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은 오래된 미래다!
_무분별한 고전 해석과 윤색을 경계하며
최근 동양고전 혹은 동양철학과 관련한 출판계의 동향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갈래의 주된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동양고전을 서양철학의 관점으로 해체하여 재해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은미하게 드러난 삶의 지혜나 심신수양의 글귀만을 취하고 윤색하여 자기계발서로 펴내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것들이 모두 잘못은 아니다. 오히려 서구 중심주의로 치달은 지금의 세계를, 또 그로인한 현대인들의 정신적 피폐함을 생각하면 긍정적인 시도로 보인다. 서양의 물질적·기계적 세계관이 빚어낸 문제들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동양의 정신문화가 그 대안이 될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방식의 접근에서는 공맹孔孟이나 노장老莊, 연암燕巖이나 다산茶山의 역사적인 본모습은 쉽게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서양철학으로 동양고전을 재해석한 것들은 여전히 서양철학의 담론인 경우가 많으며, 자기계발서로 윤색된 동양고전에는 대부분 원저자가 사라지고 역자 나름의 인생철학이 끼어들기 마련이다. 그곳에서 동양고전은 사상서로서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천편일률적인 주례사와 같은 격언집이 되어버린다.
옛것을 돌아보고 오늘의 거울로 삼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것이 고전을 읽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고전을 오늘의 입맛에 맞게 재단하면서 경전의 권위에 빌붙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선인들의 삶과 사상을 오늘의 눈으로 평가하여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경계할 일이다. 난세를 극복하려 했던 그들의 치열한 고민과 사상을 당시의 시대 상황과 한계를 고려하여 바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한 작업이 선행된 이후에야 고전의 참된 의미를 오늘에 되살리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우리에게 필요한 정신적 자양도 그러한 과정을 통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고전은 오래된 미래’라고 말하지 않는가?
우리가 아는 공자는 본래의 공자가 아니다!
_공자에 대한 뿌리 깊은 오해와 새로운 오해
우리 역사에 최초로 등장하는 유학에 관한 기록은 고구려 소수림왕이 태학太學을 설치하여 유학을 가르쳤다는 내용이다. 물론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유학이 우리 민족의 생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는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고려 말 불교의 폐단을 극복하고자 신진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수용하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단행한 이래로 유학을 개혁한 신유학인 성리학은 수백 년간 우리 민족의 지배 사상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유학의 종주인 공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또 ‘공자’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는가? 지혜로운 현인, 인자한 스승, 고매한 선비, 그것도 아니면 고루하고 보수적인 유교 문화의 왜곡된 일면이 아닌가? 하지만 그런 것들만으로 공자를 규정짓는다면 본래의 공자에는 절대 다가설 수 없다.
실제로 우리는 공자를 떠올릴 때, 도덕군자라는 이미지를 연상하지만 정작 『도덕경道德經』을 쓴 사람은 노자老子라고 하는 가상 인물이고, 공자는 도덕론을 말한 바가 없다. 또 삼강오륜三綱五倫이 공자의 말이라고 착각하지만, 오륜은 맹자孟子의 말이고 삼강은 동중서董仲舒의 말이다. 공자가 말한 도덕률은 ‘삼정三正’이 유일하다. 그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도덕률과는 다르다. 그것은 그가 지향한 서주西周의 소강小康사회를 복원하기 위한 정책 대안이었다. 부부는 차별되어야 한다는 부부별夫婦別, 부자는 친해야 한다는 부자친父子親, 군신은 엄격해야 한다는 군심엄君臣嚴이 그것이다. 이는 타고난 신분과 이에 따른 직분을 엄격히 해야 한다는 이른바 정명론正名論의 핵심 요소를 밝힌 것이다.
또 우리는 조선의 지배 사상이었던 성리학으로만 공자를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청淸나라 안원顔元과 같은 학자는 ‘성리학’은 요순堯舜과 주공周公의 정파인 ‘공자학’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주장했다. 만약 조선의 선비가 이런 말을 했다면 사문난적으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물론 공자의 이러한 이미지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본래 경세치학經世治學인 공자의 경학經學은 한漢나라 때는 동중서에 의해 음양오행과 미신을 붙인 위학緯學이 되었고, 한나라가 망하고 위진남북조시대에 들어서자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명을 받은 하안何晏과 왕필王弼이 노자를 끌어다 붙여 현학玄學을 만들었고, 당唐나라 때는 도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유학이 쇠퇴하자 유가들이 자청하여 도교에 기생하여 잔명을 보존하려 했으므로 도학道學이 되었다. 송宋나라 때는 주희朱熹에 의해 불노佛老를 결합하여 이학理學이 되었고, 명明나라 때는 선불교를 덧붙여 심학心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였던 공자도 때로는 도인道人으로 때로는 선인仙人으로 모습이 바뀌었다.
그러나 후인들이 만든 위학?현학?도학·이학?심학이 잘못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나름대로 당시의 정치 환경의 변화와 갈등에 대응하려는 소통·변용·융합의 노력이었으므로, 마땅히 그 정반·장단을 고려해야 한다. 일률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편향적이다. 다만 공자에서 파생되었다 할지라도 그것들 나름의 다른 정합체일 뿐 공자의 학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오늘날 책방에 나와 있는 『논어』 번역서들은 공자의 경세치학은 고사하고, 후대의 계승·융합의 업적조차 담고 있지 않다. 오로지 그 나물에 그 밥처럼 비슷비슷한 처세훈들뿐이다. 처세훈이란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몰역사적 인기 상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처세훈도 자본주의 시대 CEO들의 새로운 성공담에 밀려 인기가 시들해지자, 반성은커녕 한술 더 떠 캐릭터를 날조하여 가짜 상품들을 만들고 있다. 이제 공자는 ‘성공한 경영인’으로 심지어 ‘섹시한 사내’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공자의 덧붙여진 두터운 왜곡과 오해를 걷어내지 않는다면 공자의 본모습을 알기에는 요원하다.
공자에게서 오늘의 한계를 보다!
_진정한 보수주의자, 지식인 계급의 시조
그렇다면 과연 공자는 누구인가? 공자는 2,500년 전 춘추전국시대라는 난세를 온몸으로 살아낸 정치가요 대사상가였다. 그리고 그의 학문은 왕도주의에 기반을 둔 군자학君子學이었으며, 경세치학이었다. 그의 담론의 핵심은 ‘왕도王道’와 ‘복례復禮’와 ‘정명正名’이었다. ‘왕도주의’란 제후들에게 빼앗긴 왕권을 왕에게 복원시키고 가문에 빼앗긴 군권君權을 제후에게 원상회복하는 것이고, ‘복례’란 공자의 사표인 주공이 체계화한 주례周禮의 권위를 회복하자는 것이고, ‘정명’이란 주어진 신분과 관직을 바르게 지켜 명분名分을 세우자는 것이다. 이를 내세운 것은 그가 당시 민생 피폐의 근본 원인이 왕권의 권위가 무너진 데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난세의 직접적인 원인인 제후들끼리의 겸병전쟁도, 관리들의 착취도 모두 왕권의 추락에 원인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왕도와 덕치를 주장했고 그 방도로 주례의 부흥을 주장했다.
이처럼 공자의 담론은 모두가 구체제의 복고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민생보다 국가와 가문을 우선시했다는 점에서 그는 보수주의자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보수주의는 지금의 보수주의와는 다르다. 그는 귀족들의 군웅할거를 반대하고 지식인 계급의 중도주의를 제창했다. 그리고 신본주의를 인본주의로, 부국강병주의를 균분均分·인정仁政으로 개혁하려 했다. 또 “나라에 도道가 있으면 녹을 먹지만, 도가 없는데도 녹을 먹는다면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공자야말로 건전한 보수주의의 원조라 할 만하다.
또한 공자는 지식인 계급인 유사 출신으로, 학문이라는 것을 정립하고 학자들을 정치의 중심 세력으로 만든 지식인의 시조였다. 공자 당시 유사들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四民 중 사민士民에 속하는 피지배계급이었다. 그들은 대인이라 불리는 귀족의 가문이나 제후에게 고용되어 공전公田의 일부나 봉급을 받아 생활하는 월급쟁이 지식인이었다.
특히 공자는 사士 중에서 걸출한 사로서 이른바 ‘유사의 경세치학經世治學’ 즉 유학을 창립함으로써 사士 계급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중도계급으로 정립시켰다. 그리고 군자(관장)의 조건으로 신분적 혈통 외에 문文(선왕의 말씀을 적은 글)을 추가하여 유사들이 군자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것이야말로 지식인이 역사의 전면에 최초로 등장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공자는 지식인 계급의 조사祖師인 것이다. 2,500년 전 지식인의 시조인 공자를 비판적으로 읽는 것은 오늘날 지식인의 한계와 약점을 경계하는 거울이 될 것이다.
인문학 위기의 극복을 위해 고전은 사상서로 다시 읽혀야 한다!
_정치·사회사상서로서 『논어』의 재정립을 바라며
공자나 맹자의 말에는 물론 처세훈이 많다. 그러나 교훈담으로 윤색된 동양고전 번역·해설서들이 서점가를 점령하고 있는 가운데, 또 다른 처세훈을 더 보탤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처세훈을 현실의 구미에 맞도록 재해석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지 학술의 몫이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공자는 건전한 보수주의자의 전형이요, 지식인 계급의 시조였다. 난세의 대사상가였던 그는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동아시아 문화의 한 축으로 여전히 살아 있다. 그런 그에게서 처세훈만을 취한다면 과연 우리의 정신적 지평이 얼마나 발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물론 공자의 말을 금과옥조로 삼자는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공자의 반대편에 서 있는 묵자墨子를 제시하고, 『맹자』·『순자』·『한비자』·『좌전』·『예기』 등 여러 자료들과의 대조·비교? 통해 비판적 관점에서 공자를 바라보고 있다. 이 책의 주안점은 그런 비교 분석을 통해 역사적인 공자의 본모습을 최대한 복원함으로써 2,500년 전 그들의 난세에 대한 고민과 방책을 알고, 이를 거울로 삼고자 하는 데 있다.
그런데 최근 일각에서는 인문학의 위기를 걱정하고 있다. 세상은 나날이 실용과 경쟁으로 치닫고 있다. 그러므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기술 외에 다른 학문들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듯하다. 인문학의 위기는 아마도 그러한 시대적 현상에서 파생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인문학은 실용적 가치가 없으므로 폐기되어도 좋을 학문이란 말인가? 오히려 우리는 인문 정신의 고갈을 경계해야 한다. 인문 정신의 고갈은 비판 정신을 마비시킬 것이고, 그 결과는 집단적 광기로 발현될 것이다. 이는 인류 역사가 이미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인문학 위기의 극복을 위해서도 고전은 역사적 현실과 시대적 한계를 고려한 사상서로서 읽혀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은 교훈담이나 처세술이 아니다. 『논어』의 정치·사회사상서다. 이 책이 동양고전의 인문철학적 재정립을 위한 출발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