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경계, 어디부터 어디까지일까
대륙이라는 개념 아래 숨겨진 의미들
우리의 교양은 과거의 의도가 쌓인 것
“터키는 수도가 유럽에 있지 않고, 인구의 95퍼센트가 유럽 밖에 있으므로 유럽 국가가 아니다.”
프랑스 전 대통령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은 2002년 11월 7일에 이 발언으로 공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렇다면 지중해의 섬나라 키프로스와 몰타는 어떤가. 지도 위치상 키프로스는 아시아에, 몰타는 아프리카에 속한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이들 두 나라는 아무런 논란도, 주목도 받지 않고 2005년 4월 1일 유럽연합에 가입했다. 이보다 앞서 유럽연합은 모로코가 아프리카의 일부라는 명분으로 유럽연합 가입을 거부한바 있다.
‘대륙의 경계’가 어디까지인가를 문제 삼을 때 흔히 나오는 근거는 지리이다. 모로코를 아프리카의 일부라고 지리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슬람과 관계가 있느냐를 기준으로 유럽 경계를 정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세계에 대해서 말할 때는 자연적이고 비정치적인 기초, 다시 말해서 변하지 않는 지리적인 기초가 필요하다. 유럽이 문제되는 이유는 정치경제 구성물로서 그들을 지칭할 때 대륙 이름을 쓰기 때문이다.
유럽을 언급하면서 문명 차원을 은폐하는 것은 일관성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유럽을 지표면에 선을 그어 구분된 일부분이 아니라 관념으로 여기면, 유럽과 다른 지역을 가르는 기준에 문제가 생긴다. 즉 그 근거는 자연(자연 지리)인가, 아니면 문화(인문 지리)인가?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 것을 건드린다는 것
이 책 ≪대륙의 발명≫은 세계를 여러 부분으로 구분하는 것이 전적으로 문화의 결과이므로 세계가 지금과 전혀 다르게 구분될 수도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쉽게 말해서 대륙은 바람, 물, 산 같은 자연의 이름이 아니라 ‘발명된 개념’이자 어릴 때부터 학습된 결과라는 것. 이로써 프랑스의 역사지리학 전문가인 크리스티앙 그라탈루는 독자들이 스스로의 관점을 반추해보도록 부추긴다.
터키를 유럽에 포함시킬 것인가로 시작해 유라시아의 표류까지 수백 년 전통을 품어온 대륙의 역사를 하나하나 끄집어낸다. 세계 구분의 역사를 풀어가기 위해서 이 책은 바로크 양식 천장 벽화와 르네상스 예술을 비롯한 도상학(圖像學, iconography) 자료는 물론 중세의 매혹적인 세계전도들을 근거로 활용하면서 풍부한 볼거리를 함께 제공한다. 조각이나 그림에 나타난 여러 형상의 종교적 내용을 밝히는 도상학 입문서로도 활용할 만하다.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발견하면서부터 서서히 주입된 대륙이라는 개념을 환기시키면서 유럽인들을 관통해온 시각을 짚어나간다. 세계사와 문화사를 이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안에 숨겨진 의미들을 새롭게 보고자 하는 독자들의 구미를 당길 것이다. 더불어 여러 예술작품들이 대륙을 어떻게 형상화했는지 시대별로 비교하면서 저절로 배경지식과 교양을 체득할 수 있다.
지구는 둥근데, 왜 세계지도에는 유럽이 중앙을 차지하는 걸까
사실 대륙이라는 범주는 불분명하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지금까지도 굳이 이 범주를 사용하려 하는가. 가장 기초적인 지리 학습도 겉으로는 순수해 보이지만 결코 중립적이지 않고, 세계지도에는 유럽 중심의 세계관이 투영되었다. 일례를 들자. 지구는 둥근데, 왜 유럽이 중앙을 차지하는 세계지도가 더 많은 걸까?(세계시[世界時]를 결정하는 본초자오선이 유럽 중심으로 선정되었음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세계지도를 보면서 우리는 암시적으로 유럽이 중앙에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받는다.
대륙의 역사에서 유럽은 큰 자리를 차지하며 그 안에는 ‘성경 구절’을 근거로 각 대륙과 인류가 나누어가졌다는 관념이 존재한다.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라는 대륙의 이름을 은유와 상징으로 병행했으며 거기에는 문명을 기준으로 미개한 땅을 가르는 차별의 시선이 끼어든다.
“세계 구성원인 유럽은 문명이라는 아주 고전적인 주관성에 따라 중앙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다른 대륙들은 그 주위에 동쪽으로는 아시아, 남쪽으로는 아프리카, 그리고 서쪽으로는 아메리카로 방향에 따라 분류되었고, 그 나머지는 오세아니아가 되었다.”
? 본문 204쪽 ‘6장 우리와 그들’ 중에서
유럽/아시아, 아프리카/아시아, 아메리카/아시아…
그 경계들은 근거 불충분!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는 세계는 5대양 6대주, 즉 여섯 대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틀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프랑스 지리 교과 과정에는 18세기 이래로 5대주(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유럽, 오세아니아)의 전통이 여전히 쓰인다.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아메리카를 두 대륙으로 치고 남극 대륙을 넣어 7대륙으로 이루어졌다고 배운다. 지은이 크리스티앙 그라탈루는 이런 전통이 세계화된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요구 때문에 나왔다고 말한다.
대?을 구분하면서 가장 많이 끌어들이는 논리는 판구조론이다. 20세기 후반에 유명세를 탄 과학 모델인 판구조론에 따르면 대륙 혹은 대양의 구분이 자연에 따른 결과로 증명되는 것처럼 보인다. 판구조론은 대륙을 구분하는 근거가 지구 심층부에 있다는 인식을 사람들의 뇌리에 심어주었다. 다만 유럽 입장에서 볼 때 제약이 있다면, 유라시아판의 서쪽 일부에 불과한 유럽은 ‘아시아의 작은 곶’이 되어 독자성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수십 년 전부터는 ‘세계의 일부’를 가리키는 어휘로 ‘대륙’이라는 단어와 경쟁할 만한 상대가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유럽의 경계가 어디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촉발된다. 이 책은 이 대륙들에 자연적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확신을 마땅히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지구물리학 모형에서 판을 표시한 지도를 한 번 보기만 해도, 전통적으로 세계를 구분하는 경계와 판의 경계는 근사치로만 겨우 겹칠 뿐임을 알 수 있다. 일단 수효 면에서 판이 대륙보다 더 많고, 판의 경계가 바다 한가운데 있거나 산맥을 따르는 경우도 있다. 다시 말해서 판 이름은 대륙을 가리켰던 방식에서 유래한 것일 뿐 둘은 전혀 일치하지 않으며 역사 범주도 다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생각해보자.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경계는 홍해를 전제로 하지만, 홍해는 수심이 얕을뿐더러 강물 유입이 없기 때문에 최후의 빙하기에는 물론 그 이전에도 여러 번 육지에 둘러싸인 닫힌 바다였을 때 거의 사라졌었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은 오래전부터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를 이루었으며 동시에 터키를 양 해안으로 나눈다. 이와는 달리 베링 해에서 아메리카와 아시아의 경계는 국경을 극도로 존중한다. 베링 해에 산재한 섬은 대부분 미국 영토이기 때문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16세기에 유럽인들의 정신을 장악한 세계 구분은 정복자와 선교사를 통해 다른 지역민들에게 투사되었다. 이러한 구분은 무엇보다 유럽인들 자신이 ‘발견된’ 사람들인 나머지 인류와 구별된다는 것을 전제했다. 도상학(圖像學)은 바로 이런 면에서 명백히 장점이 있었고, 지도 편집자들은 그 무대를 꾸미는 데 선구자 역할을 했다. 지은이는 수많은 지도 모음집이나 여행기 속표지를 살펴보면 특히 그들이 의도적으로 세계를 연출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한때는 아시아 대륙과 (현재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같은 몇몇 국가들을 포함한) 제도들 사이에 경계선을 긋다가 이제는 국경선을 존중해서 구분하기도 하는데, 이는 자연지리학에서 지정학으로 슬쩍 넘어간 것이다. 이런 지점을 가장 명백히 보여주는 것은 뉴기니 섬의 분할이다. 2002년까지 이리안자야라고 불리다가 지금은 인도네시아 파푸아라고 불리는 섬 서쪽의 인도네시아 부분과 독립적인 섬 동쪽 부분인 파푸아뉴기니 사이의 국경선을 따라 대륙 간 경계가 나뉜다. 따라서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의 도서, 브루나이, 티모르는 소속 대륙이 오세아니아에서 아시아로 바뀌었다.” ? 본문 173쪽 ‘5장 아틀란티스와 대척점’ 중에서
세계 구분의 역사는 유럽인들이 세계사의 길을 상당 부분 결정했음을 말해준다. 지은이 크리스티앙 그라탈루는 “모든 구분은 역사적이며 특히 자연에서 기원한 구분이라는 인상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끊임없이 되새겨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결론을 맺는다. 세계는 더더욱 다소속과 잡종의 사회로 나아가고 있고, 이런 면에서 보면 세계를 한 방식으로 구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닳고 닳아 용도 폐기된 생각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것이 바로 대륙이라는 개념이요, 사고 틀이다. 세계의 구분과 관련한 문제는 이 책에서만 제기되는 것이 아니며 실용적인 구분을 제시하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아무리 그 효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런 노력들이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만약 논쟁 대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던 것을 비판적인 노력을 통해 상대화하고, 역사화하고, ‘탈자연화’하는 데 기여한다면, 그것이 순전히 부정적인 소득이라고 할지라도 어쨌든 소득이다.”(본문 2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