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서열 1위는 최순실, 2위는 정윤회, 3위는 박근혜”
‘정윤회문건’ 최초 보도와 최순실 단독 인터뷰로 비선의 실체를 세상에 알린
세계일보 기자들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추적 논픽션
[12쪽] 가을이 나뭇잎에 박히기 시작하던 2016년 10월 26일 낮 12시 독일 프랑크푸르트 외곽에 위치한 헤센 주 프랑크푸르트공항 근처 NH호텔 6층의 한 세미나실. 문에는 ‘Garderobe Wardrobe(옷장)’라고 쓰여 있었고, 문밖 복도에는 세미나를 하던 지멘스 직원들이 서성거렸다. 나는 폭이 150cm 정도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한국 현대사에서 최악의 국정농단 장본인 최순실과 마주앉았다. ‘최 원장’(박근혜 대통령), ‘선생님’(문고리 인사들), ‘그분’(조리장), ‘회장님’(고영태 등), ‘국정농단 장본인’(언론)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린 최순실. 그는 내가 기자로서 이전에 만난 모든 인터뷰이를 뛰어넘는 사람이었다. 최선이 아닌 최악의 방향에서. 최순실은 세미나실에 들어오자마자 ‘레이저 눈빛’을 쏘더니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테이블에 마주앉아선 미리 준비한 질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10여 분간 펑펑 우는 시늉을 하며 일방적인 주장만 쏟아냈다. 화장지 두어 장을 건네자 안경을 벗고 눈물을 닦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그와 박근혜의 모든 것이 거짓과 위선일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싹텄다. _ ‘프롤로그’ 중에서
2017년 봄을 맞기까지 6개월여, 우리는 신문과 방송, 거리 곳곳에서 ‘박근혜’와 ‘최순실’이라는 이름을 쉼 없이 보고, 듣고, 말했다. 이제 되돌아보고 싶지도 않을 만큼 국민 모두를 분노케 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거리에서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은 이제 새로운 정권을 맞이하며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 역사에서 그러한 분노와 좌절의 시간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그리고 희망을 현실로 안착시키려면 잘못된 과거를 제대로 정리하고 기억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먼저 생각해볼 것이 있다. 우리는 최순실에 앞서 박근혜 옆에 존재했던 인물, 최태민을 알고 있다. 최태민과 최순실 사이의 결코 짧지 않은 시간, 그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어쩌면 우리가 놓쳐버린 그 시간, 거기에 이번 사태와 관련한 중요한 맥락이 숨어 있지는 않을까?
한울엠플러스(주)에서 이번에 출간된 『비선 권력』은 ‘정윤회문건’ 최초 보도와 최순실 독일 현지 단독 인터뷰로 비선의 실체를 세상에 알린 세계일보의 기자들이 의기투합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전말을 총정리한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2016년 그 긴박했던 시간을 딛고 훨씬 더 먼 과거로까지 나아가 박근혜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행하면서 공적 공간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최태민과 최순실을 만나 정치인으로 성장해 대통령이 되고 결국 탄핵되기까지, 취재와 자료 조사를 통해 접근 가능한 거의 모든 사적·공적 사건들을 하나의 긴 이야기로 풀어간다. 이를 통해 저자들은 대통령 박근혜와 그를 둘러싼 비선 권력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했으며 몰락했는지를 통사적으로 규명한다. 일종의 ‘박근혜와 비선 세력 흥망사’라 할 만하다.
이화여대, 태블릿PC, 미르와 K스포츠, 청와대 프리 패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비선 진료…. 하루가 지나면 또 다른 특종이 쏟아져 앞선 특종을 묻어버리던 시간을 보내며 국민은 분노하고 허탈해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충격의 강도에 조금씩 무뎌졌다. 언론도 수면 위로 떠 오른 거대 이슈를 제때 다루는 것만으로도 숨 가쁜 나날을 보냈다.
저자 중 한 명인 김용출 기자는 2016년 10월 26일 독일 현지에서 최순실을 인터뷰했다. 우리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킨 이 인터뷰 이후 김용출 기자를 팀장으로 하여 세계일보 안에 특별취재팀이 꾸려졌다. 최순실 국정농단과 정윤회문건 관련 보도로 2017년 한국신문상을 수상했을 만큼 이번 국정농단 사태를 취재하는 데 열을 올렸던 특별취재팀 기자들은, 하지만 사태의 중심부로 파고들수록 박근혜와 비선 권력의 관계와 역사가 신문 지면에 담기에 너무도 방대하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이에 특별취재팀이 해체된 뒤 이들은 그러한 내용을 정리해 책으로 담기로 한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을 되새기며 ‘기억투쟁’에 나선 것이다”.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우리가 놓친 수많은 비극의 복선들
이번 국정농단 사태에 얽힌 수많은 줄기에서 몇 가닥만 뽑아도 웬만한 소설이나 영화 못지않은 스펙터클한 줄거리가 잡힌다. 어떤 이는 박근혜 정권이 블랙리스트로 문화예술계를 억압하더니 한국 소설과 영화를 죄다 시시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기까지 했다고 차마 웃지 못할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불행하게도(?!) 이 책 『비선 권력』의 내용 역시 흥미진진하다. 700쪽에 육박하는 두꺼운 책이 금세 읽힌다.
크게 볼 때 이 책은 박근혜가 육영수 사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고 최태민이라는 사람을 만나고 대구에서 국회의원이 되고 당 대표가 되고 대통령이 되고 끝내 탄핵이 되는 과정을 서술한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은 수십 년에 걸쳐 벌어진 과정에서 일어난 수많은 일이 지금 모두가 알고 있는 결말로 치닫는 이야기에서 하나하나 중요한 복선이었음을 짚어낸다. 그리고 거기서 이 국가적 비극의 크고 작은 사유도 함께 건져 올린다.
책은 시간순으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1장 도입에 앞서 ‘前史 커넥션의 시작’이라는 제목의 서장에서는 박근혜가 최태민과 만나기까지의 과정이 자세히 설명된다. 여전히 많은 부분 베일에 가려진 최태민의 실체에 관해서도 살펴본다. 1장에서는 1976년부터 1979년까지 영애 박근혜와 그를 포섭한 최태민의 행적을 추적해간다. 이를 통해 최태민이 저지른 비리에 박근혜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드러난다.
[66쪽] 최태민이 이때 청와대를 빈번하게 드나들면서 박근혜를 수시로 만났다는 증언도 있다. 최태민 스스로 박근혜의 지프차를 이용해 청와대를 무단출입하고 박근혜와 수시로 만난다는 사실을 자랑했다는 것이다.
[73쪽] 최태민이 새마음갖기운동에 열심인 박근혜를 앞세워 기업들로부터 막대한 돈을 모으고 있었는데, 박근혜는 이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박근혜는 최태민이 기업으로부터 자금을 수금하면 그 대가로 기부금을 낸 기업의 민원을 해결해줬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한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일했던 김정렴에 따르면 박근혜가 어느 날 자신을 찾아와 건설업체와 방직업체 세 곳의 이름이 적힌 메모지를 건넸다. 김정렴이 “이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박근혜는 “구국선교단에서 기부금을 낸 기업체 명단”이라며 “이 업체들의 민원을 해결해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제대로 기억되지 않은 시간. 그로부터 약 40년 후에 이와 거의 똑같은 일이 반복됐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1장에서는 또한 박정희 시해 사건과 최태민이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이야기한다. 최순실과 함께 몰락한 박근혜를 떠올릴 때 가볍게 보아 넘기기 어려운 부분이다. 2장에서는 박정희 사후 10여 년간 세간에 잘 노출되지 않았던 박근혜와 최태민 일가의 행적을 좇는다. 당시 박근혜는 최태민과 자주 만나며 관계를 더욱더 돈독하게 다지는 한편, 육영재단이나 영남재단, 한국문화재단 등 여러 재단을 맡게 되면서 재단 업무에 최태민의 사람들을 대거 활용했다. 또한 최태민은 잠시 움츠렸던 보폭을 다시 넓히며 막대한 부를 축적해나갔다.
3장에서는 박근혜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그리고 ‘국회의원 박근혜’ 탄생에 최순실 일가가 어떻게 관여했는지, 이 시점에 문고리 3인방은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 자세한 내막이 드러난다. 4장에서는 참여정부 시절 유력 정치인으로 떠오른 박근혜, 그리고 그의 부상에 발맞춰 영향력을 키워가는 최순실의 행적을 추적한다. 이어서 5장에서는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여당의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서 입지를 다져가는 박근혜와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 작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최순실의 모습이 그려진다.
6장부터 8장까지는 ‘대통령 박근혜’의 등장과 함께 본격화된 비선 권력의 행보를 다룬다. 특히 비선 권력의 실체가 드러나는 중요한 계기가 된 ‘정윤회문건’ 사태에 박근혜 정권과 비선 권력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최순실을 중심으로 한 비선 세력이 어떻게 정권을 주무르며 이권을 취했는지가 상세하게 서술된다. 9장은 비선 실세 최순실이 베일을 벗고 결국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는 시점까지, 온 국민의 분노가 절정에 치달았던 2016년 하반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박근혜, 최순실, 청와대, 국회, 검찰, 기자, 시민들의 숨 가빴던 시간들이 밀도를 더하며 그려진다. 마지막 10장에서는 특검의 최순실 국정농단 수사와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심판 과정이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물론 결말은 모두 알고 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물론 훗날 어떻게 될지 모를 열린 결말이다.
국민이 허락하지 않은 권력
그리고 그 권력에 기댄 대통령
무엇이 ‘박순실’ 체제를 만들었나
전 국민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지만, 대한민국 현대사에 또렷하게 남겨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인용했듯이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이 책은 기억해야 할 역사를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언어와 체계로 정리해낸 것으로 일차적인 목표를 달성한다. 다만 이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비선 권력이 대한민국을 주무른 치욕의 시간, 그 자체만은 아닐 것이다. 국민이 허락하지 않은 권력이 어떻게 ‘대한민국 권력 서열 1위’가 될 수 있었는지, 그 권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이가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지, 비선 권력의 국정농단을 왜 제대로 견제해내지 못했는지에도 우리의 인식이 닿아야 할 것이다. 저자들 역시 이 점을 강조한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들은 이번 사태를 불러온 가장 큰 원인이 박근혜와 최순실의 잘못임을 지적하면서도, 문제의 근본에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을 뽑고서도 절대 군주로 생각하고 행동한 우리 속의 모든 신민 체제와 양식”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한다. 더 직설적으로 말해 “민주공화국의 온전한 시민이 되지 못한, 의사군주제의 신민이었던 우리 자신”이야말로 국정농단의 또 다른 공범이 아닌가 하는 반성인 것이다.
많은 영화에서처럼 이 책에 등장하는 악인들도 끊임없이 누군가의 비호를 받으며 죗값을 청구받지 않는다. 끝내 법의 심판대에 서기는 했지만, 과연 이것으로 긴 이야기가 마무리될지, 악인의 부활과 함께 후속작으로 이어질지 현재로서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예전에도 그들의 비행을 바로잡을 기회가 분명히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역시 바로 그런 기회일 것이다. 당사자들의 잘못을 밝혀 합당한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은 물론, 예전에 우리가 했던 망각의 잘못을 오늘날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노력이야말로 그런 기회가 요구하는 행동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궁극적으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나라다운 나라’라면, ‘이것이 나라냐’고 반문해야 했던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을 함께 살아온 우리 자신을 이제 차분히 성찰해보는 일 역시 필요하다.
이번 사태를 광범위한 시간과 인물의 관계 속에서 정리해냄으로써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전모를 좀 더 또렷하게 보여주는 책 『비선 권력』은 어쩌면, 우리가 언젠가 보고 들어 알았지만 끝내 눈감거나 잊고 만 사실들을 소환해냄으로써, 앞서 수차례 놓쳤던 기억과 성찰의 기회를 다시 한번 우리 앞에 강제로 가져다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