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 김동호 위원장이 이야기해주는 영화제의 이모저모
부산국제영화제를 떠나는 김동호 위원장이 지난 20여 년간 영화와 인연을 맺고 세계 각지를 돌며 기록한 영화제와 영화계 안팎의 이야기 『영화, 영화인 그리고 영화제』를 문학동네에서 펴냈다. 이 책은 영화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영화제를 만들고 이끌어가는지, 지구상의 영화들이 어떤 유통 경로를 거쳐 우리에게 전달되는지 같은 여러 문제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저자는 『영화, 영화인 그리고 영화제』를 통해 영화제가 단순히 영상을 쏘아 스크린에 보여주는 것만을 목적으로 한 행사가 아님을 일깨워준다. 그곳에선 사람이 모이고 만남이 생겨난다. 영화를 생산한 사람들(제작자, 감독, 배우 등)과 영화를 소비하는 사람들(관객, 영화사 구매자(buyer), 언론사 기자 등)이 한데 모이고, 이들 사이에 나름의 성격을 지닌 교류가 이루어진다. 영화제란 영화를 매개로 펼쳐지는 지극히 현대적인 축제이다.
20세기에 눈부신 발전을 이룬 영상매체의 대표 주자이자, 산업과 예술의 반인반수 같은 기이한 존재인 영화가 있고, 영화를 둘러싸고 갖가지 욕망을 채우려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그곳이 바로 영화제인 것이다. 산업이자 예술이라는 독특한 특성을 지닌 영화, 모두가 이 영화에 열광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영화의 본질적 측면 중 하나인 거대한 상업적 기제를 예민하게 인식하는 이는 거의 없다. 영화제는 영화란 매체의 예술적 가치를 인증하는 동시에 산업적 가능성을 타진하는 자리다.
김동호 위원장의 이 책은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시스템의 이면을 자연스럽게 확인시켜주면서, 영화 그 자체를 만들고 즐기는 사람들의 순수한 열정까지도 구체적으로 그려준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영화제들이 어떤 개성을 지니고 있으며, 어떻게 자신만의 풍경을 자아내는지, 저자는 수십 년간 영화제를 탐방한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 관련 상식들과 영화제의 이모저모를 상세히 풀어 이야기한다.
영화제를 위해 발 벗고 나선 ‘지난 20년간의 기록’이자 ‘퇴임을 기념하는 책’
그의 퇴임은 올 2010년 부산영화제에서 단연코 최고 관심사이다. 어떤 자리에 사람이 들고 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왜 부산영화제는 유독 깊은 존경과 큰 아쉬움으로 보내면서 그와의 작별을 준비하는 것일까. 부산영화제의 성공에는 김동호란 인물이 있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내 최초로 국제 규모의 영화제를 세우고 그것을 성공으로 이끈 사람이라는 찬사에서 세계 영화제를 술로 재패한 사람 같은 장난 같은 표현까지, 그에겐 참 많은 수식이 따라붙는다.
하지만 이 책에서 그가 영화제 이야기를 들려주는 목소리는 차분함을 넘어 심지어 건조해보이기까지 하다. 그는 자신이 발 딛었던 영화제들을 아주 덤덤하게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는 데 치중하여 독자들을 안내한다. 그러면서도 그 마무리는 한결같이 한국영화의 미래로 모인다. 다리품을 팔아 세계 영화제를 주유했던 것이 말 그대로 놀고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영화와 부산에서 펼쳐지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며, 그가 부산국제영화제를 위해 이곳저곳을 다니며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고 큰 노력을 경주해왔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례이다.
이는 책의 서두에서 ‘세계 영화인들의 추천사’ 중 하나로 임권택 감독이 소상히 밝혀주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본문 8-10쪽). 관료사회에서 잔뼈가 굵어 제2대 문화부 차관까지 올랐던 그가 영화진흥공사 사장(현 영화진흥위원회)이 되면서 영화와 첫 인연을 맺고 오늘날 부산국제영화제를 세계적인 영화 축제로 만들기까지 거의 20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그는 세계 영화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국의 문화계를 대표하는 유명인사로 거듭났다.
굳이 리더십을 내세우려 하지 않았음에도 그가 지닌 덕장의 면모는 ‘허우샤오시엔’(대만 영화감독), ‘티에리 프레모’(칸 영화제 집행위원장), ‘피터 반 뷰렌’(네덜란드 영화평론가) 같은 이들이 그를 따르는 모임 ‘타이거클럽’(김동호의 이름 중 ‘호랑이 호’를 따서)을 만들게 하기까지 했다(본문 176쪽 사진을 참조하라). 그는 한국영화의 성장과 궤를 같이하며 자신의 성장을 일구어냈다. 책 속에는 그런 그의 면모가 곳곳에 배어 있다.
도빌 아시아영화제에서 토론토 국제영화제까지, 5대륙 40곳에 이르는 영화제 소개
유럽, 아시아, 미주,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 5대륙에서 펼쳐지는 40개에 이르는 영화제가 소개돼 있다. 영화제의 수록 순서는 ‘가나다 순’을 따랐다(편집상 ‘영화명’은 영문 표기로 통일했다). 그것이 김동호 위원장의 바람이었다. 베니스, 칸, 베를린 같은 거대 영화제를 앞머리에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영화제 간에 어떤 우열을 두지 않고 공평하게 다루자는 제안이었다.
특히 칸 영화제의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 같은 이는 자신과 남다른 친분을 지닌 유명인사임에도 책의 뒤표지에 그의 추천사를 내걸어 거대 영화제의 후광을 입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의 이런 모습에선 모종의 윤리의식이 느껴질 정도였다. 어쩌면 이러한 신중한 마음가짐이야말로 그를 세계적인 영화인으로 끌어올리고 부산영화제를 성공시킨 제일의 힘이 아니었을까.
그가 소개하는 세계 각지의 영화제들 역시 마찬가지의 성격을 지닌다. 영화제의 역사가 깊은 유럽이 절반이 좀 넘는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밖에 대륙들 영화제도 깊이 있고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그런 영화제에는 오히려 더 큰 관심을 쏟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나름의 개성을 지닌 작은 영화제들에 보내는 저자의 따뜻한 시선
이 책에는 일반 독자들이 거의 들어보지 못했던 작은 영화제가 여럿 소개돼 있다. 과거 원양어업의 전진기지에서 한국 교민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화합의 장으로 탈바꿈한 스페인의 한 섬에서 펼쳐지는 ‘라스팔마스 국제영화제’(본문 36쪽), ‘웃음과 평화’ 시상부문을 만들어 역사적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감을 전해주는 ‘오키나와 국제영화제’(본문 268쪽), 남태평양 타이티 섬에서 폴리네시아 사람들의 곡진한 삶을 다루는 ‘타이티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본문 346쪽) 같은 영화제들은 우리가 처음 접해보는 영화제일 것이다.
그밖에도 28세 청년이 집행위원장을 맡아 영화의 혁신과 젊음의 패기를 보여주는 동유럽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열리는 ‘오프플러스카메라 국제독립영화제’(본문 130쪽), 정치적 억압 속에서 예술의 자율성과 영화의 독립성을 지켜가는 이란의 ‘파지르 국제영화제’(본문 278쪽), 장난처럼 오간 말에서 시작된 아르메니아의 ‘예레반 국제영화제’(본문 90쪽), 지난 2002월드컵 이후 상처 입은 이탈리아인들의 민심을 달래고 한국문화를 올바로 알리기 위해 창설된 ‘피렌체 한국영화제’(본문 208쪽)같이 나름의 개성을 지닌 작은 영화제들도 인상적이다. 물론 세계 3대 영화제니 세계 8대 영화제니 하는 유수의 영화제들도 당연히 그 탐방의 기록을 남겨놓았다. 체코의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같이 유명한 영화제들의 경우에는 그 역사와 변천, 오늘의 위상과 그 미래까지 언급하여 머릿속에 선명한 지형도를 그려준다.
영화제란 사람과 사람의 일상을 되살려내는 문화적 힘의 집적체다
이 책에 소개된 영화제들 중에는 오랜 시간 부침을 겪다 어렵사리 영화제의 위상을 회복하는 사례가 종종 나온다. 김동호 위원장은 영화제는 그 위상에 따라 저절로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바깥에서 막연히 보는 것과 달리, 영화제도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 사람이 바뀌면 영화제의 성격도 바뀐다고 강조한다. 이 책에 소개된 40군데의 영화제에서 매번 영화제 창설자와 운영진들, 그리고 그에 참여하는 관계자들과 관람객들을 언급하는 것도 바로 그런 까닭에서 나온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국제영화제’라 할 수 있다. 로테르담이라는 도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도시 전체가 참혹한 폐허로 변했다. 하지만 그들은 잿더미 위에서 새롭게 도시를 재건하고, 그곳에 영화제를 창설해 문화가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김 위원장은 이렇듯 영화제를 통해 새로운 문화적 힘을 얻었던 사례들을 자주 인용한다. 그가 영화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파시즘 정권치하의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처럼 정치의 수단으로 영화제가 악용되는 사례도 있었음을 잊지 말라고 강조한다.
영화의 환상을 주는 것보다 더 크게, 사람이 주는 감동의 이야기
김동호 위원장이 소개하는 수많은 영화제들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는 폴란드 크라쿠프 오프플러스카메라 국제독립영화제의 사례다. 영화제 개막을 일주일 앞둔 올 4월 10일 러시아로 향하던 폴란드의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 부부와 최고위층을 태운 대통령 전용기가 러시아 스몰렌스크 공항 부근에 추락해 96명 탑승객 전원이 사망한 사건 말이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초에 폴란드를 침공한 러시아가 폴란드의 재건을 막기 위해 지도층 인사 2만2천 명을 처형했던 ‘카틴 숲 대학살’의 70주년 추모행사에 참석하던 길이었다. 비극의 현장을 추모하려던 일정이 또하나의 비극을 불러온 것이다.
16일에 영화제는 개최하려던 영화제 개막은 19일로 연기되었다. 열흘로 예정된 영화제 기간도 일주일로 단축됐다. 설상가상 닷새 뒤인 15일에는 아이슬란드의 에이야프얄라요쿨 화산이 폭발해 화산재가 유럽의 하늘을 뒤덮었다. 영화제에 참석하려던 주요 게스트들은 ?줄이 일정을 취소했다. 필름 운송수단도 끊겼다. 김동호 위원장 역시 처음에는 불참을 통보했다. 그러나 좌절하고 있을 젊은 순박한 28세의 청년 집행위원장 시먼과 영화제 스태프들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혀 결국 그는 항공기 결항이라는 악조건을 헤치고 폴란드의 작은 도시 크라쿠프까지 찾아간다.
영화제 집행위원회는 지혜를 발휘했다. 상영관마다 디지털상영 기기들을 확보했고, 필름을 가져오는 일은 인공위성을 통해 파일로 전송받아 102편의 영화들을 성공적으로 관객들에게 선보였던 것이다. 국가적 재난과 불가항력의 자연재해 속에서도 크라쿠 영화제는 중단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영화제가 사회.문화적으로 어떤 기능을 떠맡고 있는지를 보여준 값진 본보기라는 생각이 든다. 김동호 위원장은 이 신생 영화제에 불참을 통보해놓은 뒤 영화제를 이끌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계속 눈에 아른거렸다고 쓰고 있다.
그래서 무조건 예정대로 길을 나섰다는 것이다. 고난과 역경에 주저앉지 않도록 젊은이들을 격려하겠다는 마음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동기감응이라고 해야 할까, 실제로 2010년 크라쿠프 영화제의 홈페이지를 방문해보면 그곳에 참석한 김동호 위원장의 사진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그만큼 그들에게도 김 위원장의 방문은 고마운 일이었던 것이다.
영화 관련 상식과 영화제 관련 정보를 수록한 작은 영화 백과사전
저자는 이 책에서 다루지 못한 30여 개의 주요 영화제에 관해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지만, 수록된 영화제만으로도 세계 영화제 전체의 흐름을 알기에 부족함이 없다. 김동호 위원장의 연륜과 경력이 아니라면 이 정도로 충실한 내용을 지닌 포괄적인 영화제 소개책자를 다시 만나기도 쉽진 않을 것이다. 자신의 일상에 관해 49년간 빼곡하게 메모를 해왔다는 그의 기록벽이 아니었다면 한국영화가 어느 영화제에 진출하여 어느 부문에서 어떤 결과를 냈는지를 그렇게 소상히 풀어낼 수 있었을까.
훗날 이 책은 세계 영화제의 이모저모를 소개한 국내 저자의 첫 번째 책이자 한국영화의 세계 영화제 진출 성과를 기록한 유용한 사료로 기억될 것이다. 이런 가치 외에도 각 영화제마다 관련 도판들을 실어 영화제 직접 발을 딛고 참석한 것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으며, 흥겨운 축제의 마당인 영화제 특유의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 해당 영화제를 대표하는 아이콘들을 빠짐없이 덧붙였다. 또한 영화제 소개에 그치지 않고, 영화 상식이나 영화사 관련 에피소드, 영화감독 등에 관해 필요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도록 짬짬이 따로 지면을 구성했다.
‘퍼블릭 시스템 시네마’ ‘극장 앞에서 줄서기’ ‘배지(badge)’ 등 영화제와 직접적으로 연련된 정보만이 아니라 ‘알프레드 히치콕’ ‘잉마르 베리만’ ‘오가와 신스케’ ‘요리스 이벤스’ 같은 영화감독들의 필모그래프, ‘뤼미에르 영화의 체코 상영’ ‘브라질의 시네마 노보’ 등 영화와 영화사의 요긴한 정보들도 함께 수록해 독자들의 편의를 도왔다. 끝으로 책의 말미에는 ‘김동호 위원장이 소개한 세계 영화제’ 전부에 관한 압축적인 개요를 수록해 세계 영화제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했다. 김동호 위원장의 정성과 손길이 가득한 이 책으로 영화와 영화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