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노무현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을 넘어
대통령 노무현과 참여정부를 본격적으로 평가하면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새 시대 플랫폼’을 제시하는 책이 출간되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한국 현대정치사의 비극적 사건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의 죽음은 국민적 각성을 일으켜 거대한 변화의 첫 걸음이 되고 있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이 집필한『노무현 이후 - 새 시대 플랫폼은 무엇인가』는 이러한 역사적 전환에 대한 통찰의 시각으로 노무현의 시대와 그 이후를 말하고 있다.
2003년 이후 거의 매년 참여정부 평가 작업을 해 온 저자는 서언에서 이 책의 직접적인 집필동기가 된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특별한 소회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특별히 그를 아쉬워하는 것은, 시대의 어둠을 깨치는 위대한 방법을 찾기 위해 같이 머리를 맞대고 밤을 새울 기회가 코앞에 닥쳤는데 홀연히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5년의 재임 기간 동안보다 퇴임 이후에, 수십 년에 걸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민족적 자산이라고 생각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퇴임 이후를 가장 철저하게 준비하고 ‘기분 좋게’ 청와대를 떠났다. 이 책은 고향 봉하마을로 돌아가서 홀가분하게 새로운 진보를 연구하고 실천하고자 했던 학습능력이 뛰어난 전직 대통령과 “머리를 맞대고 밤을 새울” 준비가 된 저자가 그 “기회”를 코앞에서 빼앗긴 아쉬움를 삭이면서 49재 기간에 혼신을 다하여 쓴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그의 정신과 지적 유산을 상속한 첫 번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노 전 대통령과 진검승부를 해보고자 했던 저자의 준비된 콘텐츠는 무엇인가가 이 책의 핵심 포인트이다.
통계의 힘과 좋은 모델로 대한민국 바로 보기
대한민국의 길을 찾는데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천의 얼굴을 가진 한국 사회에 대한 바른 통찰이다. 현재 펼쳐져 있는 소모적인 대립과 갈등은 상당부분 정치계와 지식사회의 한국 사회에 대한 피상적이고 분절적인 이해에서 비롯되었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다양한 얼굴과 단면들을 속속들이 조명한 풍부하고 정확한 통계정보를 통해서 다양한 집단 및 계층의 욕망, 고통, 불만 등을 정확하게 분석해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한국 사회를 보는 창으로서 ‘일자리’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과 노동의 격차, 자본의 격차 등 일반국민들이 실질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자원에 눈높이를 맞추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한국 사회를 노동과 자본의 대립 구도로 파악하고, 노동의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진보진영의 프레임인 ‘신자유주의’, ‘양극화’ 모델의 허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한국 사회를 좌파와 우파의 대립 구도, 또는 기득권과 비기득권의 대립 구도로 파악하는 보수진영의 인식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가치생산 생태계’, ‘사회적 동기부여 체계’, ‘공정과 공평’, ‘과소시장과 과잉시장의 상호의존 모델’ 등을 한국 사회를 바로 보기 위한 새로운 모델로 제시한다.
이러한 정확하고 풍부한 통계분석과 새로운 모델을 가지고 참여정부를 평가한 것은 기존의 진보의 평가와 보수의 평가를 넘어선 종합적인 통찰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노무현과 참여정부에 대한 새로운 평가
보수세력이 전통적으로 중시해 오던 평가기준에 비추어 보면 참여정부의 실적은 정말 탁월하다. 예를 들면 2007년 1인당 국민소득(GNI)은 2만1695달러로 참여정부 5년간 79.3%가 오른 것이다. 같은 기간 국내총생산은 평균 4.3%의 실질성장률을 기록하였다. 주요 선진국이 1만3천 달러에서 1만7천 달러에 머물던 시절 성장률이, 일본 3.4%, 영국 2.6%, 미국 3.2%, 독일 2.7%, 프랑스가 3.2%임을 감안하면 4.3%는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다. 수출은 연평균 20%에 가까운 증가율을 기록했다. 경상수지, 외환보유액, 종합주가지수의 향상율도 좋았고, 기업 실적도 개선되어 제조업의 부채 비율이 떨어지고 이익률도 개선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 시비, 무능정부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는 과거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어떤 문제들이 참여정부 기간에 급부상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참여정부의 그늘은 전통적으로 중시하고 중점 관리한 지표보다는 평소 중시하지 않은 지표에서 드러난다. OECD 최고 수준의 자살률, 7~8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자영업자들의 총소득, 비경제활동인구 세부통계에서 나타난 일자리의 실태 등이 그것이다.
노무현이 국민과 한 계약의 핵심은 ‘원칙과 상식의 회복’이었다. 그런데 노무현과 국민이 맺은 2002년의 계약은 당선과 동시에 이미 70~80%가 이행되었다. 국민들은 과거의 계약이 이행잵면 새로운 계약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참여정부 이전부터 갈등이 시작된 민생문제들이 화산처럼 폭발했다. 그리고 참여정부 집권 기간에 1948년 이후 형성된 제반 시스템의 모순과 문제들이 국내외 여러 요인들과 중첩되면서 일시에 부각되었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참여정부를 공격하며 모든 문제를 정도 이상으로 침소봉대했다.
결과적으로 참여정부 시기에 국민들은 총체적인 구조개혁을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생각했다.
임기 중에 급격하게 시대정신의 대전환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참여정부의 좌절과 노무현의 비극에 숨어있는 수수께끼의 실마리이다. 2002년 당시 자타가 공인하던 시대정신이 불과 몇 년 뒤인 2007년~2008년의 대선과 총선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일은 현대 정치사에서 흔한 일이 아니다. 이는 정치·사회적 대격변이나 환경적 대재앙이 휩쓸고 간 나라에서나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 책은 이런 거대한 변화에 대한 성찰의 결과이다.
노무현이 남긴 숙제에 답하다
초법적인 제왕적 권능을 행사했던 역대 대통령들이 공통적으로 남긴 문제는 대통령 리더십이었다. 그런데 노무현은 고집스레 헌법과 법률이 허용한 권력만 행사하였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 리더십의 문제에 가려 있던 각종 시스템의 문제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이것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 인해 선명해진 만큼, 그가 한국 사회에 남긴 숙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숙제들은 정치적 좌절의 증거일 수도 있고, 개혁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이 책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발전 패러다임을 역설한다. 대한민국이 새롭게 타고 갈 정책 플랫폼을 제시하고 사회 콘셉트디자이너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새로운 정책 플랫폼의 핵심 가치는 공정과 공평이다. 이와 함께 헌법과 각종 정치관계법의 개혁원칙을 제시하며 국민이 요구하는 시스템 개혁의 방향을 짚고 있다. 저자는 구 정치의 폐단과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정치 생태계와 기존의 진보와 보수를 초월한 지식인 소사이어티의 형성, 그리고 정론지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저자의 주장 중에 유권자들이 표심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에 관한 내용은 현실 정치계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이념, 지역과 함께 바로 ‘매력’에 관한 것이다. 노무현이 풍겼던 매력의 중심에는 서민 친화성과 더불어 ‘바보’라는 별명에서 보듯이 원칙과 상식을 우직하게 견지하는 그의 정치 인생이 있었다. 2002년 노무현을 대통령 후보로 만든 민주당 국민경선과 대통령선거, 그리고 2004년 총선 결과는 정책 노선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정치인 또는 정치세력의 행태적, 문화적 매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이 책이 그리는 국가 비전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도전이 장려되는 나라, 공정한 경쟁과 공평한 보상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나라다. 영남과 호남을 뛰어넘고, 진보와 보수를 뛰어넘고, 성장과 통합을 상생 결합하고, 임박한 기후·환경·에너지·자원 위기와 북한 위기를 효과적으로 타개해나가는 중도의 길이 진정한 진보라는 것이다.
새로운 진보의 길을 모색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기존 진보진영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한국 사회 진보 100년을 성찰하면서 현재 진보진영의 시대적 착각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1980~1990년대 초반의 세계사적 시간대는 사회주의 세계 체제의 위기이자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의 위기였으며 좌파적 혁명주의의 위기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를 알지 못했던 한국 진보는 1960년대 그 기본 틀이 형성된 사회주의, 민족주의, 혁명주의를 좇았다. 물론 여기까지는 다 과거사다. 문제는 한국 진보의 이념, 정책적 오퍼상 전통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세계사적 시간대에 대한 착각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새로운 진보의 길을 찾기 위해서는 ‘복지가 아닌 정의’가 문제의식의 핵심이다. 이명박 정부는 정권을 수익 모델로 간주하는지, 큰 폭의 적자 재정이 예상되는데도 상층 소수가 혜택을 보는 감세를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다. 동시에 토건족 또는 재벌 및 대기업이 대부분의 혜택을 보는 재정배분 계획을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다. 이런 마당에 진보세력이 큰 폭의 재정적자를 감수하고서라도 복지재정을 대폭 늘리고, 공공부문을 유지·확대하자는 것은 객관적으로는 반동이 아닐 수 없다. 발전 국가, 개발 독재의 유산과 사회민주주의가 이종 교배하면 재정을 엄청나게 먹어치우는, 불가사리 같은 괴물을 낳을 뿐이다. 더 따뜻한 나라를 만들려면 더 차가운 정의를 세워야 한다. 더 큰 복지, 더 많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더 확고한 정의를 세워야 한다.
새로운 진보는 이제 세상을 보는 의식의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 양극화, 신자유주의, 평등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비판할 수는 있어도 미래를 책임질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