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일반적인 4악장의 음악 형식에 따라 4등분했다. 즉 소년기-청년기-중년기-노년기로 구분한 것이다. 베토벤은 1770년부터 1827년까지 57년을 살았다. 소년기는 1770-1792년 본 시절, 청년기는 1792-1801년, 중년기는 1801-1812년, 노년기는 1812-1827년이다. 그리고 각 시기를 성장 -도전-갈등-초월로 이름했다. 10대까지의 성장과 20대의 도전과 출세를 거쳐, 30대의 그는 영웅처럼 살지만 갈등 속에 번민한다. 40대에는 더욱 절망에 젖다 50대가 되어서 그는 그 갈등과 절망을 초월한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반항인의 삶이다.
프롤로그 - 베토벤은 못나고 약하였다. 그는 갈등과 분노의 인간이고, 음악도 그런 갈등과 분노에서 나왔다. 베토벤은 모차르트처럼 천재도 아니고, 잘생기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모차르트가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의 새로운 음악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을 무한히 극대화시켰다. 즉 베토벤은 단지 춤을 추기 위해서 음악을 작곡하는 것을 아예 집어치우고, 오직 자기 기분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음악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성 장 - 1770년, 베토벤은 인구가 1만 명도 채 되지 않은 본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매일 구름과 안개로 뒤덮이고 습기가 많아 두통을 앓기 쉽기 때문에 본래의 도시다운 활기를 기대하기란 당연히 무리이다. 본이 속한 라인 지방은 프랑스와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독일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타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베토벤의 생애를 일관하는 계몽주의와 자유주의로 이어진다. 베토벤은 이미 10대 초에 스승인 네페를 통해 계몽주의를 알았다. 슈나이더가 1790년 “인간의 참된 가치는 타고 나는 것 이상의 것이다. 참된 고귀성은 정신의 위대함과 마음의 선량함에 의해 달성될 뿐이다.”라고 한 말은 베토벤에게 평생에 걸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본에서 작곡된 베토벤의 초기음악은 대부분 전통음악을 답습한 것으로써, 베토벤 나름의 개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도 전 - 1792년 11월, 베토벤이 도착한 빈은 본과 달리 태평천국이었다. 음악은 빈의 생활 속에서 흘러넘쳤다. 훌륭한 극장과 가극장이 즐비했을 뿐만이 아니라, 최고급 식당에서 최하급 술집까지 음악이 흐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공원에는 경쾌한 대중용 음악, 응접실에는 부유한 사람들의 사치스런 음악, 교회에는 무거운 종교음악이 연주되었다. 베토벤은 운이 좋았다. 왜냐하면 당시 존재하던 후원자 제도를 통해 바로 리히노프스키 공작과 로브코비치 공작을 소개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죽음과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베토벤의 빈 생활은 당연히 가난하게 시작되었다. 또한 음악적 지식이 전무하던 그는 하이든을 스승으로 모셨지만, 어느 선생도 신뢰하지 않았다. 선생들이 나빴던 것이 아니라 베토벤 스스로 자만하여 배우기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결국 베토벤은 그 뒤 쓰라린 경험을 하면서 모든 것을 스스로 익혀야 했다. 그런 노력 끝에, 빈 최초의 10년에 걸친 도전은 (연애만 제외하고)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피아니스트로서 성공했고, 작곡가로서도 중요한 작품을 써서 음악계에 중요한 위치에 올랐다. 또한 그는 자신의 사명감을 확고하게 의식하여, 자신의 예술이나 작품이 지극히 중요하다는 것을 강하게 확신했다. 그야말로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롭고 독립된 예술가였다. 베토벤은 본에서 계몽주의를 적극 받아들인 후 빈에서 그것에 대한 믿음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그것이 혁명에 대한 참여에까지 이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이는 아직도 그의 정치의식이 적극적이지 못했음을 뜻했다. 그래서 베토벤은 자신을 후원하는 계몽 귀족들과 교유하면서 계몽주의에 대한 일정한 공감을 공유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나 당시 체제에 대해 저항했다는 정치적 태도를 베토벤이 가졌다고는 볼 수 없다. 베토벤은 그들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체제에 복종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는 그런 현실로서가 아니라 관념으로서의 귀족을 스스로 이상화했다. 즉 자신을 정신적 귀족으로 망상한 것이었다. 그는 낮은 출신이 갖는 금전욕을 귀족이 갖는 경멸감을 가지고 혐오하며, 자신을 고귀한 사람들의 동료라고 생각했다.
갈 등 - 베토벤은 빈 초기 10년간 자신의 계몽주의적 정치관을 포기했다. 그런 정치관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1800년 이후였다. 즉 1801년 편지에서 자신의 예술이 ‘빈곤한 사람들을 위해서만 연주되어야 할 것’을 희망했고, 1802년, 예술가를 위한 사회주의적 후원제도인 ‘예술 상점’을 제안했다. 또한 그 시기에 그는 많은 계몽주의자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헌정했다. <영웅 교향곡>을 작곡할 무렵 베토벤은 나폴레옹을 자신의 계몽주의적인 가치관에서 이해했으리라고 짐작된다. 즉 나폴레옹을 군인보다도 사회적 인물, 즉 열정적인 자유의 전사, 조국의 구세주, 질서와 번영의 회복자, 어떤 곤란도 극복한 위대한 지도자로서 존경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후에 나폴레옹이 본질적으로 그런 해방자가 아님을 알자 그를 배신하였다. 베토벤은 모차르트나 하이든 음악에서 느껴지는 희극의 쾌락성을 <영웅>에서 단호히 거부하고 비극으로 돌아섰다. 그는 죽음, 파괴, 불안 등의 공격적이고 해체적인 힘을 음악으로 받아들이고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려는 의지를 음악에 담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의 음악이 비극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초월의 의지를 담았다는 점이다. 즉 비극적인 분위기 속에서 언제나 기쁨, 승리, 초월의 분위기를 담았다. 또한 베토벤은 이 음악을 통해 계몽주의의 가치, 즉 이타적인 사랑과 이성에 대한 믿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초 월 - 세월의 흐름에 따라 베토벤의 음악은 점점 인기를 잃어갔다. 대중들에게 베토벤 음악은 여전히 엄격하고 금욕적이며 갈등으로 가득한 심각한 것이자 절대적인 신념을 표명한 것이었으므로 그 인기가 급격히 하락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당시 그는 과거의 후원자를 대부분 잃었다. 이런 이유로 베토벤은 4년간이나 창작 활동을 중단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무서운 창작열을 불태우며 다시 창작 활동에 몰두하였다. 그는 밤중까지 작곡에 몰두했다. 식사시간이나 약속 시간도 곧잘 잊어 친구나 가정부를 놀라게 했고, 비가 억수처럼 쏟아져도 모자 쓰기를 잊고 비를 맞으며 걷기도 했다. 그는 어떤 일보다 작곡을 우선했다. 그래서 30대의 음악과 다른 점을 만들어 내었다. 그것은 마지막 장조에서는 처음의 장조가 뒤에서는 반음 높은 장조로 변하는 점이다. 이는 듣는 이로 하여금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갔다가 그것에 머물지 않고 다시 한 걸음 초월하는 느낌을 준다. 그 초월감은 압도적인 해탈 또는 법열까지 느끼게 한다.
에필로그 - 베토벤은 갈등의 삶 속에서 초월을 지향하는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산 사람이다. 그는 모든 갈등을 경험했다. 그에게 갈등이 아닌 삶은 없었다. 그의 삶 자체가 바로 갈등이었다. 태어나 죽을 때까지 그는 갈등에 허덕였다. 밖에서 생긴 갈등도 있고, 안에서 만들어진 갈등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갈등을 그는 이겨냈다. 아니 어쩌면 이겨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갈등을 이겨내고자 노력했다. 그러한 고투를 그는 음악으로 남겼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위대하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우리에게 감동이다.
박홍규 교수는 노동법을 전공한 법학자이다. 그렇지만 그는 가장 권력적일 수 있는 법을 가르치면서 법은 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학문의 벽을 허물고 토론이 활성화되면 ‘열린 세상’이 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그는 진정으로 예술과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그 동안 미술 개인 전시회도 열었으며,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1999년 빈센트 반 고흐를 노동화가로 새롭게 조명한 《내 친구 빈센트》와 2000년 풍자 만화의 아버지 오노레 도미에 의 평전 《오노레 도미에 - 만화의 아버지가 그린 근대의 풍경》, 2002년 스페인의 화가 고야를 반권력의 화신으로 본 《야만의 시대를 그린 화가, 고야》 등을 새로운 시각으로 서양 근대 화가를 우리에게 소개시켜주고 있다.
또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진 인물들을 재조명하는 작업도 해 왔다. 그 결과물이 바로 자유 학교를 위한 순교자로 알려진 페레의 생애를 쓴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마라》, 중국의 대문호인 루쉰의 사상과 문학 전체를 넓은 시야에서 조망한 《자유인 루쉰》 등이다.
음악으로 눈을 돌린 저자는 오페라를 그 시대의 정치와 사회를 반영한 산물로 보고 《오페라 사회사 - 비바 오페라》를 통하여 오페라를 사회사적으로 재조명하고 있으며, 이제는 《베토벤 평전: 갈등의 삶, 초월의 예술》로 베토벤을 ‘박해받고 경멸당한 음악 노동자’로 바라보면서 우리의 친구로 만들어가고 있다.
이 책은 한국인의 시각에 의한 최초의 베토벤 평전이다. 그 동안 로맹 롤랑을 비롯한 외국인의 시각에서 쓴 베토벤 전기를 우리말로 번역한 책은 많이 나왔지만, 그 동안 일제에 의해 왜곡된 베토벤의 모습을 복원하고 우리의 교육환경에서는 배울 수 없는 내용과 독창적인 시각으로 베토벤을 이해하고 있다.
박홍규 교수는 삶과 유리된 예술을 혐오하고 삶과 예술을 통합시키려는 열망의 소유자이다.
박해받고 경멸당한 예술가 베토벤
이 책은 “베토벤은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나 빈에서 음악으로 대성공을 하지만 곧 귀를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불굴의 의지로 가혹한 운명을 극복하고 걸작들을 썼고, 마지막 <합창>이라는 걸작을 남긴 채 환희 속에서 죽는다.”는 고정된 베토벤의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갈등과 초월’의 반항적 인간인 음악 노동자 베토벤이라는 새로운 베토벤 상(像)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자신이 베토벤을 좋아하고, 그의 음악을 노동자에게 권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베토벤의 음악이 진정 노동자를 위한 것이고, 노동자에게 어울리며, 노동자가 너무나도 알기 쉽다는 점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베토벤이 일반 대중이 알기 쉬운 음악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 일반 대중과 함께 호흡하지 못하고 ‘클래식’이라는 미명 아래 대중과 유리된 베토벤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이 책을 통해 우리 곁에 가깝게 함께 하고자 하였다.
베토벤은 이미 21살에 “나의 예술은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에 이바지하여야 한다.”고 했으며, 항상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을 위해 작곡하고자 했고, 그 뒤 30살이 넘어서는 자신을 그들과 같은 노동자로 다시 생각했다.
그는 음악사에서는 처음으로 그 작품을 창조적 노동의 산물로 생각했고, 그것을 생활 필수품과 교환하는 조직으로 ‘예술상점Magazin der Kunst’을 구상하기도 했다. 그것은 베토벤 생존 당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행복을 느낄 가족을 갖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는 끝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헤매었고, 자신에게 어머니가 되어줄 여성과 가정을 찾아 헤매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떤 공동체도 주어지지 않았다. 어릴 적에 파괴된 자신의 가족을 재생시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처럼 그는 전통이 파괴되는 시대, 개인이 홀로 서야 하기에 너무나 외로운 시대를 살았다. 저자는 그런 시대의 아픔을 그가 살았던 시대보다 2세기가 지난 지금 이 땅에서 함께 느끼고 있다. 그래서 베토벤은 저자에게 최초의 현대인이고, 동시대인이다. 베토벤은 현실과 이상의 갈등 속에서 분노하고 반항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어둡고 격렬하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의 삶과 예술은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갈등과 반항이 아닌 타협이나 예찬이었다면(그것이 현실에 대한 것이든, 이상에 대한 것이든) 우리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리라.
베토벤은 당시 사회의 산물 - 사회의 모순에 대한 대중의 슬픔, 고뇌, 분노, 갈등, 긴장, 그리고 웃음과 기쁨 - 을 가장 잘 표현한 사람이었다. 저자는 시대를 날줄로 하고, 음악을 씨줄로 삼아 인간 베토벤을 그려보려고 하였다. 즉, 베토벤의 살던 당시의 사회사와 음악사를 통해 그 속에서 갈등하고 초월하는 ‘개인’ 베토벤을 새롭게 그려 보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