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예수’ 담론은 예수가 더 이상 교회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소수의 성서 전문가들의 비밀 영역이었고, 점차 교회의 영향권 안으로 포섭되었다.
신학자도 성직자도 아닌 김규항 선생의 『예수전』은 예수가 더 이상 교회와 소수 성서 연구자들의 독점물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그는 소위 성직자와 성서 전문가만의 비밀 영역이던 ‘역사의 예수’를 훔쳐 내 자기 자신과 대중에게 돌려준다. 그의 빼어난 통찰력과 필력으로.
그는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의 삶을 성찰하고 예수를 이 성찰의 자리로 초대한다. 이 자리에서 예수는 우리를 배우고 우리는 예수를 배운다. 그의 『예수전』은 이렇게 예수와 우리 사이의 대화를, ‘지금 여기’라는 삶의 현장에서의 대화를 중계한다.
―김진호(제3세계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 왜 지금 예수인가 ― 김규항, 예수의 삶을 다시 읽다
제도권 글쓰기를 시작한 이후 10여 년을 한결같이 우리 안팎의 권력을 향해 날 선 비판을 해 온 ‘B급 좌파’ 김규항. 그가 오랜 시간 준비해 온 『예수전』을 펴냈다.(이 책은 칼럼집이 아니라 저자가 본격적인 단행본으로 집필한 최초의 책이기도 하다.) 그의 엄격한(?) 시사 칼럼들만 보아온 독자들이라면 조금은 낯설 수 있는 소재다. 요즘 같은 시국에 한가로이 ‘예수’ 타령이라니. 정치사회적 혁명의 전망이 그 어느 때보다 아득해진 지금, 그도 별수 없이 내면의 수양이나 하기로 변심한 것일까.
그러나 이 책은 기독교인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 진정한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모두를 위한 것이다. 이 새로운 혁명은 사회구조적 변화뿐 아니라 나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것을 포함한다. 김규항은 예수에게서 그 단초를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2,000년 전 팔레스타인 인민들의 편에 서서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했던 그 청년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새로운 세상의 꿈’과 함께 찾아왔다. 개항기에 서학은 ‘새로운 세상’을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평등’과 ‘자유’의 이념을 무섭게 전염시켰다. 1970~80년대에는 이러한 흐름이 남미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서남동, 안병무 등의 민중신학론을 통해 지배적인 신학으로 유통된 바 있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에 기독교가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이후 친미, 반공, 배타적 민족주의, 가부장주의 등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보수화했고 신도 수 1천만 명이 넘는 거대 권력으로 변신했다. 실제로 그들은 사회 여론을 형성하고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막대한 자본과 기득권으로 언론의 감시와 비판마저 무력화하는 교회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성역’인 셈이다.
이 책은 권력 집단으로 전락해 버린 한국 교회에서 ‘예수’를 구해내려는 시도이며, 나와 세계를 바꾸기 위한 새로운 동력을 찾아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저자의 안내를 따라 예수의 시대를 읽어 나가다 보면,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진단과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
● 예수, 잔치를 열어 혁명을 하는 사람
이 책의 중심이 되는 문제의식은 ‘과연 예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예수는 교리의 주인공, 교리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적으로 만들어 낸 예수가 기독교 교리의 뼈대가 되었고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예수는 갈릴래아 나자렛 사람이라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갈릴래아 사람들은 가난했다. 지배계급과 로마의 압제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예수가 갈릴래아 사람이라는 것은 그가 고통받는 인민들과 함께하는 메시아로 예고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대개의 사람들은 예수가 정말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떻게 활동했으며 무엇을 꿈꾸었는지 왜 죽임을 당했는지 따위는 모조리 생략한 채, 그를 단지 교리의 주인공으로만 기억한다. 정말 예수는 단지 교리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그 고단한 삶을 살았단 말인가? 이성으로든 신앙으로든, 예수를 ‘갈릴래아에서 온 사람’으로 보느냐 ‘교리 속에서 온 사람’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예수의 정체성을 선택하는 결정적인 지표가 된다.”
이 책은 예수를 교리로 덧칠되지 않은 구체적인 인간으로 되살려 낸다. 예수는 고통받는 모든 사람을 아파하고 그들을 고통에 빠뜨린 지배계급과 사회체제에 불같이 분노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권위와 허위와 위선을 깨부수려 했다. 로마와 그에 결탁한 세력이 멋대로 독점한 성전의 권위를 대놓고 무시했다. 성전은 이미 그 신성한 의미를 잃은 지배세력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말했다. 하느님은 인민의 삶 속에서 인민과 직접 만나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분이라고.
예수는 심지어 로마 세금 징수업자 밑에서 일하며 온 인민의 미움을 샀던 세리를 제자로 삼기까지 했다. 예수는 세리를 로마의 앞잡이가 아니라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하는 인민으로 보았다. 예수는 그런 행동을 통해 지배세력의 위선을 비판한 것이었다. 예수는 가진 자들이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이름으로 강제하는 율법 또한 부정했다. 가난에 신음하는 인민들에게 율법이란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강제 조항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거리낌 없이 세리들, 죄인들과 어울려 시끌벅적하고 유쾌한 식사를 했다. 그의 식사는 파격이었다. 하지만 예수의 그런 천박한 식탁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인민들은 비로소 ‘인권’을 되찾았다. 예수는 경건한 사람들의 양식이었던 단식 또한 거부했다. 예수의 별명은 “먹보요 술꾼이며 세관들과 죄인들의 친구”였다. 그는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은 바로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고통에 신음하는 이웃들이라고 믿었고, 그들과 함께 잔치를 여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운동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 예수가 꿈꾼 나라 ―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가능한 ‘이웃 사랑’
예수는 세상이 바뀔 거라는 믿음을 버리지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지배계급이 예수를 적대시하고 끝내 죽일 수밖에 없었던 본질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세상이 바뀌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가 바리사이인들을 비난했던 이유는 하느님 나라 운동을 가장 교묘하게 반대했던 세력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인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양심과 양식을 갖춘 시민사회 세력’이다. 학식과 경제력에 사회의식까지 갖춘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는 그들을 꺼려했을까? 그것은 그들이 입으로는 변혁과 진보를 외치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변혁과 진보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현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스스로 그런 변화를 위한 노력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 노력은 대개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 현실의 외피를 덜 추악하게 만드는 일에 머문다. 그들은 오히려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를 좇는 모든 노력들을 ‘비현실적’이라고 냉소한다. 그들은 ‘NGO’, ‘시민운동’, ‘개혁 운동’, 그리고 ‘실현 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 따위 간판과 표어를 걸고 활동한다. 인민들은 탐욕스럽고 불의한 지배세력을 혐오하지만 양식과 윤리로 무장한 그들을 신뢰하고 존경한다. 그래서 그들, 오늘의 바리사이인들은 사회적으로 강력한 영향력과 설득력을 가지며, ‘진정한 변화를 막기 위한 변화’라는 그들 본연의 임무를 지속하게 된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의 바리사이인들은 자본주의의 모순과 병폐를 가장 잘 알면서도 그 체제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탐욕과 이기심으로 점철된 보수 기득권 세력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끊임없이 지적함으로써 대중들로부터 양식을 가진 지식인으로 통하는 사람들에 의해 견고하게 유지된다.
예수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했다. 저자는 이 말이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라 단정한다. 설령 정당한 방법과 노력으로 얻은 부라 하더라도 하느님 나라의 기준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부끄러운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무소유’를 명했다. 영적 자유를 위한 “무소유의 추구는 하느님 나라의 사회구조를 이루는 근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사회의 빈곤이나 기아가 대개 식량이나 재화가 모자라서 생겼다기보다는 고르고 정당하지 못한 분배의 결과라는 것을 안다. 힘을 가진 소수가 지나치게 많이 갖고 많이 먹기 때문에 힘없는 다수가 모자라고 배고픈 것이다. 그래서 무소유의 추구, 자발적 가난의 추구는 하느님 나라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다. 내가 덜 가지려 할 때 나보다 가난한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갖게 된다는 것, 그래서 결국 모두 고르게 갖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가진 사람은 오로지 가난한 사람, 즉 이미 가난하거나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는 사람뿐이다.”
기득권과 자본의 힘으로 예수를 팔아 더 큰 권력과 자본을 챙기고 있는 오늘날 보수 개신교 교회의 모습은 그래서 예수의 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시민들의 수도를 자기 소유인 양 하느님께 통째로 봉헌하겠다는 한 정치인의 언행은 오늘날 교회가 예수 사상의 본질을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예수의 기본 정신은 ‘이웃 사랑’이다. 저자는 자본주의에 종속되어 살아가면서 예수의 정신을 본받겠다고 하는 것은 그러므로 모순이라고 말한다. 예수가 자본주의와 공존할 수 없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가진 ?들만을 위한 ‘악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구조 안에서 예수가 말한 ‘나눔’의 사상은 구현이 불가능하다.
“자본주의는 예수의 이웃 사랑과 적대적인 사회체제이며, 그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려는 사회주의 기본 정신이 예수의 이웃 사랑에 닿아 있다는 건 분명하다. 예수의 이웃 사랑은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선량한 자본주의가’가 아니라 ‘특별한 사회주의자’인 것이다.”
● 오병이어와 치유 이적의 진정한 의미
예수가 행한 무수한 이적들은 과연 실재했던 일일까? 예수의 이적이야말로 메시아로서 예수와 기독교의 위대성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그 비과학성이야말로 기독교의 치명적 약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서로 치고받는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주장들이 모두 부질없다고 일갈한다.
“그 이적이 과학적 사실이라는 걸 입증한다고 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만일 예수가 물 위를 걸은 게 사실임을 입증하면 모든 사람이 예수를 존경하고 신앙하게 되는가? 우리는 예수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술사’라서 존경하고 신앙하는 게 아니다. 그 이적에 가르침과 깨달음이 담겨 있지 않다면, 그 이적이 우리의 삶에 변화와 감동을 줄 수 없다면 아무리 놀랍고 신비스러운 이적이라 해도 단지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병든 사람을 어루만지는 행위로써 고치는 이른바 치유 이적. 예수는 복음을 설파한 공생애 기간 동안 수많은 치유 이적을 행하였다. 하지만 당시엔 랍비들을 포함해 예수 말고도 치유 이적을 행하여 명성을 얻은 사람들은 많았다. 예수가 그들과 다른 점은 모든 이적들 앞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데 있다. 그는 단 한 번도 자기가 병을 고쳤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다’고 할 뿐이었다. 치유 이적의 속뜻은 이렇다.
“예수의 치유 이적에서 치유란 물론 병을 고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인민들과 하느님의 관계를 치유하는 것이다. 치유 이적은 인민들과 하느님의 관계를 치유하는 것이다. 치유 이적은 인민들과 하느님의 관계를 파괴하고 왜곡한 위선의 체제를 무너트리는 사건, 즉 인민들과 하느님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하느님이 그들의 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다시 말해서, 치유 이적은 그 자체로 하느님 나라의 편린이다.”
예수가 빵 다섯 개와 두 마리 물고기로 5,000명이 넘는 장정들을 배불리 먹였다는 ‘오병이어’ 이적은 예수의 모든 이적 가운데 부활과 더불어 가장 널리 회자된다. 사람들은 이 이적 앞에서도 과학적이냐 아니냐를 놓고 왈가왈부한다. 그것은 이적의 본질은 외면한 채 현상만을 놓고 떠드는 소리들일 뿐이다. ‘오병이어’ 이적은 우리에게 진정한 ‘나눔’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대개 나눔을 나와 내 식구가 배불리 먹고 남는 걸로 불쌍한 사람을 돕는 적선이나 자선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불쌍한 사람을 돕기 위해선 먼저 내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횡행한다. (…) 물론 당장의 적선이나 자선이 금세 굶어 죽을 사람을 살리거나 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긴급한 조처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그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 말하자면 나눔은 세상을 ‘나눔의 체제’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또 그런 변화를 위한 실천이며 행동이다. 그리고 그런 나눔의 원리로 작동되는 세상이 바로 하느님 나라다. 예수는 그 사실을 ‘오병이어의 이적’이라는 장엄하고 서정적인 광경으로 보여 준다.”
예수는 자신의 이적을 통해 사람들이 이적 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믿음과 소통”을 이해하기 되길 바랐다. 하느님은 가진 자들의 편이 아니라 억압받고 무시당하는 바로 자신들의 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그것이 예수의 수많은 이적이 담고 있는 속뜻이다.
● 부활의 진정한 의미 ―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믿음
부활은 ‘인간’ 예수의 행적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과학적으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예수의 부활이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라고 말한다. 예수를 떠났던 제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의 사상을 전하기 시작한 것이 그 가장 극적인 증거라고 한다.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이 그랬듯, 내 삶 속에서 예수가 부활하게 함으로써 영원한 목숨을 얻을 수 있다. (…)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을 자랑스러워하던 사람이 이 순간 그런 삶을 부끄럽게 여기고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다면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한 것이다. 권력을 얻은 후에 낮고 약한 사람들 편에 서겠다던 사람이 이 순간 스스로 권력을 잃어 낮고 약한 사람들을 뚼기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면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한 것이다. ‘옳다는 건 알지만 현실이’,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좀더 경제적 안정을 얻고 나서’라고 되뇌며 제 삶의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던 사람이 이 순간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으로 새처럼 훌쩍 날아오른다면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한 것이다.”
예수는 못 배우고 가진 것 없어 고통받는 인민들과 평생 함께한 사람이었다. 예수가 그들에게 보여준 것은 잘못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행동하는 삶이었다. 예수는 부활을 통해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구현을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킬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의 부활이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히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가 말하는 ‘믿음’이 신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의지와 행동에 거리낌 없이 참여하는 것”, 즉 “근본적으로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꿈”을 가리키는 말이다.
“꿈을 잃은 사람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듯, 이상주의가 사라진 세상, 모든 사람이 불가능한 것에 대해 꿈꾸길 중단하고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해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세상엔 아무런 희망이 없다. (…) 예수는 우리에게, 현실에 대한 비평에는 능하지만 새로운 세상의 창조에는 한없이 무력한, 여전히 좌파를 자처하면서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신념과 벅찬 희망이 아니라 지독한 우울과 무력감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에게 당부하고 또 당부한다. ‘하느님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당신이 함께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세요.’”
2,000년 전의 예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간절히 말한다. 고단했던 사내 예수의 삶을 한 줄 한 줄 읽어 나가며 이 책의 저자가 독자에게 전하려 하는 말도 아마 같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꿈”을 꾸자는 것.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수라는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라는 것. 좀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와 함께 “먹고 마시며” 믿음을 갖게 되기를 저자는 꿈꾼다. ‘역사적 예수’ 연구의 개척자이기도 했던 슈바이처 박사는 “예수전을 쓰는 것처럼 그 사람의 참된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은 없다”는 말을 남겼다. 저자 또한 이 책의 독자들이 각자 「마르코복음」을 다시 읽으며 저마다 ‘나의 예수전’을 써 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