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를 통해서 바라본 이 시대의 ‘무례한 복음’
지금 대중은 인식론을 포기했다. 그래서 남은 것이 ‘윤리’인데, 이게 아주 낯선 것이다. 이전까지 윤리일 수 없던 것이 갑자기 윤리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살 놈만 살게 하자”는 슬로건이다. 모든 문제는 이렇게 살 놈이 살 수 없는 환경 때문에 발생하는 것처럼 치장된다. 이 상황이야말로 한국 부르주아 정치의 위기를 증언한다.
한 손에는 문화이론, 또 한 손에는 정신분석이라는 무기를 들고 지난 10년간 강단과 강연장, 각종 언론매체와 인터넷 등을 종횡무진하며 한국 문화에 짙게 드리워진 음란한 판타지의 초라한 모습을 파헤쳤던 문화평론가 이택광(경희대학교 영미문화전공 교수), 그가 “물에 빠진 개”를 흠씬 두들겨 패기 위해서 다시 몽둥이를 들었다. 철학자 니체가 망치를 들고 철학을 했듯이. 그렇게 나온 이 책 『무례한 복음: 이택광의 쾌도난마 한국문화 2008~2009』는 MB 정부 2년여 간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무례한 복음’에 관한 정신분석이자, 대중들을 사로잡은 각종 대중문화 현상을 통해서 그 욕망의 논리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첫 번째 연대기이다.
첫 번째 비평집 『한국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문화는 어떻게 현실에서 도망가는가?』(2002)에서 음모를 드러낸 여성이 음란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현실을 도착적(倒錯的)으로 소거하는 대중문화가 음란한 것이라며 우리 사회의 보수성을 폭로해 주목을 받은 지은이가 두 번째 비평집 『무례한 복음』에서 비판하는 것은 2008년을 전후로 정치와 분리되어 정치 자체보다 더 정치적으로 바뀌어버린 경제, 이제 자신을 낳아준 그 부르주아 정치를 집어삼키고 있는 ‘정치 없는 경제’라는 괴물과 이 괴물을 혐오하면서도 동경하는 대중들의 이중성이다.
허경영 신드롬, 김연아와 원더걸스를 향한 40~50대의 환호, 괴팍하고 신경질적인 독설가 강마에의 인기,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악, 여자 신윤복의 옷을 벗길 수밖에 없었던 《미인도》의 논리 등을 통해서 이 괴물의 정체를 추적하고 있는 지은이는 때로는 “네가 즐기는 만큼 나도 즐겨야 한다”는 쾌락의 평등주의로, 때로는 “나도 먹고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라는 먹고사니즘으로 변주되며 바야흐로 시대정신으로까지 격상된 이 괴물의 지배논리를 ‘무례한 복음’이라고 지칭한다. 물론 경제는 중요하다. 그러나 여타 중요한 의제(민주주의, 인권, 자유 등)를 억압한 채 경제만을 이 사회의 유일한 독점적 의제로 만드는 것은 무례하다는 것이다.
루쉰은 권력의 노예가 되어 진실을 감추고 대중들을 현혹하는 사람들을 “물에 빠진 개”라 부르며 두들겨 패라고 했다. 지은이 역시 오늘날의 무례한 복음에 눈이 가려 자신이 타인에게 자행하는 무례함을 보지 못하는 대중들에게 가차 없이 몽둥이를 휘두른다. 지은이가 추구하는 문화비평의 본령이란 바로 이것이다.
엉터리 시장주의자들의 대한민국
한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재물을 사랑하는 사회이다. 그리고 그 어떤 ‘국민’보다 한국인은 ‘부자’가 되기를 열망한다. 이런 까닭에 한국 사회의 대중들이 부유한 계층을 혐오한다는 말은 그렇게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대중들은 부자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그 부자가 되고 싶은데 될 수 없는 상황을 미워하는 것이니까.
한국 부르주아 정치(대의민주주의)의 위기가 진정으로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명박 대통령과 부자 내각은 정말 시장주의자인가? 대중들이 부유한 계층을 혐오한다는 말은 사실일까? 수천 년 내려온 산과 강을 마구 깎아 고층 아파트를 짓고 운하를 짓는다는 데 크게 저항하지 않는 일반 시민들이 남대문처럼 겨우 몇 백 년 넘긴 건축물의 화재에 눈물을 흘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무례한 복음』은 대선에서부터 용산참사까지, 전지현의 광고에서부터 88만원 세대론까지, 《우리 결혼했어요》에서부터 《엄마가 뿔났다》까지 서로 별 상관없을 것 같은 대상을 넘나들며 대중문화와 현실의 매개를 찾아내는 독특한 설명방식으로 언뜻 쉬워 보이지만 막상 대답하려면 어렵기 그지없는 이런 질문에 명쾌한 답변을 내놓는다. 말 그대로 쾌도난마(快刀亂麻).
예를 들어 지은이는 김연아와 원더걸스로 상징되는 ‘능력 있는 10대’를 향해 환호하는 40~50대의 모습에서 부조리한 현실을 개선할 의향도 자질도 없기에 10대가 김연아나 원더걸스처럼 알아서 잘 해주거나 자신들의 말을 잘 들어주기만을 바라는 ‘능력 있는 어른들’의 책임전가를 읽는다. 또한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가 누린 선풍적 인기에서 한국에 제대로 존재한 적이 없었던, 하지만 모두가 열망해왔던 해방적 부르주아(개인의 이해관계를 통해 전체의 이익을 구현하는 부르주아적 개인)에 대한 대중들의 갈구를 읽는다.
쾌락의 평등주의가 만들어놓은 불평등
지은이에 따르면 대중문화는 대중들의 욕망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로서, 대중들의 정치성을 욕망의 논리를 통해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문화를 통해서 현실을 사유하는 것이 가능해지는데, 지난 2년여 간 대중문화를 통해서 노골적으로 드러난 대중들의 욕망이 바로 ‘경제제일주의’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분수령으로 기록되는 1987년 뒤 진작부터 “민주주의를 완성했으니 이제 경제발전을 통해 선진화를 달성하자”라는 집단적 주문이 창궐했는데 새삼스레 경제제일주의가 뭐 문제냐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지은이가 ‘전환기’라고 부르는 2008년을 전후로 등장한 경제제일주의는 “정치를 통해 경제적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경제를 위해 정치를 버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변해버린 우리 사회의 노골적인 무례함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사실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킴으로써 지배체제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부르주아 정치의 일반적인 전략임을 감안하면, ‘정치 없는 경제’는 자본주의 일반의 자업자득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착시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있는데, 자본주의적 근대국가의 작동원리가 그것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대중들의 자본주의 사랑은 쾌락의 평등주의를 전제”하는 것으로서, 이런 “개인의 쾌락을 공공적인 것을 통해 실현”할 수 있다는 데 근거한다. 서구의 부르주아계급이 분배의 문제를 공공의 선으로 파악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부르주아계급은 쾌락의 불평등성을 기정사실로 만들면서 자신만의 쾌락을 만끽하고 유지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이 지은이의 진단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욕망의 공평성을 내세우며 시장의 중립성을 요구하고, 이에 가장 근접한 ‘중성국가’야말로 가장 공정하고 행복한 국가라고 믿고 있는 한국의 중간계급 역시 시장 안의 불평등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정작 그 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불평등은 용인한다. 한국의 중간계급이 국민국가와 민족주의 담론을 통해 쾌락을 즐길 주체를 언제나 제한(여자나 이주 노동자, 또는 소수자는 이 한국적 쾌락의 주체로 승인받을 수 없다)하는 기이한 태도를 보이는 게 바로 이 때문이다.
요컨대 시장주의가 가능하려면 시장의 투명성을 보장(합리화)해야 하는데 그 임무를 방기하고 있는 한국의 부르주아계급이나, 이에 걸맞게 근대적인 자기 도덕률(‘건전한 시민의식’이라는 이상적인 도덕성)을 갖춰야 하는데도 자기 이해관계만을 추구하는 사익집단으로 전락한 한국의 중간계급이나 ‘엉터리 시장주의자’이기는 매한가지이다. 지은이의 말처럼 “한국 사회는 진짜 시장주의자도 견디기 힘든 곳”인 셈이다. 결국 이들의 무례함으로 피해를 입는 것은 시장 할머니를 위로하는 대통령의 모습에 감동을 먹는 서민들, 드라마의 주인공을 보면서 ‘오지 않은 부르주아계급’을 기다리거나 자폐적 시장을 절대가치로 숭배하고 탈정치화를 미덕으로 간주하는 중간계급의 일원이 되기 위해 먹고사니즘을 외치며 ‘쥐의 경쟁’을 멈출 수 없는 서민들뿐이다.
경제학적 분석이 아니라 인문학적 비판이 필요하다
지은이는 정책도 없고 공약도 없이 오직 ‘경제’라는 주박만이 짙게 드리워졌을 뿐인 지난 대선에 대해 “경제는 그냥 핑계고 실제는 복수다”라고 말한다. 유권자들은 노무현 정부의 ‘정치’를 거세해 자본주의가 계속 자신들에게 쾌락을 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명박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가 부여하는 즐거움을 다시 돌려받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시장의 왜곡에 간섭한 참여정부에 대한 복수심과 얽혀 있었던 셈이다. 그런 까닭에 지은이는 “이명박 대통령이라는 개인은 앞으로 전개될 5년 동안 상수라기보다 변수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라고 말하며 한국 사회의 운명을 판가름할 전환기는 대선 이후에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은이에 따르면 자폐적 시장의 등장으로 부르주아 정치가 위기를 맞게 될 대선 이후는 분명 무질서와 혼란의 시기이겠지만 새로운 정치세력을 위한 기회의 시기이기도 하다. 지은이가 부르주아 정치의 위기와 그 공백을 채워 넣을 새로운 민주주의 정신, 다른 사회에 대한 비전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은이는 이렇게 주장한다. 지금은 자본주의에 대한 경제학적 분석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분석의 데이터를 ‘혁명적’으로 해석할 주체가 더 중요하다고, 그런 혁명적 주체를 이끌어낼 수 있는 담론 역시 경제학이 아니라 인문학적 비판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지금 경제학이 부족해서 이 꼴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에 걸맞게 지은이는 지식인들 스스로가 ‘지식인의 죽음’을 토로하고, 인문학자들 스스로가 ‘인문학의 위기’를 호소하던 지난 10여 년간 개인 홈페이지와 블로그(‘이택광의 WALLFLOWER’)를 운영하며 끊임없이 우리 사회를 향한 인문학적 비판을 실천해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무례한 복음』은 지은이의 이와 같은 인문학적 비판을 우리 시대에 대한 뼈아픈 성찰이자 생생한 증언으로 남기기 위해 도서출판 난장이 기획한 한국문화 연대기, “이택광의 쾌도난마 한국문화” 시리즈의 출발을 알리는 책이기도 하다. 너무나도 많은 사건들이 순식간에 연이어 벌어지고, 너무나도 많은 사건들이 주류 언론에서 고의적으로 무시되는 탓에 너무나도 의미심장한 많은 사건들이 이내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곤 하는 오늘날, “이택광의 쾌도난마 한국문화” 시리즈는 망각과 무관심이라는 적에 맞서는 기억과 개입의 문화정치적 기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