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재 시인의 첫 산문집, 문명과 불화할 수밖에 없는 시인의 문제의식과 문명 통찰을 군더더기 없이 풀어놓다
「이문재 산문집」은 시인 이문재가 시인으로서 활동한 지 25년 만에 내는 첫 산문집이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움베르토 에코가 자신이 대중 매체에 쓰는 칼럼은 일기라고 한 말에 기대어, 시인 이문재는 “일기를 쓰듯이”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원고 청탁에 응하였고, 그리하여 그런 “청탁 불문”의 결과로 나온 이 책 「이문재 산문집」은 90년대부터 최근까지 여러 지면에 실은 수많은 글 가운데에서 오십여 편을 가려 묶은 것이다.
책은 크게 네 묶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첫 묶음은 ‘나는 아날로그다’, 두 번째 묶음은 ‘몸의 노래’, 세 번째는 ‘미래주의보’이고 마지막 묶음은 ‘이 음식이 어디서 오셨는가’이다.
이문재에게 “시와 산문은 아주 가까운 혈연이다.” 그래서 “시작 노트 같고, 시 해설 같기도 하다”고 밝힌 이문재의 산문이 품은 메시지는 한결같다. 그것은 시인으로서의 저자가 오랫동안 견지해 온 시각이니, “반인간적인 문명의 급소를 발견하고, 그 급소를 건드리는” 것이다. 곧, 반인간적인 진화를 거듭하는 산업자본주의 문명의 문제를 시인/선각자의 날카로운 눈으로 통찰하고, 인간다운 삶을 회복할 그 문명의 급소, “이를테면 느림이나 단순함, 걷기, 언플러그드 슬로 푸드, 농업”을 간절한 마음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일기 쓰듯이” 나날의 일상에서 보고 듣고 말하고 마음으로 느끼는 바를 시인의 예리한 통찰로 써나간 이문재의 산문들은, 군더더기 없이 절제된 문장, 꾸밈없고 쉬운 글쓰기로, 때로는 가슴 뜨끔하게 또 때로는 오월 논물처럼 따뜻하게 읽힌다. 성실히 살아온 사람의 ‘자기 풍부’를 바탕으로 한, 산문의 미덕이 큰 책이다. “나는 아직 언어의 힘, 문장의 위력을 신앙하고 있다”고 고백한 저자의 말이 이 산문집에 대한 소감으로 그대로 돌아온다.
21세기 도심 한가운데에서 찾은 생태적인 삶, 유능한 ‘일 중독자’에서 느린 ‘산책자’가 되다
유능한 ‘일 중독자’로서 이삼십대를 보낸 저자의 삶은 “이 땅의 산업화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나 비슷한 그 무엇(들)이 정신없이 살았다”는 저자의 돌아봄처럼 그 시기를 지나오면서 저자는 자기 자신과 두절되었다. 그것은 곧 느린 삶, 생태적인 삶과의 단절이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도시의 아들’로 자란 저자는 자연, 아날로그 시대와 디지털 시대의 달콤, 씁쓰름함을 고루 맛보았다. 그러한 비생태적인 삶에서 저자가 살피는 디지털 문명의 그늘들이 서늘하다. 1950년대 말에 태어나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온 저자의 삶이 이 땅의 여느 사람들과 다르지 않기에 저자가 꿈꾸는 생태적인 삶은 더욱 공감대가 크다. 저자가 말하는 생태적 삶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가 가까웠던 날”, “‘나’와 자연이 가까웠던 날! ”, “‘나’가 온전히 ‘나’로 있던 날” 들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해야 하는 또는 할 수 있는 생태적 인식과 그 방편들을 제시한다. 이 책이 ‘느림’을 다룬 여느 책과 다른 점이 있다면 21세기 도심 한가운데에서 찾은 생태적인 삶이라는 점이다. 유능한 ‘일 중독자’에서 느린 ‘산책자’로 “자발적 망명”을 선택한 저자의 삶과 생각이 담긴 「이문재 산문집」은 일분 일초가 아까운 이 시대에 ‘느림’을 평화롭고 지속적으로 자신과 그 일상에 적용한 책이랄 수 있다.
글은, 부채나 에어컨, 골목길, 음식, 휴대 전화, 디지털 카메라, 백화점 등등 주변에서 늘 마주치는 소재에서 비롯하고, 또 각각의 글들이 저자의 체험에서 녹아 나온 글과 생각이어서, 흥미와 공감을 잃지 않으며 독자를 흡인한다. 이를테면, 아이들과 함께 텃밭을 가꾸거나 아흔아홉 칸 송소고택을 찾고, 딸아이와 함께 전주-군산 간 달리기 대회에 참석하거나, 지리산 팔백오십 리 도보 순례를 통해 잃어버린 인간의 속도 ‘시속 5킬로미터’를 찾는 대목 등이 그러하다. 사물이나 현상을 생태적으로 통찰하는 방식이랄지 그 표현이 시적이면서도 정확한 문체로 씌어져, 글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생태적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법도 자연스럽게 익힐 수도 있다.
저자의 통찰력과 문장력은 문단 안팎에서 ‘발문가’로 잘 알려진 이력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책 한쪽에는 소설가 김훈의 산문집 「내가 읽은 책과 세상」에 붙인 저자의 발문도 있다. 저자는, 연필로 원고지를 꾹꾹 채워나가는 소설가 김훈에서 아날로그와 느린 삶을, 「토지」의 박경리 선생이 저자에게 따 준 고추 이야기에서는 생태적인 삶을, 마루야마 겐지에게서는 풍요로운 삶을 건진다. 저자가 지금까지 놓지 않는 꿈이 왜 ‘단순한 삶, 깊은 생각’인지 알 수 있는 대목들이기도 하다.
도시인들이 ‘실천 가능한’ 느림의 전략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생태적인 삶
저자에게는 “인터넷 채팅으로 대화하고, 디카로 세상을 보는 딸아이”가 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만남이다. 이 낯선 만남에 아날로그 세대인 저자의 고민이 있다. 이는 이 시대 많은 아빠의 고민과 다르지 않다. 자신이 도시에서 낳은 아이들에게 인간에 대한 이해와 소통, 자연 친화적인 삶을 ‘선물’하려 애쓴다. 아이들과 텃밭 가꾸기, 딸아이와 전주-군산 간 마라톤 대회, 식솔들과 아흔아홉 개의 방이 있는 송소고택에 간 까닭이다.
저자가 일상에서 찾은 ‘실천 가능한’ 느림의 전략으로, 저자는 우선 ‘걷기’를 든다. 저자 또한 걸어서 출퇴근을 한다거나 ‘지리산 팔백오십 리 도보 순례’에 참가한다. 그리고 잘 먹을 것을 권한다. 저자가 말하는 이 음식은 공장에서 생산된 음식이 아니라 자연이 깃든 순박한 음식을 말한다. “이 음식이 어디에서 오는가. 먹을 때마다 이 질문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 삶의 방식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소개한 음식에는 매생이국, 보리밥 이야기, 봄 두릅, 가을 송이, 가을 전어 등이 있다. 인스턴트 식품의 아버지랄 수 있는 라면에서 ‘느린 삶’을 건져 올리는 시각은 매우 새롭다. 이러한 슬로 푸드에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복원의 길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좋은 책을 읽으라고 권하고, 또 가끔 휴대 전화(전원)를 끄고 자기 ?! 黴탔막? 온전히 돌아가기를 권한다. 이처럼 저자가 책에서 제시하는 느림의 전략들은 지금 당장,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곧 이 책은 속도에 대응하는 ‘느림의 병법서’이자 한 시인의 생태적인 삶에 대한 ‘따뜻한 권유’이다.
느린 삶을 말하는 책, 경쾌하게 읽기
「이문재 산문집」의 각 꼭지는 대부분 원고지 분량으로 십여 매 정도이다. 가장 긴 글도 일곱 장을 넘지 않는다. 십여 분만 집중하면 금방이라도 두세 꼭지를 읽을 수 있어, ‘느림’을 삶의 중요 덕목으로 꼽는 바쁜 도시인들에게 특히 권할 만하다. 시인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과 사물에 대한 생태적인 시각이 독특하다. “산업 사회가 진전하면서, 여행은 급격하게 관광으로 전락 …… ‘사유/참여 하는 시선’은 관광객의 ‘구경/소비하는 눈길’” 같은 구절은 현대 소비 문명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예리하고 명쾌하다. ‘화살 기도’나 송소고택 이야기 같은 가족사에 얽힌 생태 이야기도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다. 이 책이 느림, 생태, 산업 문명의 과잉과 결핍, 디지털 등 읽어내기 만만찮은 주제들을 다루면서도 펼치는 순간 두세 꼭지 훌쩍 넘길 수 있는 이유
강운구의 소나무 사진
책 사이사이에 다큐멘터리 사진가 강운구의 사진을 더했다. 평소 저자의 글에 대해 마음 깊이 지지해온 강운구 선생은 그런 애정어린 마음의 표시로 이 책을 위하여 쾌히 사진을 내준 것이다. 책에 들어간 ‘강운구의 소나무’ 사진은 1993년부터 2002년 사이에 서울 북한산, 경주, 보성, 합천, 영월, 고부 등지에서 찍은 것으로서 아직 세상에 내놓지 않은 소나무 사진도 있다. 한국 문단의 중견 시인으로서의 이문재와 한국 작가주의 사진가 제1세대 강운구를 동시에 만날 수 있기에, 특히 두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놓칠 수 없는 책이다. 글과 사진 면은 따로 배치하여 서로 방해하지 않도록 했다. 글쓴이의 말처럼, “저마다 홀로 서서 마침내 더불어” 사는 셈이다. 흙과 나무처럼 상생하는 두 작가의 어울림이 순하고도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