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 로맨티스트, 정대세가 월드컵 그라운드에서
흘린 눈물의 의미를 읽다
대세는 순수해서 속내를 금세 알 수 있다. 그러나 상대 선수는 그 속내를 읽더라고 그를 막을 수는 없다. ― 나카무라 켄고(일본 축구국가대표)
정대세의 가장 큰 매력은 ‘풋볼 프라이드Football Pride’다. 그라운드 안에서는 반드시 에이스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야망,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무서운 공격수로 돌변한다. 하지만 그라운드 밖에선 ‘순진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재미있는 청년이다. 휴대용 게임기를 비행기에 놓고 내려 새로 구입했는데 그마저도 다시 비행기에 놓고 내린다거나, 여권을 비행기에 놓고 내려 본인뿐 아니라 대표팀까지 곤란하게 만드는 덜렁이 청년이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겨울을 좋아해’라고 외치는 로맨티스트이기도 하다.
정대세는 ‘월드컵이라는 꿈의 무대에서 브라질, 스페인, 잉글랜드 등 강호들과 대결해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월드컵에 참가하는 선수라면 16강, 아니 그보다 높은 곳을 향하려고 상대적으로 약한 조를 원할 법하다. 그러나 그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입김에 나가떨어지더라도 자신이 어디까지 통할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부딪쳐보고 싶어 했다.
그의 꿈이 마침내 실현되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조편성 결과 북한이 죽음의 조에 포함된 것이다. 북한은 카카, 호비뉴, 마이콘 등 스타들이 즐비한 ‘영원한 우승후보’ 브라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버티는 ‘전 대회 4강’ 포르투갈, 프리미어리그 득점왕 디디에 드록바가 버티는 ‘다크호스’ 코트디부아르와 함께 G조에 속하게 되었다. 북한팀으로선 앞길이 막막하지만, 정대세 입장에선 두근거리는 조편성이 아닐 수 없었다.
꿈을 이룬 정대세는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오히려 무모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는 브라질 수비수들에게 겁 없이 달려들었고 세계적인 스타들조차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는 정대세의 눈물을 기억하고 있다. 북한이 44년 만에 월드컵 무대에 선 사실과 꿈에 그리던 무대에 섰다는 벅찬 감동이 교차하면서 흘러내린 뜨거운 눈물이었다. 그러나 그 눈물 뒤에 감춰진 그의 피땀 어린 노력과 강호들을 상대로도 흔들리지 않고 물러서지 않았던 담대함도 오랫동안 기억되길 바란다.
월드컵에서 강한 인상을 남겼던 정대세가 마침내 유럽 진출에 성공했다. 그가 입단하게 된 보훔은 분데스리가 2부 리그에 속해 있으며 지난 92년부터 94년까지 ‘야생마’ 김주성이 활약해 한국 팬들에게도 익숙한 클럽이다. 아마 이 책이 나올 시점에는 독일로 건너가 공식적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등번호를 받고 당당히 보훔 선수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큰 무대에서 실력이 모자란 것을 느끼고 더 많은 경험을 쌓고 싶다던 정대세다운 선택이다. 독일 2부 리그는 이름값에선 처질지 모르나 축구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있어 선수가 성장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높은 곳을 꿈꾸지만 유럽 경험이 전무한 정대세에게 이보다 좋은 출발점은 없다.
물론 그곳에서도 경쟁을 피할 순 없을 것이다. 스타니슬라브 세스탁과 즐라트코 데디치가 버티고 있는 공격진을 파고들어야 하고 언어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겁먹을 필요는 없다. 가와사키 프론탈레에서 보여준 생존력이라면 독일이라는 큰 무대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나갈 것이다.
한국, 북한, 일본에 외면당한 ‘자이니치在日’에서
한국, 북한, 일본이 모두 좋아하는 축구선수로 거듭나다!
대세, 그의 강인한 육체 안에 개구쟁이 같은 영혼이 들어 있다. 그런 언밸런스가 대세의 인간적인 매력이다. 경박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대세는 때로는 자기 자신을 몰아세운다. 내가 누구인가, 다른 사람은 맛보지 못한 아픔을 떠안고 있지 않은가!
그런 헤아릴 수 없는 깊이가 있기에 그는 포효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가느다란 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 얼굴에 천진난만한 미소를 띠면 상대도 어느 새 따라 웃는다. 대세는 사람들을 웃게 만들고 자신은 그보다 더 크게 웃는다. 대세의 미소는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을 날려버린다. 오해와 혐오, 질투 그리고 두려움마저도. (본문 중에서)
대표선수 연습에 참가할 준비를 하는 도중에 문제가 생겼다. 대세의 국적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대세 아버지의 국적은 남한이고 어머니의 국적은 북한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일본에 사는 외국인은 반드시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아야 하는데, 대세 아버지의 국적란에는 ‘한국’, 어머니의 국적란에는 ‘조선’이라고 적혀 있다. 대세가 태어났을 당시에는 아버지의 국적을 따라 ‘한국’이라고 쓴 것이다. 바로 이 한국 국적이 북한 대표가 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처음에는 한릱 국적으로도 조선 대표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게 안 된다더군요. 그래서 국적을 바꾸려고 했죠. 실제로 나는 민족학교에 다녔고, 내 조국은 조선이라고 교육받았어요. 내 국적이 한국으로 되어 있는 것에 모순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바꾸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대세는 ‘조선 국적’을 갖는 것이 일본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해 생각했다.
“위험인물로 낙인 찍히는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게다가 나중에 일본에서 직장을 구할 때도 한국 국적이 더 유리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죠.”
그렇게 결심한 대세를 주위 사람들이 거들고 나섰다. 가장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사람은 그의 어머니였다. 서류를 만들어 이곳저곳 관공서를 들락거렸다. 왠지 꺼림칙한 기관에도 없는 용기를 쥐어짜서 몇 번이고 찾아갔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라서 어렵게 생각되었던 문제도 끈질기게 부딪쳐 보니 몇 가지 조건만 갖추면 국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조건이란 다음과 같다.
1. 부친이 한국 국적이 아니어야 한다.
2. 부친이 한국의 주민등록이 되어 있지 않아야 한다.
3. 부친이 한국 여권을 갖고 있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 세 가지 조건을 완벽하게 어기고 있었다. 그는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국 주민등록증과 여권까지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 법률상 대세의 국적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날 밤, 어머니는 숨죽인 채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처음으로 남편을 원망했어요. 그 양반과 결혼한 것조차 후회했어요. 그 양반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대세는 태어나지도 못했을 텐데 말이에요. 마치 나 혼자서 대세를 낳은 것처럼 분통이 터졌어요.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요? 어쨌거나 그렇게 울어본 건 난생 처음이었어요.”
2005년, 국적 문제로 북한대표팀 입단이 좌절되었을 때, 그 이후로도 뜻을 접지 않고 계속해서 대세의 대표팀 입단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 있었다. 재일본조선인축구협회 이사장 이강홍이다. 이강홍은 대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자신도 공격수 출신이라 대세의 그릇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대세가 말썽꾸러기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대세의 아버지는 국적을 바꿀 수 없는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 하지만 대세는 아직까지 자신의 모국을 선택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렇다면 무슨 방법이 없을까? 외무성에 외국인등록증의 국적변경을 신청해보았지만 절대로 불가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렇다면 북한 쪽에 부탁해보자.’
그러나 이번에는 스파이를 경계하는 북한의 이중국적방지법이라는 법률이 앞을 가로막았다. 직접 국제축구연맹에도 문의해보았다. 국제축구연맹은 한 나라의 대표선수 조건을 ‘그 나라의 국적을 가졌고 다른 나라의 대표경험이 없을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결국 자신이 갖고 있는 여권을 발행한 나라의 대표선수만 될 수 있는 것이다.
“잠깐! 그렇다면…….”
이강홍은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재일동포 사회에서 태어난 아이에게는 여권이 없다. 일본에서는 외국인등록증을 발급한다. 거기에는 국적란이 있는데 대세의 국적란에는 ‘한국’이라고 적혀 있다. 그렇지만 이 외국인등록증의 국적란은 단순한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한반도는 일본의 입장에서는 ‘조선’이라는 ‘지역’에 불과했다. 재일동포들은 ‘한반도 출신 일본인’으로 호적에 등록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외국인등록령이 시행되었을 때 재일동포들은 외국인등록증의 국적란에 전부 ‘조선’이라고 기재되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한반도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나뉘게 된 뒤, 일본은 외국인등록증의 국적을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바꾸는 것만 인정했다. 일본이 북한과 국교를 맺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국적을 바꾸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나라 이름을 쓰는 꼴이 된다.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재일동포들 사이에서는 외국인등록증의 국적란은 의미가 없어지고 말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에 외국인등록증에 ‘조선’이라고 적혀 있어도 일본 법률상으로는 ‘한국 국적’으로 취급한다. 결국 국적란은 ‘기호’에 불과한 것이다.
‘기호’는 한국이지만 대세는 그때까지 스스로 국적을 선택한 적도 없고, 게다가 한국에 호적도 없어서 주민등록을 하지 않아 한국 여권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대세가 북한을 모국으로 선택한다면 북한 여권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이강홍은 이런 논리로 북한을 설득했다. 북한은 대세의 여권을 발행해주기로 결정했다. 국제축구연맹에서 날아온 답변은 간단했다.
‘여권을 가진 나라의 대표가 될 수 있다’
북한이 여권을 발행해주겠다고 밝힌 이상, 이제 대세의 대표팀 입단에는 문제가 없었다. 이강홍은 대세를 불렀다. 다시 한 번 그의 의사를 확인하고 싶었다. 이강홍도 이 선택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정말로 북한 여권을 받아서 북한 대표가 되겠냐?”
만일 대세의 마음이 바뀌었다면 이강홍이 지금까지 해온 일은 수포로 돌아간다. 아무 말 없이 여권 수속을 밟을 수도 있었지만, 이강홍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세는 딱 잘라 말했다.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투였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알았다.”
그 후 아무도 모르게 대세의 여권 수속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반년이 지난 2007년 6월, 대세는 떳떳하게 북한 대표로 발탁되었다. ‘북한 대표팀 입단’이라는 말이 나온 지 무려 4년이 지난 뒤였다. 대세의 어머니는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눈물을 흘린다.
“국제축구연맹이 허가해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대세가 잘 우는 것은 어머니를 닮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