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해석들은 너무나도 빈약하다.
…… 해석의 시도들로 보건대, 비극이 자아내는 효과에는 다른 기원이 있으니
그 기원을 발견해 내야 하는 것은 아닐까?”
― 지크문트 프로이트, 『미켈란젤로의 모세 상』
사제(師弟)의 새로운 『햄릿』 해석
『햄릿과 오이디푸스』는 프로이트가 극찬한 어니스트 존스 박사의 『햄릿』에 대한 비평서로서 정신분석학의 세계적인 명저로 꼽힌다. 의학박사이자 정신분석학계의 손꼽히는 대가인 존스의 탄생 130년, 출간 60주년을 기념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번역되었다. 미국정신분석학회와 영국정신분석학회를 설립하고, 국제정신분석학회의 종신 회장을 지낸 존스의 이 책은 근대문학의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라고 불리는 『햄릿』의 프로이트적인 해석으로서는 최초이자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완고한 의사이면서 동시에 자신감으로 충만한 문학 비평가이기도 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소설과 시를 탐독한 ‘독서광’이었기에 훗날 정신분석의 적용 영역을 문학에까지 확장하는 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 그는 자신의 『햄릿』 해석에 누구보다도 자신감에 차 있어서, “정신분석학이 『햄릿』의 제재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연관 짓고 나서야 비로소 이 비극이 빚는 신비한 효과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프로이트는 제자인 어니스트 존스(Ernest Jones, 1879~1958)가 훗날 자신의 분석을 “완벽하고 참신하게 발전시켰다”고 극찬했다. 프로이트의 절친한 벗이자 제자인 어니스트 존스 박사는 『햄릿과 오이디푸스』에서 프로이트의 『햄릿』 해석뿐 아니라, 『햄릿』에 숨겨진 수수께끼를 명징하게 풀이함으로써 문학사의 난제를 해결했다.
햄릿은 왜 임무를 유예하는가? ― 기존의 ‘주관론’과 ‘객관론’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은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여러 차례 낭독되고 상연되어 왔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인생의 갈등에 관한 철학적 성찰을 유려한 문체와 함축적인 표현으로 잘 나타낸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 그런데 희곡 『햄릿』은 겉보기에는 명확하고 단순한 것 같지만 사실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대사와 장면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이 수수께끼 가운데 최대의 난제는 단연 햄릿의 고뇌가 도대체 무엇 때문이냐는 것이다. 주인공 햄릿은 극 내내 아버지의 원수인 숙부를 제거하는 임무를 끊임없이 유예한다. 이 갈등 상황을 야기한 원인에 대해 수많은 주장이 제기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어떤 비평가들은 햄릿이 기질적으로 생각을 너무 많이 해 행위하는 능력이 감퇴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주관론’) 또 어떤 이들은 햄릿이 복수를 하기에는 객관적인 상황이 너무나도 불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객관론’) 클라이맥스를 맨 뒤에 배치하기 위해 행동을 유예시킨 것이라는 주장, 햄릿은 아예 고민하거나 망설인 적도 없는데 사람들이 오해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니스트 존스는 『햄릿과 오이디푸스』에서 기존 해석들을 하나하나 논파하며 이 오래된 수수께끼를 정신분석학의 틀로써 명쾌하게 풀어낸다.
가장 중요한 해석인 ‘주관론’과 ‘객관론’을 살펴보자. 존스는 괴테로 대표되는 관점, 즉 햄릿이 본래 유약한 사람이라 행위하는 능력이 약하다는 의견을 지적한다. 괴테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적는다. “나로서는, 한 영혼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무거운 의무적 행위를 셰익스피어가 표현하려 했다는 게 분명하다고 봅니다. ……그의 본성은 너무나도 순수하고 고귀하고 더없이 도덕적이지만, 영웅을 구성하는 대담함의 요소가 없기 때문에, 이 본성은 지탱하지도 버리지도 못할 짐에 깔려버립니다.” 그러나 존스는 햄릿의 행동이 언제나 단호했음을 상기시킨다. 폴로니어스를 죽이고, 해적들을 공격하며, 길든스턴과 로젠크란츠를 계획적으로 곤란에 빠뜨리고, 애인과 어머니를 격렬하게 비난할 뿐 아니라 레어티즈의 결투 신청을 주저없이 받아들이고, 겁없이 밤중에 유령을 혼자서 따라간다. 햄릿은 유약하거나 온건하지도 않고, 행동력이 부족한 사람도 아니다. 그는 용기로 충만했으며 더없이 단호한 청년이었다.
“신경 곳곳에 폭약을 심어놓고 정신은 다이너마이트 같은 이 남자가 상념 많고 나태한 인간의 상징이 되다니, 아이러니한 운명의 변덕이 틀림없다.” ― 브란데스(덴마크의 비평가), 본문 54쪽
그렇다면 햄릿은 몇몇 비평가들의 지적처럼 객관적인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했기 때문에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주저했을까? 이를테면 아버지가 암살당한 것을 입증하지도 못하고 숙부를 죽였다간 격렬한 비난에 휩싸였을 것이기 때문에 망뎼였다는 지적은 타당할까? 존스는 『햄릿』에 나타난 정황이 이 견해에 정면으로 반대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첫째, 햄릿은 백성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는 처지였다. 단적인 예로 국왕 클로디어스(햄릿의 숙부)는 햄릿이 신하 폴로니어스를 살해했어도 함부로 처벌하지 못한다. “엄한 법을 적용해선 안 됩니다. 그는 얼빠진 대중들의 사랑을 받으니 그들은 판단력보다는 눈으로 좋아해요.”(제4막 제3장) 둘째, 클로디어스는 인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국왕이 아니었다. 앞서 말한 폴로니어스의 죽음으로 인해 그 아들 레어티즈는 국왕에게 아버지를 죽인 책임을 묻기 위해 봉기한다. 이때 레어티즈는 복수만을 생각할 뿐 권좌를 주장하지도 않았으며, 국왕이 폴로니어스를 죽였다는 것이 증거도 없는 오해였는데도 지지자들은 그의 집권을 주장한다. 존스는 하물며 햄릿이 이 외부 정황 때문에 복수의 임무를 지연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단호하고 용감한 성격의 청년이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에서 복수를 지연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존스에 따르면 이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해석은 이 임무만이 지니는 특성에 원인이 있다. 그러면 햄릿이 극에서 보여주는 심리적 갈등을 살펴보면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어떤 때에 그는 그 일을 하기엔 너무 겁이 많은 척하다가, 다른 때엔 유령의 진실성을 의심하다가도, 또 다른 순간엔―아주 결정적인 기회가 생겼을 때―시기가 적절하지 못하니 왕이 악한 행동을 할 때 죽여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변명의 내용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진정한 이유는 못된다. 예를 들어 햄릿은 스스로도 숙부가 부친의 죽음의 배후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유령이 이를 확증하였다고 믿던 터였는데, 갑자기 유령이 거짓말을 했으리라고 보는 것은 근거 없는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존스는 더욱이 햄릿이 그때그때 다른 변명을 한다는 것을 미심쩍어 한다. “누군가가 자기 행동에 대해 매 순간 다른 이유를 댄다면, 그가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본래의 이유를 숨기려 한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는 햄릿의 아전인수적인 핑계의 이면을 탐색한다. 존스는 햄릿이 겉으로는 임무를 적극적으로 실행하려는 의지를 보이지만 “임무를 완수하려는 충동과 그것을 꺼리는 특정한 반대 원인 간의 대립 때문”에 행동을 지연했으리라고 추측한다.
제3의 가능성 ― 임무의 속성과 상황의 특수성 고찰
햄릿의 임무는 무엇인가? 숙부 클로디어스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면 클로디어스가 저지른 잘못은 무엇인가? 존스는 이때 클로디어스가 지은 두 가지 죄에 대해 햄릿이 각기 다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을 주목한다. 숙부 클로디어스의 죄는 형제인 선왕을 살해한 것과 왕비와 근친상간을 한 것이다. 그런데 햄릿은 아버지의 피살보다도 어머니의 근친상간에 훨씬 더 분노한다. 햄릿이 어머니의 이른 재혼에 분노하는 것도 통상적인 경우와 비교했을 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격렬하다. 존스는 클로디어스가 단순히 두 죄를 각각 범했다고 여기는 것과 두 죄의 상호 관계를 결합해서 생각하는 것이 전혀 다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존스는 세상과 삶을 혐오하면서 보이는 햄릿의 강한 거부감이 정신신경증과 무척 닮아 있다고 하면서, 이것은 인물의 유아기와 현재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과 관련 지어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존스는 그러면서 햄릿이 유아기에 지녔을 법한 심리 상태를 추측한다. 햄릿은 아버지를 배제하고 어머니의 사랑을 독점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바람은 커가면서 ‘억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햄릿의 소망이 숙부로 인해 실현되자 이 억압된 기억은 자극을 받아 다시 활동하게 되었을 것이다. 햄릿의 우울증적인 태도와 고통은 이 때문에 생겨났을 것이다. “이는 햄릿과 같은 실제 인물을 심리학적으로 연구했을 때 결국 항상 발견되는 정신 과정이다.”
저자는 여기서 더욱 논의를 진행하기에 앞서 주장에 필요한 정신분석의 몇 가지 연구 성과를 제시한다. 우선 그는 어린아이의 질투심이 통상적인 생각에 비하면 더없이 강렬하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형제가 태어났을 때 보이는 적개심이나 반갑지 않다는 듯한 표현은 결코 장난 삼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에 대한 직관이 반영된 절실한 바람”이다. 또 저자는 죽음이나 파괴에 대한 어린아이의 개념이 성인과 전혀 달라서 그것이 오싹하다는 생각을 쉽게 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유아기에 부모와의 관계는 개인의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쉬운데, 존스에 따르면 (1) 유아기에 받는 어머니의 사랑이 과도할 때 아이의 감정이 필요 이하로 억압되면 남자 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의존감이 너무 강해지지만, 반대로 이 감정이 지나치게 억압되면 여성에 대한 무관심이나 혐오감, 또는 동성애에 빠질 수 있다. 또 (2) 아버지에 대한 억압의 수준이 미미한 경우 적개심은 숨김없이 드러나서 아버지가 죽었으면 하고 바라는 소망에까지 이를 수도 있지만, 적대감이 심하게 억압되는 경우 아버지에 대한 과장된 평가와 존경, 아버지의 행복에 대한 병적인 근심 등을 낳게 된다.
존스는 이어서 햄릿의 상황을 이러한 일반론과 연결 지어 설명한다. 희곡 『햄릿』의 곳곳에 나와 있듯이 햄릿의 어머니 거트루드는 호색적인 성품에다가 아들을 열렬히 사랑하는 여인이다. 그렇지만 햄릿은 어떨까? 왕비와 다소 간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햄릿이 오필리아를 아주 사랑하지 않는다고 볼 순 없지만, 존스는 햄릿이 오필리아를 애인으로 택한 이유를 그럴 듯하게 추정한다. 첫째, 오필리아의 조심스럽고 순결한 모습은 왕비의 성격과 완전히 대조적이다. 이 점은 햄릿이 “반대 극단으로 급격히 쏠려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어머니와 가장 거리가 먼 여성을 택하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둘째로, 궁중에서 연극을 상연하는 장면에서 햄릿 왕자의 태도가 잘 나타난다. 이미 오필리아에게 한 차례 폭언을 퍼부은 (그래서 연인 관계가 깨져버린) 뒤인데도, 햄릿은 옆에 앉으라는 어머니의 말을 거절하고 오필리아에게 친근한 척하고 음란한 농담을 건넨다. 오필리아를 애인으로 삼은 것은 이 여인 자체에 대한 애정 때문이 아니라 “상심하고 화가 난 애인이 대부분의 경우 더욱 적극적인 경쟁자의 팔에 의지하듯이 어머니와 오필리아를 대결시키려는 무의식적인 욕망 때문”이라고 추측하게 되는 대목이다.
햄릿이 어머니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명백하다. 부왕의 사망 이후 어머니가 다른 남자에게 가버려서 극심한 분노에 싸였기 때문이다. 이 감정은 여성 일반에 대한 증오로 확장된다. 햄릿은 오필리아에게 폭언하는 장면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여성의 일반적인 특징을 강하게 비난한다.
숙부에 대한 햄릿의 태도 역시 간단하지 않다. 햄릿이 숙부를 혐오하는 것은 숙부가 윤리적으로 잘못된 짓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경쟁자가 잘 하는 것을 시기하는 악인의 혐오심과도 같다.” 클로디어스는 대체 어떤 인물인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차지하고 싶다는 햄릿의 소망을 성취한 사람이다. 클로디어스를 비난하는 것은 자신의 떳떳하지 못한 소망을 단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햄릿은 숙부를 처벌하지 못한다. “숙부는 햄릿 자신의 인격의 가장 깊이 숨겨진 부분을 공유”하며,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이다. 햄릿이 “자신을 죽이지 않고서는 숙부를 죽일 수 없”는 이유, “스스로도 죽음의 문턱까지 갔을 때 거리낌없이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124~125쪽) 햄릿은 결국 “근친상간이 지속되게 하여 대리만족을 느끼고, 동시에 왕의 손에 파멸당할 것을 재촉하는 수동적인 해결에 의지하게 된다.”(127~128쪽)
“따라서 복수에 대한 아버지의 요구를 충족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지연과 좌절은, 햄릿이 근친상간과 부친 살해를 결합해서 생각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본문 102쪽)
존스는 셰익스피어의 개인사를 참조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훨씬 강화한다.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명성을 지녔으면서도 개인적 삶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한 셰익스피어이지만, 저자는 꼼꼼하고 성실한 태도로 여태까지 알려진 사실들을 재구성하여 『햄릿』 창작에 영향을 주었을 법한 사건을 추려낸다. 앞서 언급한 『햄릿』에 대한 기존의 해석들과 마찬가지로 이때 동원되는 논거들은 셰익스피어의 독자나 연구자에게는 꽤나 친숙한 정보인데, 이 퍼즐들이 이렇게 재구성될 수 있다는 것에 절로 감탄하게 된다.
작가 개인사와 신화학을 동원한 희곡의 재조명
『햄릿』은 1601~02년경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희곡을 외따로 생각하지 않고 셰익스피어 생애의 전체적인 흐름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면 이 사실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셰익스피어는 1600년경을 기점으로 ‘성 혐오’와 ‘질투’를 제재로 한 작품을 여러 차례 저술하는데, 『로미오와 줄리엣』을 뺀 비극 전부를 이때 집필한다. 본문의 몇몇 표현을 근거로 생각해 보면 어떤 개인사적 계기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1596년에는 아들 햄닛(Hamnet)이 사망했고 1601년에는 후원자가 정치적 정변으로 인해 처형되거나 수감되었다.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대단히 불안한 상태에 처했을 것이다. 또 프로이트는 같은 해에 부친이 별세한 사실을 거론하며, “아버지를 뒤따르는, 즉 대체하는 순간은 유아기적 금지된 소망들을 되살릴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주장도 하였다. 그러나 존스는 셰익스피어가 썼다는 한 소네트에 주목한다. 시인이 한 청년에게 애인을 소개해 주었다가, 이 청년이 애인을 빼앗아 간다는 내용인데 존스는 여기에서 친구보다 애인을 더욱 강하게 나무라는 어조를 강조한다. 존스에 따르면 이 소네트는 셰익스피어의 개인적 경험담의 반영일 여지가 많으며 시인은 이 무신(無信)한 남녀에게 마음껏 분노하지 못한 대신 이 아픔을 토대로 비극을 창작했다.
존스는 이어 다른 신화에 나타난 영웅담을 거론하면서 『햄릿』의 위치를 조명하려고 한다. 영웅이 경쟁자 아버지를 제거하려는 주제가 등장하는 일련의 신화를 살펴보면서 존스는 『햄릿』을 살부(殺父) 모티프와 근친상간 욕망을 표현한 문학의 연장선상에서 인식한다. 신화학적 저술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천천히 음미해 볼 만한 대목이다. 또 셰익스피어본(本) 『햄릿』이 이전의 저술(삭소나 벨포레 등이 쓴 햄릿 이야기)과 어떻게 다르며, 그 차이점이 존스 자신의 논지를 얼마나 강화하는지도 함께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일전에 누군가는 평론가란 생산하는 이가 아니라 생산물에 기생하는 이라면서 …… 존재 의의를 비웃는 동시에 자학까지 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였는데, 그와 같이 상식이 부재하는 조소는 이렇듯 위대한 사례 앞에서는 …… 조용히 소외될 뿐인 것이 아닌가 한다.”(15쪽)
짧은 서론과 부기의 의의
옮긴이가 역자 서문에서 제1장과 제9장(원서의 ‘부기’에 해당함)에 대해 나름대로의 의미 부여를 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두 장(章)은 길이가 짧은 것에 비해서 이 책의 의의를 잘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옮긴이는 제1장이 “겉보기엔 불필요하면서 가벼운 대목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글을 유심히 살펴보면 저자가 살던 시대에 일부 사람들이 문학 비평에 대해 어떤 관점을 지녔는지 어렴풋이 읽을 수 있다.”라고 한다. 존스는 제1장에서 작품 비평은 창작자에 대한 정보를 배제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점과 허구적인 등장 인물도 마치 실존 인물인 것처럼 여기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주장 같지만 옮긴이는 이런 알기 쉬운 당위를 저자가 전제로 삼는 데엔 이유가 있다고 지적한다. 당시 일부 평론가는 작가와 작품을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을 당연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가공의 인물을 정신분석하려는 시도가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했기 때문에, 존스는 이러한 비판적 목소리에 맞서서 “표현론을 수용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인 세계관으로 희곡 『햄릿』을 비평할 것을 천명한다.” (10쪽)
게다가 제9장에는 존스가 자신의 이론을 바탕으로 『햄릿』을 재해석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연극이라는 창작의 영역에 모종의 ‘훈수’를 두려는 모습이 나타난다. 특히 글에도 언급되는 로렌스 올리비에 감독은 영화 「햄릿」(1948)을 제작할 때 어니스트 존스 교수의 조언을 구해서 모자(母子) 간의 에로틱한 관계에 초점을 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역자는 여기에서 “위대한 평론”이 “원작자가 충분히 드러내지 않은 측면을 강조하거나 새 의미를 발견·산출하는 기능을 하”는 모습을 읽는다. (15쪽)
“어니스트 존스 교수께서는 『햄릿』에 대해 정말로 물샐틈 없는 주장을 하셨고, 우린 그걸 완전히 믿었습니다. ……당시 저는 그게 햄릿에 대한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풀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로렌스 올리비에, 《뉴욕 타임스》 인터뷰
또 옮긴이는 가와이 쇼이치로 교수나 유명한 미학자 모리스 위츠(Morris Weitz)가 자신들의 저서에서 프로이트와 존스의 『햄릿』 비평을 비판하면서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정작 원전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이미 본래의 글에 반론이 있는 주장을 하는 모습과 뚜렷한 오독, 불성실한 학자적 자세를 지적하기도 했다.
프로이트식 종교 읽기
“본연의 성모가 이렇게 축소된 것과 성스러움에 대한 유아적 관념을 박탈당한 것은 위에서 지적한, 기독교 신화에서 성모를 희생하여 성부를 높이려는 목적과 잘 부합하는 듯하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이것의 함의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더 가까이함으로써 근친상간의 소망에 맞서기 위함이다.” (본문 233쪽)
『햄릿과 오이디푸스』는 단순히 어니스트 존스의 유명한 비평 단행본 한 권만을 옮긴 것이 아니다. 옮긴이는 부록으로 존스 교수의 종교에 관한 글 다섯 편을 발굴해 수록하였다. 이 가운데 특히 ?성령의 정신분석학적 연구?나 ?성탄절의 의미?, ?정신분석학과 기독교?는 신의 관념을 아버지의 이미지가 투사된 것으로 보는 프로이트 학파의 관점을 잘 보여주는데, 직간접적으로 『햄릿과 오이디푸스』의 내용과 주제가 닿아 있는 측면이 많기 때문에 독자의 이해를 심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프로이트의 명저인 『토템과 금기』, 『문명과 그 불만』, 『모세와 일신교』 등의 저서를 읽은 독자라면 유사한 주제를 담은 이런 논문을 무척 반갑게 여길 것이다. 또 ?종교 심리학?은 매우 짧은 글이지만 심리학이 종교 연구와 맞닿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담겨 있다. ?신 콤플렉스?는 자신이 신이라는 믿음을 가진 인간 유형에 대한 글인데, 스스로가 회의론자나 무신론자, 불?지론자라고 믿는 현대인마저도 이 글을 읽으면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말처럼 어떻게든 종교적인 것과 관계하고 있다는 말을 상기하면서 동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