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종묘’와 중요무형문화재 ‘종묘제례(악)’의 역사기록
『종묘의궤』의 완역 출간!
종묘와 『종묘의궤』
전통사회에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은 국가 그 자체를 상징하는 말이었다. 종묘(사적 제125호,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나라의 제향을 받들던 곳으로, 사직과 함께 조선시대 제사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대사(大祀)에 속했으며, 국가는 종묘와 관련된 의례를 제일 중요시했다. 『종묘의궤(宗廟儀軌)』는 이러한 종묘의 제도와 의식절차, 관련 행사를 그림과 함께 기록한 책이다.
『종묘의궤』는 인조 이후 모두 14차례에 걸쳐 편찬되었는데,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시대가 내려갈수록 봉안할 국왕의 신위가 늘어남에 따라 몇 차례 증축과 수리과정을 거치면서 그 내용을 기록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예학(禮學)에 대한 이해가 심화됨에 따라 왕실의 상징인 종묘에 대한 정비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그에 관한 내용들을 역사적으로 정리할 필요성이 대두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묘의궤』 역시 두 가지 형태로 편찬되었는데, 하나는 종묘와 영녕전을 보수하거나 증축하면서 그 과정을 기록한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종묘 제도와 의식절차 등을 역사적으로 정리한 형태이다.
이 번역본의 저본인 『종묘의궤』는 숙종대인 1706년 편찬된 것으로, 종묘 제도와 의식절차 등을 역사적으로 정리한 첫 번째 의궤이다. 이후의 『종묘의궤』나 『종묘의궤속록』들은 이 책을 기반으로 해서 편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종묘의궤』 편찬은 당시 시대적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이 책이 편찬된 시점은 서인과 남인이 두 차례의 예송과 세 차례의 환국을 거치면서 치열한 대립을 하다가 결국 1694년 갑술환국을 계기로 서인이 승리하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다. 이 시기 서인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국가의 모든 예제(禮制)를 정비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국가 예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던 종묘 제도를 바로잡음으로써 왕실의 정통성과 자신들의 집권의 정당성을 세우려고 했다. 신덕왕후와 단종의 복위, 정종의 묘호 추존을 비롯한 역대 왕과 왕비의 휘호(徽號)의 정비 등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종묘의궤』의 편찬은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집대성하여 문자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조와 정조대에 가서는 왕권이 강화되면서 이후의 종묘의 정비과정은 국왕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영조는 종묘를 증수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했으며 정조도 부왕과 마찬가지로 세실 결정을 정례화하고 예제의 정비를 주도했다. 아울러 영조대인 1741년 『종묘의궤』의 두 번째 정리 작업이 이루어진 이후부터는 1842년 『종묘의궤속록』이 편찬될 때까지 100년 동안 1년도 빠짐없이 종묘와 관련한 사실들이 기록?정리되었다. 그만큼 국왕과 국가 차원에서 종묘에 대한 관심이 컸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는 종묘 정비나 의궤 편찬의 주도권이 서인 사족에서 국왕 중심으로 변화해 갔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종묘의궤』의 체제나 성격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 책은 종묘 역사(役事)나 행사(行事)의 구체적인 과정이나 경비 등을 위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종묘에 관한 그림과 기록들을 종합적으로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말하자면 종묘에 관한 종합적인 정리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다루는 분야도 방대하고 수록된 자료도 광범위하여 종묘에 관해 많은 지식들을 제공하고 있다.
『종묘의궤』는 『국조오례의』,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예조등록』 등에서 광범위하게 관련 기록들을 뽑아 수록했고, 세부항목에 들어가서는 중요한 관련 논의들을 집중적으로 수록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종묘의 세세한 부분과 더불어 전체상을 그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특징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요 논의들은 대부분 왕실전례논쟁과 관련을 맺고 있다. 이는 이 책의 내용이 단순히 종묘의 제도사적인 서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예제의 정치사적?사상사적 접근까지도 가능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17세기 말부터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왕실의 정통성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서인의 지배력 강화라는 정치적 동기와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든지, 왕실전례논쟁 속에서 한당례(漢唐禮)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와 고례(古禮) 주자가례(朱子家禮)의 대립을 큰 축으로 하는 조선시대 예학사상의 전반적인 흐름을 읽어낼 수 있다든지 하는 것들이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종묘의궤』 완역 출간의 의의
의궤(儀軌)는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 행사의 과정과 내용을 정리한 기록으로서, ?봉(冊封)이나 책례(冊禮), 혼례(婚禮), 추숭(追崇)이나 존호가상(尊號加上), 능원(陵園) 조성이나 상례(喪禮), 제례(祭禮) 등의 다양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밖에도 친경(親耕), 궁궐 조영, 공신 녹훈, 왕실 인장(印章)이나 국왕 초상화의 제작 등에도 의궤가 편찬되었다. 또 정조대에는 화성 건설이나 능행에도 각기 장편의 의궤가 작성되기도 했다.
이러한 의궤는 하나의 행사를 완결된 형태로 정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묘의궤』처럼 그림(도설)을 덧붙여 그 행사의 내용을 자세하게 수록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궤는 왕실이나 국가 행사의 내용과 과정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그 변천 과정을 통시적으로 파악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종묘의궤』는 조선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한 종묘와 국가의 가장 큰 대사인 종묘제례를 기록한 의궤라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예제를 통해 당시 권력 관계의 다양한 정치?사회적 함의와 실상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의궤 자료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같은 사서가 편년사서로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면, 각종 의궤류는 하나의 행사를 완결된 형태로 정리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가 전고(典故) 자료로서 특색과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의궤류는 현대어 번역을 통해 출간하는 데 여러 어려움이 따른다. 특히 『종묘의궤』처럼 난해하고 첨예한 예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 번역상 난관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번 『종묘의궤』의 출간은 1965년 설립 이래 고전문헌의 수집과 정리 및 번역을 통해 한국학 연구 기반 구축 및 전통문화 계승 발전을 위한 사업을 지속적으로 벌여온 정부출연 전문기관인 한국고전번역원의 오랜 기획과 경험, 고전분야 전문번역가에 의한 수년에 걸친 작업의 결과물이다. 또한 이 책은 한국고전번역원과 민간출판사인 김영사와의 협력을 통해, 디자인과 편집, 마케팅을 차별화하여 기획 출간함으로써, 한국학 자료의 활발한 이용과 열람 및 한국학 연구 성과의 활성화에도 새로운 시도로서 주목을 받고 있다.
두 권으로 번역 출간한 『종묘의궤 1』에는, 제1책(도설)과 제2책을, 『종묘의궤 2』에는 제3책과 제4책을 나누어 수록했으며, 특히, 1권에는 종묘의 건축(10컷), 제례(6컷), 제기(18컷), 악기(14컷), 제복(14컷) 등 총 62컷의 관련 사진과, 종묘제례 재현의 중요 고증자료의 하나인 대한제국동가도(大韓帝國動駕圖,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등의 화보를 칼라 도판으로 수록함으로써 종묘와 종묘제례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꾸몄다. 또 『종묘의궤』 번역문 전문을 대상으로 주요 용어를 추출한 색인을 첨부하여, 연구 및 열람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종묘와 중요무형문화재인 종묘제례?종묘제례악은 조선시대 가장 높은 국가제례로서 역사적인 보존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전통 유교의례의 진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역사문화콘텐츠로서 문화산업적 가치도 뛰어나다. 이번 『종묘의궤』 번역 출간은 이러한 의미에서 전통문화의 현대적인 계승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클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