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고독이라는 도시에서 길을 잃었을 때</br>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타인이 아닌 예술이었다</br></br>도시에 거주한다는 것, 혼자가 된다는 것, 외롭다는 것</b></br>타인과 어깨를 스치며 지나다니면서도 홀로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콘크리트와 유리로 만들어진 장소, 도시. 현대의 도시인이라면 누구나 “회복될 여지가 없는 만성 질병”(사회과학자 로버트 와이스) 고독을 앓는다. 저자 올리비아 랭은 런던에서 뉴욕으로 이주한 후 철저히 혼자라는 감각 속에서 우울과 피해망상에 시달리며 ‘외롭다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천착했다.</br>적당히 즐길 만한 고독이 아닌 처절한 외로움, 그것은 “배고픔 같은 기분”이다. 주위의 모두가 파티를 벌이고 있는데 나만 굶고 있는 듯한 기분에 창피해지고 경계심이 들고, 그래서 점점 더 고립되고 점점 더 소외되는 현상. 랭은 그 고독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건 타인과의 관계 맺음이 아님을 깨닫는다. 오히려 고독을 앓았던 다른 이들이 남긴 조각을 찾아나서며, 고독이라는 미궁에서 자신을 구원해낼 지도를 그려나간다.</br><b></br>호퍼에서 워홀까지, 고독을 끌어안고 고독에 저항했던 예술가들</b></br>대도시 속 고독한 현대인을 상징적으로 묘사해냈다는 평가를 받는 에드워드 호퍼. 조이스 캐럴 오츠는 호퍼의 그림 중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가리켜 “미국적 고독의 낭만적인 이미지 가운데 가장 통렬하고 쉬지 않고 복제되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던 랭은 바로 그 호퍼의 그림들로 끌려갔다. “그 이미지들이 마치 청사진이고 내가 포로인 것처럼.” 호퍼의 그림에 나오는 여자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호퍼는 스스로 고독을 그린 적이 없다고 말했음에도, 우리는 왜 그의 작품에서 고독을 느낄 수밖에 없을까? 그렇다면 호퍼가 담은 것은 무엇일까? 랭은 호퍼의 그림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의 단서들을 좇으며 도시가 만들어내는 기이한 고립감의 원천을, 호퍼 자신도 깨닫지 못했던 호퍼 그림의 마법을 찾아낸다.</br>그리고 에드워드 호퍼와는 정반대에 서 있는 듯 보이는 앤디 워홀. 그는 흔히 화려한 삶, 의미 없는 작품, 유명세에 올라탄 예술가로 평가받곤 한다. 랭 또한 자신이 외로워지기 전에는 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외로워진 후에야 그에게 매혹되었다고 밝힌다. 인터뷰 영상으로 만난 그는 “서치라이트에 붙잡힌 사슴처럼 우아하고 겁에 질린 존재”였다. 이민 가정에서 태어났고, 가난했으며, 무도병을 앓았고, 동성애자였던 워홀. 그는 차별성의 고독, 바람직하지 못함의 고독, 무리 속에 받아들여지지 않음의 고독이 누구보다 몸에 깊이 새겨진 사람이었다. 랭은 그런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나는 모두가 모두를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해.” “내가 차라리 기계라면 좋겠어.” “너무 친밀해지고 싶지 않아.” 온갖 두서없는 말들 속에서 그의 진심을, 그가 사랑했던 것들을 건져 올린다. 누가 알 수 있었을까. 지금도 간행되고 있는 “인간 발언의 심포니”로서의 잡지, [인터뷰Interview]가 워홀의 고독 속에서 태어난 것이었음을.</br><b></br>여성·게이·이민자·부랑자… 보여지지 않는 이들의 말해지지 않은 연대</b></br>랭은 호퍼와 워홀을 비롯해 우리에게는 아직 생소한 이름의 예술가들까지 불러낸다. 화가였지만 호퍼 뒤에 가려져 있던 호퍼의 아내, 조. 급진적이고 뛰어난 페미니즘 선언서로 유명한 『스컴 선언문』과 희곡 [엿이나 처먹어라]를 썼지만 그저 ‘워홀을 쏜 여배우’로 기억되는 작가 밸러리 솔라나스. 그리고 섹슈얼리티·폭력·마약처럼 온갖 사회적 터부를 담아냈던 사진가 낸 골딘, 가난한 잡역부로 살면서 혼자만의 방에 예술적 세계를 구축했던 아웃사이더 아티스트 헨리 다거, 역시 사회에 자기 존재를 한 순간도 드러내지 않고서 사진 속에만 담은 채 사라져버린 수수께끼 사진가 비비안 마이어, 증오와 차별이 신체에 가해진 생애를 살았던 흑인 가수 빌리 홀리데이…….</br>하지만 그 누구보다 랭이 빠져들었던 이는 행동예술가 데이비드 워나로위츠였다. “유쾌한 무리 사이에서 아픈 손가락처럼 나 혼자 불쑥 튀어나와 있다는 느낌”에 시달리며 “익명이 되고 싶었”을 때, 그는 워나로위츠의 작품인 ‘뉴욕의 랭보 연작’을 만난다. 뉴욕의 군중 속에서 늘 혼자인 랭보. 그는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는 언제나 다르고 어색하게 튀어나와 보인다. 미술교육은커녕 정규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몸을 팔며 지냈던 워나로위츠는 20대 후반에 장-미셸 바스키아와 함께 뉴욕 이스트빌리지 예술무대의 스타로 꼽혔지만, 1980년대 ‘게이암’으로 불리며 미국 전역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은 에이즈 위기 한복판에서 서른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인터뷰] 지를 통해 낸 골딘과 나눈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몸뚱이가 스러지더라도 내 경험, 내 일부는 계속 살아갔으면 좋겠어.” “나는 사람들이 내가 경험한 소외감을 덜 느끼게 하고 싶어. 내게 제일 의미 있는 건 그거야.”</br>그는 떠났지만, ‘마지막까지 세상에서 배제되기를 저항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그와 같이 행동하고 있다. 워나로위츠가 랭보의 가면을 썼던 것처럼, 사회에서 배제되는 이들이 워나로위츠의 가면을 쓰고서 보여지지 않음에 저항하고, 검열에 저항하고, 혐오에 저항한다. 이처럼 워나로위츠는 그의 작품을 보는 모든 사람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랭은 그를 통해 “예술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어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기묘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전한다.</br><b></br>리베카 솔닛 세대의 혁명적 글쓰기, 새로운 고전을 탄생시킨 용감한 작가</b></br>[뉴욕 타임스]가 “리베카 솔닛 세대의 작가로 개인적이면서도 정치적인 혁명적 글쓰기”라고 평했듯, 랭은 자신의 삶과 경험으로부터 시작해 세계로 확장하는 치열한 지적 탐구와 내밀한 감정의 진폭을 대담하고 선명한 언어로 층층이 직조해낸다.</br>올리비아 랭에게 ‘고독’이 비단 뉴욕의 이민자로서, 30대 중반의 실연당한 여성으로서만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는 정체를 꽁꽁 숨긴 동성애자였고, 1980년대에 발각되어 랭과 함께 평생 살아온 동네에서 쫓겨나 도망 다니며 살았다. 그러는 동안 엄마의 알코올중독은 점점 심해졌으며(랭의 전작은 작가와 알코올의존증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그 시절 엄마의 성정체성과는 별개로 자신이 잘못된 신체에 들어 있는 게이 소년처럼 느껴졌다고 고백한다. 랭은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배척되는 이들에 대한 특별한 연민과 깊은 공감을 담아, 그들이 남긴 외로움의 다양한 조각들을 자신의 경험과 함께 이어붙이는 섬세한 작업을 기묘하고도 아름답게 해낸다. 이 책 『외로운 도시』는 우리에게 ‘외로움에 대한 눈부신 경의’를 선사하며, ‘타인에게 우리가 지금보다 더 다정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새로운 고전’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br>“우리는 너무나 자주 지옥의 얼굴을 하는 이 도시에서 함께 살아간다.</br>중요한 것은 다정함을 잃지 않는 것, 서로 연대하는 것, 깨어 있고 열려 있는 것이다.”<b></br></br>추천사</br></b>외로움에 대한 눈부신 경의. 타인에게 우리가 지금보다 더 다정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새로운 고전. _데보라 레비(맨부커상 최종후보 작가)</br></br>리베카 솔닛을 상기시키는 개인적이면서도 정치적인 혁명적 글쓰기. _[뉴욕 타임스]</br></br>논픽션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최고의 작가. _[하퍼스 바자]</br></br>삶과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용감한 작가. _[텔레그래프]</br></br>비평과 자기고백 사이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균형 잡힌 예술가들의 전기이자 자서전. _[엘르]</br></br>끊임없이 예기치 못한 곳으로 데려가는 자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책. _피터 케리(맨부커상 수상 작가)</br></br>워홀과 호퍼 같은 외로운 예술가들의 삶에서 고독의 가치를 발견하게 하고 다름으로 차별받는 이들의 저항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_[워싱턴포스트]</b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