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 인문교양으로 읽는 新천자문
요즘 서점가는 물론 영화, 연극 등 각 문화예술거리에서는 고전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명하는 색다른 볼거리를 선보이고 있다. 이러한 대중들의 관심을 반영하여 ‘동양의 고전 읽기’의 열풍은 앞으로도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천자문, 그 뿌리와 동양학적 사유』 역시 천자문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필요하다는 의식에서 출발하였다. 그간 천자문은 단순히 하나하나의 글자를 익히기 위한 교재로서 동몽선습이나 소학 등과 동류의 서적으로 분류되어 왔다.
하지만 천자문에 나오는 사자성어는 모두 서경, 시경, 주역 등의 사서삼경과 제자백가의 글에서 따온 문구가 많아서 글자만 익히는 단편적인 학습방법으로는 천자문을 배우기 어렵고, 오래 기억하기도 어렵다. 또 어린이들이나 동양고전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다소 생소하고 어려운 감을 안겨주기 십상이다.
『천자문, 그 뿌리와 동양학적 사유』의 저자인 강상규 씨는 기존의 천자문 학습방법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동양고전에 깊이 숨겨져 있는 함의를 찾아내고자 천자문 관련 글을 모조리 엄선하여 상세하게 주해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동양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필히 읽어야 할 동양학의 나침반과 같은 글
천자문은 천 년 이상을 뿌리내려온 우리네 사상의 근원이 배어 있는 동양학의 보고寶庫이다. 천자문에는『논어』,『회남자』,『서경』,『주역』,『맹자』,『춘추좌씨전』,『장자』등 각종 동양고전의 글을 함축적으로 사언절구로 축약한 내용이 많기 때문에 단순히 한자만 읽혀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천자문은 각종 동양고전에 나오는 중요한 문구들을 집약하여 놓았기 때문에, 고전을 읽는 이로 하여금 천자문을 나침반 삼아 동양철학의 사유의 길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도록 한다.
天 地 玄 黃 宇 宙 洪 荒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르황 집우 집주 넓을홍 거칠황
하늘은 갈피(이치)가 깊고 아득하며 땅은 누르며, 우주는 넓고도 거칠다.
p.13
또한, 『주역周易』「건괘乾卦」에 보면 하늘색은 사실은 검다 못해 푸르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늘 아래 사는 사람, 즉 백성을 ‘창생蒼生, 푸른 하늘 아래 큰 덕을 지닌 이’라고 하였던가 봅니다. 『주역』「계사전하繫辭傳下」에 나오는 말입니다.
p. 14
중국 최초의 자전字典인 『석명釋名』 권1에 『이아爾雅』를 빌어 때에 따라 하늘을 달리 부르는 대목이 나옵니다. “봄에는 푸른 하늘이라 하는데 양기가 생겨나 푸른빛을 띠고, 여름에는 호천이라 하는데 하늘의 기운이 널리 퍼져 희기 때문이다. 가을에는 민천이라고 하는데 사물이 점점 마르고 시들어감에, 상할까 애처로이 여기기 때문이며, 겨울에는 상천이라고 하는데 기운이 위로 올라가 땅과는 떨어지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동양철학의 사유의 근원을 찾아서
저자는 각 사자성어에 대한 해설에 재담을 섞어 가며 솜씨 있게 글을 전개해나간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고전은 고전 그대로의 맛을 음미하며 읽는 방향을 고수하며 설명한다. ‘천자문’ 속에 담겨 있는 고대 중국과 조선의 사유 세계를 현대인들의 삶에 끼워 맞추어 해석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천지현황(天地玄黃)은 기존의 해석대로 한다면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라고 해석하지만, 저자는 천지현황(天地玄黃)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여 천지의 처음 상태, 곧 태극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낸다.
p.13
『도덕경道德經』에서 이름이 없는 것은 천지의 처음이라 하여 혼돈混沌의 상태를 말하고,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라고 하여, 하늘과 땅의 어머니인 음陰과 양陽으로 몬을 낳게 하는 태극太極이 고갱이가 되게 합니다. 그리고 게염(욕심)이 없는 것으로 묘妙를 보고, 욕심이 없음으로써 교?의 세계를 본다고 합니다. 묘와 교는 본래 한줄기인데 이름을 달리하여 한마디로 하면 현玄이라 한다고 합니다. 현은 무엇인가요? 현은 어둡고 정함이 없으며 아스라이 멀리 있는 어떤 것이며, 조금 붉으면서 까만색이 되기 이전의 검붉은 색입니다. 아직은 죽지 않은 혼돈의 세계입니다. 희미하고 불그레한 빛을 지닌 생명의 움을 틔우려는 정중동靜中動의 모습을 지닌, 옛적의 우리를 낳은 탯줄이었습니다. 또한, 『주역周易』「건괘乾卦」에 보면 하늘색은 사실은 검다 못해 푸르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늘 아래 사는 사람, 즉 백성을 ‘창생蒼生, 푸른 하늘 아래 큰 덕을 지닌 이’라고 하였던가 봅니다. 『주역』「계사전하繫辭傳下」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어“하늘 누리와 땅 누리의 하나 됨을 일러 음과 양이 아직 갈라지지 않았을 때를 태극太極이라 합니다. 태극은 하늘과 땅의 어머니이며, 태극이 둘로 나뉘어 지면 비로소 양의兩儀가 되니 곧 음양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하여 사자성어에 담긴 동양철학의 사유의 넓이와 깊이를 체험하게 한다. 천지현황(天地玄黃)이 천자문의 맨 처음에 나온 이유는 하늘과 땅의 이치를 설명하여 세상이 탄생하게 된 동양철학적 논리를 설명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천자문의 사자성어에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철학적 세계가 담겨 있음을 짐작케 한다. 각종 동양고전의 글귀들을 세밀하게 연결하는 작업을 통해 저자는 각 사자성어의 의미를 확장시키는 것은 물론, 스스로 동양철학을 공부하는 사유의 폭과 깊이를 늘릴 수 있도록 수양의 방법을 제시한다.
천자문은 천지의 형상에 대해 설명한 이후 이윽고 세상의 사람들이 사는 도리에 대해 설명한다. 천자문 속에는 인간 본연의 심성,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와 형제간의 우애 및 벗과의 관계 등에 관한 도리가 담겨 있다. 또한 우리네 민초들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삶은 어떠한지, 한 나라의 임금은 어떻게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지에 관한 대목도 담담히 그려 내고 있다. 역사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수많은 위인들이 어떻게 옳은 처신을 했는가를 보여주어 지금 우리네 위정자들이 배워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 가리키고 있다.
이와 같이 천자문은 천지를 포함한 세상의 생물들이 모두 하나의 유기체로 움직이는 과정을 담고 있어, 현대인들의 과학적 사유의 세계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이것이 바로 천자문이 담고 있는 동양철학적 사유의 신비로움이다.
중국 고대 자전을 통한 글자 풀이
본서에서는 ‘한자의 본뜻 풀이’라고 하여 글자 하나하나를 완벽하게 풀어내어 본래의 뜻을 밝히고 있다. 글자 하나하나의 뜻을 1,900년 전의 자전인 <설문해자>를 빌어 풀이하여, 기존의 천자문과는 다른 차원의 해설을 선보인다. 그 외에도 중국 고대의 자전字典인『이아』,『집운』,『광운』,『고금주』등의 원문을 비교 대조하여 풀이하였다.
天 地 玄 黃 宇 宙 洪 荒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르황 집우 집주 넓을홍 거칠황
하늘은 갈피(이치)가 깊고 아득하며 땅은 누르며, 우주는 넓고도 거칠다.
p.12
‘天地천지’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하늘과 넓고 큰 땅 덩어리’라는 뜻이며, 『설문說文』에 ‘天천’은 ‘꼭대기’라고 하며, 아울러 ‘지극히 높아 위가 없다’라고 합니다. ‘地지’는 ‘원래의 기운이 처음으로 나뉘다’라는 뜻입니다. ‘玄현’은 ‘검붉은 빛깔’이며 ‘그윽하고도 멀다’라고 하며, ‘黃황’은 ‘흙빛’이라고 합니다.
본서에서는 ‘한자의 본뜻 풀이’라고 하여 글자 하나하나를 완벽하게 풀어내어 본래의 뜻을 밝히고 있다. 글자 하나하나의 뜻을 1,900년 전의 자전인 <설문해자>를 빌어 풀이하여, 기존의 천자문과는 다른 차원의 해설을 선보인다. 그 외에도 중국 고대의 자전字典인 『이아』, 『집운』, 『광운』, 『고금주』 등의 원문을 비교 대조하여 풀이하였다.
원래 글자가 지닌 뜻을 알면 고전의 뜻은 자명해진다. 표의문자인 한자는 그 뜻이 수갈래로 나뉜다. 하나의 뜻만 알면 문장을 곡해할 수 있다. 특히나 현재 일상적으로 쓰이는 실용 한자어 중에는 일본식 한자어가 많아 현대인들이 동양의 고전을 해독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준다. 따라서 천자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자의 본래 뜻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양의 문文ㆍ사史ㆍ철哲을 통틀어 볼 수 있는 인문 교양서
천자문을 통하여 동양의 문학과 역사 그리고 철학을 음미해 볼 수 있으며 관련된 고사나 인물을 통하여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이는 또한 인문학적인 소양을 기를 수 있는 바탕이 된다.
국내 최초로 <공부자묘정비> 풀이
1천 백여 년 전에 쓰인 <공부자묘정비>는 강원도 강릉시 교2동 233번지 강릉향교(江陵鄕校)의 명륜당 좌측에 있는 비로, 공자(孔子)의 행적을 찬양하기 위해 세워졌다. 이 비문은 당나라 말기 최고의 문필가인 피일휴(皮日休)가 지었고, 김진백(金振伯)이 글씨를 썼다. 저자는 <공부자묘정비>를 중국의 원문과 국내 향교에 있는 비문을 대조 분석하여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