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경 하나. 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인가
2008년 한 일간지에는 경찰청 교통 담당 총경의 칼럼이 실렸다. 미8군부대를 방문했을 때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미8군부대 내에서는 교통경찰이 없음에도 한국인들 역시 미국인처럼 교통법규를 잘 지키지만, 영내만 벗어나면 한국인들은 교통법규를 위반하기가 일쑤라고 지적한다. 한국인들의 낮은 준법의식과 법 위반에 대한 관대한 처벌이 그 이유로 제시된다. 나아가 칼럼은 경찰서 지구대에서 벌어지는 취객들의 소동과 폭언, 촛불정국에서 벌어지는 시위 등을 대표적인 불법 사례로 제시하며, 이런 불법 사례들을 온정주의적으로 대하는 사법부의 태도를 질타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악법도 법이다’라며 독배를 마셨던 소크라테스의 마음으로 준법을 생활화할 때 선진 한국도 우리 앞에 성큼 다가올 것이다.” 악법도 법으로 받아들이는 사회가 ‘선진’ 사회라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오직 한국에서만 통하는 구절이다. 오죽했으면 2004년 헌법재판소는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는 이 구절의 삭제를 권고했을까. 하지만 2004년 이전에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고, 준법을 실천하기 위해 죽은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적어도 한국에서 소크라테스가 성인인 이유는 준법정신이 투철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준법은 사람들의 필요와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게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절대 명령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법은 반드시 지켜야 할 도덕적 원리이자 절대적인 규범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악법도 법이기만 하면, 준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풍경 둘. 친절한 사법부
2008년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이 되었던, 삼성의 비자금 조성, 조세 포탈 및 경영권 불법 승계 사건 항소심 판결이 내려졌던 날, 삼성 이건희 회장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고 한다. 무표정하거나 병약해 보였던 이건희 회장마저 미소 짓게 했던 법원의 양형 판결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피고인들의 행위는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크지만, 실정법상 처벌의 대상은 아니라며 법리에 따라 재판을 진행하다 보니, 공소 사실에 대한 현행법상 처벌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다른 하나는 국가 경제에 기여한 바가 크고, 신규 고용을 창출한 공로가 있으며, 한국 체육 발전에 기여했으며, 성품, 가족 관계 등에서 특별히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건희 회장 못지않게 아들을 몹시도 사랑했던 한화 김승연 회장 역시 비슷한 이유로 양형을 선고 받았다.
반면, 산업 역군이자 한국 경제 발전의 중추인 노동자들의 경우, 민주화 이후에도 정권별로 1천여 명 이상이 구속되었으며, 수백억 원에 이르는 손해배상소송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그 누구도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는 이름으로 양형을 선고받은 바 없다.
흔히 판사들은 스스로를 ‘법의 입’이라고 일컬으며,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권력도 없다고 주장한다. 오직 법리에 따라서만 해석을 하며, 재판의 결과는 선행(先行)하는 법조문의 내용을 적용한 결과일 뿐이라고 말한다. 법치주의는 인간의 지배가 아닌 법의 지배가 실현되었을 때 완성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창조물인 법은 반드시 인간 의지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사실, ‘법의 지배’라는 용어 그 자체는 수사적인 표현일 뿐이다. 법은 지배할 수 없다. 지배는 행위이며, 법이 직접 행위를 행할 수는 없다. 법 역시 판사들이라는 현실의 사람들을 통해 해석되고, 운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판사들이 모두 천사들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할까? 왜 우리는 판사들이 ‘법’을 실행하는 것 외에 어떤 이익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들의 결정 권한이 자의적이지 않고, 또 그들의 독립성이 결정의 공정성을 보장한다고 생각하는가?
법이 혜택 받은 소수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해 악용될 경우, 법의 지배는 법에 ‘의한’ 지배로 전락하며, 법과 정의는 부유한 사람들만 살 수 있는 상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 풍경 셋. 헌법재판소
헌법재판소의 종합부동산세 판결이 있던 날, 행정부나 의회 모두 헌법재판소의 판결 내용을 해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종부세에 대한 대대적인 완화 혹은 사실상의 폐지를 주장하던 여당은 헌재의 판결을 활용해 여론의 반발을 잠재우며, 여야 협상의 카드로 활용할 기세다. 종부세를 만들었던 과거 여당인 민주당은 헌재의 판결에 아쉬움을 표하기는 했지만,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존중한다고 했다. 이제 여야협상은 국민의 뜻과는 상관없이 헌법재판소가 틀 지운 한계 내에서 진행될 것이다.
민주화 이후 사법부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주목받는 권력의 부서로 등장했다. 쓆당적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정부와 입법부의 법안들은 번번이 헌법재판소에 제소되었으며, 헌재의 판결에 따라 입법이 무효가 되는 것은 물론, 대통령의 탄핵 여부마저도 재판관 아홉 명의 손에 남겨지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를 특징지은 현상은 바로 ‘정치의 무력화’와 ‘정치의 사법화’ 현상일 것이다.
이런 정치의 사법화 현상은 입법부?행정부?사법부의 삼권분립을 통한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한 결과인가?
기본적으로 정치의 사법화 현상은 사실상 정당정치, 민주정치의 실패에 따른 현상이다. 나아가, 정치의 사법화 역시 그 자체로 순수한 삼권분립의 작동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행위자들 사이에서 나타난 전략적 행동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즉, 정치의 사법화 현상은 인민의 의지를 무기력하게 만들거나, 정치적 책임을 무기력하게 하기 위해 나타난다. 독립된 사법부가 그런 가공할 만한 무기가 될 때, 대표와 책임 그리고 민주적 경쟁 원칙은 무기력해지고 민주주의는 위협을 받는다.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
그간,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 간의 이런 대립은 흔히 인민주권이냐 정의냐 하는 추상적 원리 간의 갈등과 같이 개념적 혹은 논리적 용어로 표현되었다.
후마니타스의 신간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는 문제를 그렇게 보지 않는다. 무슨 근거로 입법자들을 과도한 권리를 행사하는 존재로 보면서, 이를 ‘법’, ‘전통’ 혹은 ‘정의’와 같은 신성한 언어와 대비시킬 수 있는가? 판사들이 ‘법’을 실행하는 것 외에 어떤 이익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들의 결정 권한이 자의적이지 않고, 또 그들의 독립성이 결정의 공정성을 보장한다는 말을 믿으라는 것인가? 선출되지 않은 기관의 정당성은 공정성에 달려 있기 때문에, 법원은 불편부당하게 보이거나 최소한 당파적이지 않게 보이고자 한다. 그러나 판사들이 독립적이라 해서 항상 자의적이지 않고 공정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할 근거는 전혀 없다. 판사들의 지배가 곧 법의 지배인 것은 아니다.
“만약 법을 해석하는 일이 독단적인 관료들의 배타적 영역이 되면, 민주주의는 반드시 위협받게 되어 있다.”
후마니타스의 신간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는 한국 사회에서 줄곧 규범적으로 이해되는 ‘법의 지배’ 의미, 견제 받지 않는 견제자로서의 사법부 독립, 정치의 사법화,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조망할 수 있는 출발점이다.
주요 내용 소개
법의 지배의 계보(스티븐 홈즈)
왜 총을 가진 사람들이 총이 없는 사람들에게 복종하는가? 어째서 부자들은 재산의 일부를 자발적으로 내놓으려 하는가? 왜 정치인들은 때때로 판사들에게 권력을 넘겨주는가? 왜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내린 결정을 재력도 무력도 없는 판사들이 뒤집어엎거나 방해하도록 허용하는가? 왜 그들은 때때로 판사들이 공무원들을 감옥에 보내는 것을 허용하곤 하는가?
권력을 가진 정치 행위자들이 법의 지배를 촉진하거나 저지하는 이유를 법을 준수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 때문이라는 점을 중심으로 법의 지배가 출현하게 된 과정을 제시한다.
권력, 규칙 그리고 준법(이그나시오 산체스 쿠엔카)
법치국가에서 복종과 의무(미셸 트로페)
법의 지배는 무엇이며, 법에 의한 지배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정치의 세계를 구성하는 구성적 규칙과 게임의 규칙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왜 정치의 세계에서는 준법이 문제가 되는가?
사람들은 대체로 “인간이 아닌 법에 의한 통치”를 실천에 옮기는 것이 법의 지배의 핵심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이는 매우 모호한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통치는 법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법을 운용하는 제도들은 사람들로 채워져 있으며, 법은 이들의 해석에 의존한다. 법에 의한 통치란 통치자들이 법률이 정한 바에 구속되어 있다는 것, 즉 통치는 인간이 하더라도 그 통치 행위는 법률에 따른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 점에서 루소가 이야기하듯 법은 언제나 강자와 부자들의 도구이다. 법은 정치 지배자들과 가장 부유한 시민들이 자신들의 공동 이익을 위해 맺는 합의를 성문화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권력과 부가 어떻게 분배되느냐는 사회에 따라 그리고 같은 사회라도 시대에 따라 다르다. 권력과 부는 소수가 독점할 때도 있지만, 널리 분산될 때도 있다. 앞의 경우에는 노골적인 종류의 법에 의한 지배가 득세하는 반면, 뒤의 경우에는 좀 더 공정한 법의 지배가 출현한다.
“민주주의의 정치적 토대와 법의 지배”에 대한 발문(배리 웨인개스트)
정당은 왜 선거 결과에 복종하는가?(아담 쉐보르스키)
법의 힘은 규범적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시민들과 공직자들이 법에 복종하는 것은 법에 복종해야 할 의무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공직자들이 법에 복종하는 것은 그럴 만한 유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유인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민주주의가 존립하려면, 최소한 한 가지 규칙에 대해서만은 복종해야 한다. 그것은 어떤 정당이 정부의 공직을 차지할 것인지를 적시해 놓은 규칙이다. 그렇다면 선거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정당들은 어떤 조건에서 선거 결과에 복종하는가.
법과 규칙을 준수하도록 강제하는 시민 문화, 정부의 법 위반에 강력히 처벌하고자 하는 시민사회 내에서의 합의, 그리고 일치된 행동이 통치자로 하여금 법의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하는가(웨인개스트), 아니면 법과 제도적 규칙을 따랐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법의 지배를 보장하는 요인인가(쉐보르스키).
법의 지배에 대한 다수제적 해석(로베르토 가르가레야)
견제와 균형에 체계, 그리고 독립적인 사법부에 의해 보호되는 확고한 개인의 권리로 특징지어지는 자유주의 정치 체계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좀 더 다수제적인 민주주의를 향한 일체의 움직임을 법의 지배에 대한 위협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다수제 민주주의는 경솔한 결정을 내리며, 소수의 권리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법의 지배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좀 더 다수제적인 정치 체계를 옹호하는 것은 가능한가.
법의 지배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나(카탈리나 스물로비츠)
기존의 논의에 따르면 법의 지배는 국가권력의 수평적 분할, 즉 삼권분립이나 견제와 균형을 가리키는 “수평적 책임성”, 사회적 힘의 다원적 분산과 정당 간 경쟁에 기반을 둔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부에 대해 대표-책임의 연계가 강화될 때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최근의 논의들은 수평적 책임성과 수직적 책임성의 메커니즘이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통치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며,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그들이 법을 준수하도록 할 것인가.
광범위한 시민 결사, 시민운동, 혹은 언론 매체들이 정부의 비행을 밝히고, 새로운 쟁점을 공적 안건으로 제시하거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정책을 바꾸는 사회적 책임성의 메커니즘을 통해 수평적 책임성과 수직적 책임성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검토한다.
독재와 법의 지배(로버트 배로스)
법의 지배는 오직 민주적인 법체계와만 관련이 있는 것인가? 혹시 다른 형태의 정치체제와도 연관을 맺을 수 있는 독립적인 현상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인가?
칠레의 권위주의 정부는 어떻게 자신들 스스로 제정한 법에 의해 종속되었으며, 나아가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게 되었을까. 권력이 분산되어 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법의 지배의 역동적 효과를 살펴본다.
수평적 책임성의 도구로서 법원(카를로 과르니에리)
사법부의 독립이라는 개념에는 다소 모호한 구석이 있다. 사법부의 독립은 한편으로는 제도적인 독립으로, 즉 판사들이 정부의 정치적 기구에 맞설 수 있게 해주는 보장책들로 이해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판사들의 행위, 즉 판결에서의 독립성을 가리킨다. 물론 판사가 독립적으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원칙적으로 소송 당사자들로부터 (따라서 당연히 행정부로부터도) 독립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판사들이 제도적으로 독립되어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독립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왜 최근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등에서는 사법부의 독립을 강화하고, 이들에게 더 많은 권력을 부여해 온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정치적 결과는 어떠한가.
민주주의의 지배와 법의 지배(존 페레존·파스콸레 파스키노)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는 모두 정치체계의 바람직한 속성으로 알려져 있다. 권위주의적 지배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에 관해 글을 쓰는 학자들은 그런 이행의 목적이 법의 지배를 동반한 민주주의의 확립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하지만, 이 둘 사이의 갈등이 발생하는 경우는 없을까?
나아가,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는 모두 대표와 법관이라는 대리인을 통해 작동한다. 그렇다면, 이 모두에서 나타나는 대리인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전후 유럽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교착 상황과 이를 통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헌법재판소의 권한을 중심으로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 사이의 갈등을 살펴본다.
정치적 무기로서의 법의 지배(호세 마리아 마라발)
삼권분립과 이를 통한 견제와 균형의 원리 속에서 사법부의 권력은 작동하며, 정당화된다. 하지만, 정치의 사법화는 그 자체로 순수한 삼권분립의 작동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행위자들 사이에서 나타난 전략적 행동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가 유지되고 있는 동안에도 정치인들이 민주적 경쟁의 결과를 바꾸기 위해 정치를 사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독립된 사법부가 그런 정치적 전략의 무기가 될 때, 대표와 책임 그리고 민주적 경쟁 원칙은 어떻게 무기력해지고 어떤 위협을 받는가.
몽테뉴의 『수상록』에 나룅난 법의 지배와 사법 개혁의 문제 (비앙카 마리아 폰타나)
법의 지배가 판사들의 지배로 전환되면,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가.
16세기 후반 프랑스 사회의 권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권력이자 독립적이었고 견제 받지 않았던 사법부의 사례를 통해, 법과 정의가 어떻게 여유 있는 사람들만이 살 수 있는 상품으로 전락했는지를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