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 정오가 되면 우리는 식당으로 가야 합니다. 주인어른의 육체적 시종과 영혼의 시종 양쪽 모두가 모여서 식사를 합니다. …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육체적 시종이 나(모차르트)보다 서열이 높다는 점입니다. 나는 음식 앞에서도 가장 서열이 낮은 셈입니다. --모차르트
*영주(리히노프스키)여! 당신 따위가 무엇이냐, 그저 우연히 태어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나는 나 스스로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베토벤
*우리 시대의 젊은이여, 너는 죽었구나! 무수한 민중의 힘이여, 그것은 허무하게 소진되었구나. … 오직 그대, 오 숭고한 예술이여, 그대만이 기꺼이 그것을 허락하나니 힘과 행동의 시대가 묘사된 작품 속에서 커다란 고통은 미약하나마 위안을 얻는다. -- 슈베르트
*음악에 종사하는 우리는 정치적으로 아무런 입지도 가지고 있지 않기에 본질과 다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비정치적이기에 조용히 침묵하고 표면에 나서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 쇤베르크
*작곡가는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라 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무심할 수 없다. 인간적인 고뇌, 압제, 부당함이 세상에 여전히 존재한다. … 고통이 존재하고, 오류가 존재하는 그곳에 나는 내 음악을 가지고 함께 나아갈 것이다. -- 윤이상
음악은 권력을, 권력은 음악을 이용했다!
대부분의 음악가는 정치적 갈등이라곤 전혀 모른 채 진실하고 아름다운 세계 안에서 순수하게 음악에만 몰두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실상은 어떠한가? 그들은 흥망성쇠를 거듭한 역사 속에서 치열하고 처절하며, 때로는 치부를 드러내듯 부끄럽고도 치졸한 사건들과 시시때때로 맞닥뜨려 왔다.
이 책의 저자 베로니카 베치는 “음악은 권력에 아부하고, 권력은 음악을 이용했다”는 전제 아래, 음악가들의 삶이 그리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점을 꼬집어 밝히고 있다. 그녀는 음악가들의 대작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부터, 각기 자신이 활동하던 시대의 정권과 어떻게 유착관계를 맺어 왔는지 혹은 정권에 대항하여 어떠한 활동을 펼쳐 나갔는지 등 때로는 음악 외적 배경이 음악이라는 본질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사례를 여러 유명 작품을 예로 들어 상세하게 소개한다.
작곡가들이 시대의 변화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보여 주는 베로니카 베치의 시각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그녀는 음악가들이 그들 시대에 실천했던 사회적?문화적 역할에 특히 많은 부분 지면을 할애하였다. 그 시야는 전제주의 시대 궁정(글루크, 하이든, 모차르트)으로부터 19세기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움직임(베토벤, 슈만, 바그너)을 거쳐 (신新음악을 ‘타락’했다며 비난하던) 민족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가 팽배했던, 그리고 전후에도 정치적 긴장감이 늦춰지지 않던 20세기를 거쳐 현 시대까지 아우르고 있다. 그 중에서도 반유대주의의 편견에 맞서 한판 전쟁을 벌였던 유대인 음악가들(멘델스존, 말러, 쇤베르크)을 다룬 대목은 가히 인상적이다. 또한 상당한 감정 이입과 더불어 여성 음악가들의 활동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 책에서 음악가들은 억압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위험에 직면했던 삶과 자유를 토로하는가 하면, 이내 권력자와 그들의 선전에 기꺼이 헌신했던 치졸함을 여과 없이 고발당하기도 한다.
[본문 맛보기]
1. 최초의 프리랜서 작곡가, 모차르트
*“주교님은 하인들에게 자비가 넘치고 영광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들의 수입을 갈취하는가 하면
절대로 선금을 주는 법이 없지요. …지금 저는 제가 한 푼도 못 받는 게 아닐까
노심초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 보수가 지급되지 않는다면, 저는 대주교님께 가서
모든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따질 참입니다. 만약 제가 돈을 버는 것이 싫다면,
제가 제 돈으로 먹고 살지 않아도 좋을 만큼 제게 임금을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 --- p.97
신동으로 불리던 시절 유럽의 여러 궁정을 순회하며 그에 걸맞은 명예를 누렸지만, 고향 잘츠부르크에 돌아와서는 히에로니무스 대주교를 섬기며 살았던 모차르트는 자신이 당했던 수많은 굴욕을 못 참아 했다. 그는 자신이 육체노동을 하는 시종보다 낮은 서열로 취급받는 것에도, 자신의 경력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것에도, 또 적은 보수에도 불만을 품으며 위와 같이 언급했다고 한다.
이후 주교의 횡포가 더욱 심해지자 그는 더 이상의 불행을 견디지 못하겠다며 주교의 곁을 떠나, 자유롭고 희망에 가득 찬 빈에 정착했다.
“나의 소원, 그리고 나의 희망은 명예, 영광, 그리고 돈을 버는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깨어 있는 작곡가였던 모차르트는 영주의 궁정이 더 이상 작곡가라는 경력에 적절한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했던 것이다.
피아노 신동 시절 아버지와 더불어 여행을 수없이 다니며 이미 부유한 서민 계층이 음악계를 장악한 암스테르담과 파리를 목격한 데다, 만하임과 밀라노에서 대주교가 거느린 악단의 수준을 능가하는 오케스트라를 접한 경험들은 그가 프리랜서의 길을 걷는 데 큰 작용을 한 듯싶다.
모차르트로서는 대주교와의 불화의 원인이-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보수상의 문제에 불과했지만, 이조차도 후손에게는 낭만적이고 혁명적인 모습으로 비쳤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 이 사건은 처음에는 궁정신하로 출발했던 바로크 시대 음악가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독립적인 예술가로 이행하는 본보기로 볼 수 있으니 말이다.
2. 애증의 관계, 베토벤과 나폴레옹
금전적으로 윤택한 귀족 사교계의 눈에 들어 여러 후원자들로부터 종신연금을 보장받은 베토벤은 오직 악보에만 몰두하며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유지해 나갔다. 이따금 콘서트와 개인 지도, 악보 저작권에서 비롯된 수입도 추가하면서.
당시 베토벤은 ‘천재’ 또는 모두를 홀리는 ‘악마적 예술가’로 인식되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귀족들의 비호를 받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후원자들을 어지간히 무례하게 대했다. 그런데도 후원자들은 그를 그다지 괘씸하게 여기지는 않은 모양이다. 일례로, 한 영주는 귀족들을 ‘귀족나부랭이’라고 부르는 그를 다만 ‘불평쟁이’라고 부르며 대응하는 데 그쳤다고 한다.
베토벤은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음악회 출연을 거부했고, 연주 도중 관객이 소곤거리면 마음대로 연주를 중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시대에 그것도 다름 아닌 오스트리아에서, 그에게는 정부가 감시를 위해 보낸 스파이나 앞잡이가 따라붙지 않았다. 아마도 베토벤의 무례함은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 행해졌던 것 같다.
사람들을 싫어하는 염세주의자로 인식되던 베토벤은 언제나 뒷짐을 지고 시선을 땅에 박은 채 급한 걸음으로 도시를 활보하고 다녔다. 또한 불시에 자신을 찾아오는 방문객을 사정없이 밀어젖히는 바람에, 현관에 달린 값비싼 문짝이 쪼개어지곤 했다. 이렇듯 괴팍한 성격의 베토벤도 자유주의에 대한 이상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대한 열광만은 대단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을 향한 베토벤의 열광은 단순한 동경이 아닌 애증의 관계로 봐야 한다.
*“나뿐 아니라 그의 가까운 친구들도 이 교향곡 총보의 멋진 필사본이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겉표지 제일 위에는 ‘보나파르트’란 단어가 적혀 있었고,
제일 아래에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라고 쓰여 있었으며,
더 이상의 단어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에게 보나파르트가 황제로 등극했다는 소식을
처음 전해 준 사람은 나였다. 그러자 그는 분노에 휩싸여 소리를 질렀다.
‘그 또한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지 않나!
이제 그도 모두의 인권을 짓밟고, 다만 자신의 패기만을 즐기겠구나.
그도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듯 보다 높은 곳에서 폭군이 되겠지!’
베토벤은 테이블로 다가가서 표지를 갈기갈기 찢어 땅에 내던졌다.” --- p.202
베토벤의 제자 페르디난트 리스가 기록한 위 글을 보면, 베토벤은 왕실에 대한 기대와 환멸, 보호와 경멸 사이에서 방황했던 듯싶다. 나폴레옹을 진취적 형명의 완성자로서 용맹하고 힘찬 인물로 여겼던 베토벤은 새로운 영웅 찬미가를 원했던 나폴레옹의 입맛에 맞는 교향곡 「보나파르트」를 작곡하였다. 하지만 이내 나폴레옹이 자신의 야심을 드러내자 그는 자신이 판단을 잘못했음을 인정하고 교향곡의 이름을 「에로이카」로 바꿨다.
3. 유대인 작곡가들의 생존법
초기 기독교 시절부터 시작된 반유대주의의 뿌리는, 십자군 전쟁 시절 절정을 이뤘다. 라인란트의 가톨릭 지역에 위치한 대규모 유대인 공동체들이 십자군의 희생물로 학살당하고 약탈당했으며 결국 몰락했다. 이때 유대인은 아이들을 유괴하고 어린 소년들에게 고문을 가한 뒤 ‘어둠의 미사’에서 그 아이들의 피를 들이켜고 살을 구워먹는 사람들로 알려졌다. 이 외에도 유대인과 관련된 허무맹랑한 루머는 끝도 없이 퍼져, 유대인 박해에 충분한 정당성을 부여했다.
유대인을 향한 멸시는 유대인 음악가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다른 예술가들보다도 더 방치되곤 했다. 모욕과 은근한 압박에 상당수 음악가는 자신의 곡들이 평가 절하되는 것을 우려해 ‘유대계 이름’을 포기하기도 했다.
일례로, 마이어 베어는 성과 이름을 하나로 합쳐 ‘마이어베어’로 개명했는데, 그 편이 유대계 냄새가 훨씬 덜했다. 자신이 새롭게 추가한 ‘야콥’이란 이름은 이탈리아식인 ‘쟈코모’로 바꾸었다. 위대한 지휘자였던 브루노 발터는 유대인 사이에서 흔한 슐레징어란 이름을 포기했다. 자크 프로망탈 알레비의 본명은 단순하고 전형적인 엘리아스 레비였다. 야콥 오펜바흐는 반유대주의 인식이 팽배하던 쾰른을 떠나 파리로 피신하면서 프랑스식 이름인 ‘자크’로 바꾸었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기독교 사상으로 전향하면서 이름을 바꿨다. 펠릭스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펠릭스의 외삼촌으로부터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고 이름도 바꾸라는 충고를 들었다. “자네 이름인 멘델스존 바르톨디 중에서 멘델스존만 사용하는 것이 어떨까 충고하는 바이네… 그러면 자네는 별다른 시도 없이도 자네의 목적을 충분히 성취할 수 있을 걸세. 프랑스에서는 어디서나 아내 쪽 가문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에 덧붙이는 것을 관례로 하고 있지”라면서.
그런가 하면, 가톨릭교회와 아무 관련이 없던 유대인 구스타프 말러는 가톨릭 신자로 개종하여 1898년 빈 궁정오페라극장의 예술 감독으로 취임했다. 당시 그와 같은 사례는 많았는데, 수많은 정신적?정치적 거장들이 유대인이라는 얼룩을 세례를 통하여 깨끗하게 극복하곤 했다.
하지만 이들이 무조건 정권에 편승한 것만은 아니었다. 다음에 소개하는 두 작품은 유대인 음악가가 어떤 식으로 사회에 저항했는지를 보여 준다.
자크 프로망탈 알레비, 「유대인 여자」
알레비의 5막짜리 오페라 「유대인 여자」는 종교적 운명과 직접 관련된 작품이다. 음악으로 승화된 장대한 이 역사 드라마는 15세기 초 공의회 시대의 콘스탄스 시를 배경으로, 페스트 발병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유대인들이 고통을 당하는 가운데,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지키느라 고통을 받는 여주인공 라헬을 찬양한다. 그녀는 형장에서조차 자신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다(이스라엘의 신앙 아래 교육받은 이 자칭 유대인 여자는 그러나, 추기경의 사생아였다).
외젠 스크리브의 대본으로 완성된 알레비의 오페라는 유대교에 대한 자신의 신실한 믿음을 세우는 인간의 자각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요소를 오페라에 수용했다. 늙은 금세공사 엘리아자는 종교적 신념이 철저한 인물로, 사랑하는 수양딸을 유대교의 신앙에 희생시킨다. 라헬 또한 자신이 교육받고 자란 종교 안에 신실하게 머무르며 불행한 사랑과 민중의 가혹한 대우, 잔인한 처형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시각은 종교적 편협함이 얼마나 끔찍한 결말을 가져오는지, 유대인의 입지가 얼마나 부당한지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또한 신앙심 깊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엘리아자의 한결같은 태도는 긍정적이며 게다가 지조까지 갖춘 듯 보인다.
동시대 청중은 「유대인 여자」에 열광했다. 단지 그랜드 오페라 특유의 사치스런 연출 때문만은 아니었다(이 공연을 위해 무대 위에는 무려 20마리의 순종 말들이 역사적 고증에 따른 화려한 치장을 하고 등장했다). 사람들은 오페라 역사상 최초로 유대인 여자가 타이틀 롤을 맡은 점에 대해서도 화끈하게 반응했다.
쟈코모 마이어베어, 「위그노 교도」
마이어베어의 종교극 「위그노 교도」는 1572년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프랑스 가톨릭 연합이 위그노 교도들을 체포해 학살한 드라마틱한 사건을 기반으로 하였는데, 이야기의 중심에는 서로 사랑하는 라울 드 낭지와 발랑틴 커플이 있다. 프로테스탄트 신자인 라울은 우연히 유대인 박해 소동에 휘말려 고민에 빠진다. 그는 자신의 신앙만 거부하면 목숨을 구함은 물론 가톨릭 신자인 생 브리 백작의 딸 발랑틴과도 결혼할 수 있다. 그러나 개종을 거부한다. 그의 단호한 모습을 본 발랑틴 또한 프로테스탄트 교도가 되어, 가톨릭 군대의 공격에 라울과 함께 목숨을 잃는다.
종교에 대한 절대적 충성이라는 측면에서 마이어베어의 오페라는 알레비의 「유대인 여자」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알레비가 유대교 음악과 민속음악을 모티프로 반복 사용하며 확고부동한 믿음을 형상화했듯, 마이어베어는 「내 주는 강한 성」의 멜로디를 반복해서 사용하며 한결같은 프로테스탄트 교도이자 라울의 성실한 부하인 마르셀을 표현한다.
4. 정치 선전에 이용당하다
고대에는 군주가 작곡은 물론 연주에 참여하는 위대한 전통이 세워졌다. 그 대표적인 신화의 사례를 호머의 서사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서사시에서 영웅 아킬레스와 오디세우스는 함께 신들의 사랑을 노래 부른다. 알렉산더 대왕은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음악을 배웠다. 기원전 5세기 때의 정치가 페리클레스도 음악적 재능을 타고나서, 기원전 472년 아이스킬로스 비극에 합창 지휘자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보다 1세기 전에는 아테네의 진보적 정치가 솔론이 시인으로 활동했는데, 노래를 통해 귀족 위주의 사회 구조를 질타하고, 모든 아테네 시민의 평등과 노예제도의 폐지를 추구하는 자신의 이상을 위해 투쟁했다. 로마제국은 고대 그리스 음악의 서구적 전통을 받아들였다. 키타라 연주가이자 연극배우, 그리고 로마 화재의 주범으로 악명 높은 네로 황제는 그리스를 여행하며 그곳이 음악의 중심지임을 찬미했다. 폭정과 독재라는 측면에서 오늘날 네로의 후예라 부를 수 있는 독재자들도 자신들의 선전 도구로 음악을 이용했다.
16세기 초 종교전쟁 당시, 재세례파는 1533년 뮌스터에서 단명하긴 했지만 신권정치를 옹호하는 군주를 추대하기 위해 대대적인 시가행진을 개최했다. 이 시가행진은 어떤 측면에서 파시스트나 공산주의 정권이 흔히 벌이던 민중 행진의 선례였던 셈이다. 히틀러-괴벨스 정권이 조직한 제3제국 음악기구는 음악을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사용한 하나의 예라 할 수 있다. 이 조직은 음악을 비범한 심리적 도구로 통찰한 플라톤의 무의식적 인식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
히틀러 집권 당시 문화성 장관이었던 괴벨스는 나치 선전을 민중에 용이하게 전파하고자 익히기 쉽고 따라 부르기 쉬운 노래를 작곡하도록 했다. 당시 작곡된 노래들은 반봉건적?반자본주의적?반사회주의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다. 또한 “천년제국”이라는 슬로건 아래, 가사에는 ‘독일’, ‘조국’, ‘지도자’, ‘민족’, ‘피’, ‘자유’와 같은 명사들에 ‘돌격하다’, ‘진군하다’, ‘눈뜨다’와 같은 동사들을 결합하고, ‘새로운’, ‘자유로운’, ‘용감한’, ‘자랑스러운’과 같은 형용사를 추가했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또한 음악을 이용 도구로 사용한 바 있다. 이탈리아 통일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혁명주의 철학자 주세페 마치니는 1835년 『음악철학』을 집필하면서 민중은 공동의 음악을 요구하며 음악은 개별 영혼들에 영향을 끼치고 군중을 동원한다고 적었다. 또한 스탈린은 그로부터 약 1세기 뒤에 작곡가는 “영혼의 기술자”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냈다. 음악과 정치라는 테마에 있어 지도자 찬양과 그 정체성 묘사는 가장 중요한 지배개념이었다.
인간의 생활 영역 안에서 섬세하고도 눈에 띄지 않게 이러한 세계관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던 건 오직 음악뿐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음악을 일상생활에 안배했다.
5. 여성 음악가의 수난
여성 작곡가들이 아내, 안주인,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역할 부담이 여러 배로 가중되면서 예술적 창조력을 억압당한 사례는 빈번하다. 일례로, 클라라 비크는 로베르트 슈만과 결혼한 지 불과 며칠 만에 이렇게 한탄했다.
*“내 피아노 연주는 다시 뒷전으로 밀려났고, 로베르트의 작곡만이 언제나 중요할 뿐이다.
하루 중 나를 위한 시간은 1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
부디 이대로 퇴물만 되지 않으면 좋으련만!” --- p.272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브람스의 친구였던 요제프 요아힘의 아내 아말리에 요아힘의 말처럼, “훌륭한 여성 예술가이자 동시에 완벽한 가정의 안주인이 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인 듯싶다.
뛰어난 재능과 예술적 관심을 두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여성 음악가들은,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의무로 인해 훼방을 받았다. 그 와중에서도 꿋꿋하게 예술혼을 꽃피웠던 여성들은, 이번엔 편협한 가치관과 맞닥뜨려야 했다. 당시, 여성 예술가의 가정이 화목하다고 알려지면 그녀의 작품은 애초부터 평가절하의 대상이 되었다. 어린애들의 목청 찢는 소리와 스튜 냄비, 남편과의 잠자리 사이에서 작곡된 음악이라면 그리 작품성이 높지 않을 거라는 선입견이 팽배한 탓이다.
실제로 여성 예술가들은 시간상의 제약 때문에 오페라와 오케스트라 작품처럼 규모가 큰 작품보다는 리트라든가 피아노 소품 또는 (트리오와 같은) 작은 앙상블을 위한 실내악 작품에서 더 두각을 나타냈다.
또한, 이따금씩 남편의 유치한 질투심에 심신이 피곤해지기도 했다.
*“당신은 대체 어떻게 ‘작곡가 부부’란 걸 상상할 수 있는 거요?
서로 이상한 경쟁 상대가 된다면, 우리가 얼마나 우스워지고 폄하될지 생각은 해 봤소?
당신은 내 아내이지 내 동료는 아니란 말이오―이 점만은 분명하오!
당신이 나를 남편으로 둔 대가로 당신의 음악을 포기하기만 한다면,
당신 또한 나와 똑같은 명예를 누리지 않겠소?” --- pp.275-276
위는 아내(알마 말러)가 다시 작곡을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 구스타프 말러가 아내를 말리며 한 이야기다. 그는 아내의 실력을 깎아내리며, 설령 (실력이 아니라) 운이 좋아 자신처럼 활발히 활동한다 해도 절대 아내를 동료로 인정하지 않을 터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면서 위대한 음악가의 아내로만 머물기를 은근히 강요한다. 이렇듯 협박과 회유를 한 것을 보면, 말러는 아내가 자신과 같은 길을 걷고,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놓이는 것에 크나큰 심적 스트레스를 받은 듯싶다. 위대한 음악가가 한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내를 향한 유치한 질투심이 드러나 있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