작에 사용하고자 했다. 이는 영국사회가 대변하고 있는 산업화와 물질주의, 그리고 이성과 과학에 의한 진보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여, 영국에서는 이미 사라져버렸지만 아일랜드에는 아직 남아 있는 근본적이고 전통적인 가치들을 내세움으로써 정신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문학을 통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일종의 문화적 민족주의로서, 예이츠의 초기의 삶과 예술을 구성하고 있는 핵심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