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성직자들의 자해 행위는 신에게 바치는 의례였다.
사드에게 도착은 자유를 지향하는 혁명과 해방의 묘사였다.
그렇다면 소아성애, 테러리즘이 난무하는 오늘날의 도착은 무엇인가?
프랑 저명한 정신분석가가 밝혀낸 도착의 본질과 그 의미.
『악의 쾌락 변태에 대하여』는 프랑스의 저명한 정신분석가이자 역사학자인 저자가 인간 내면에 감춰진 변태와 도착심리를 역사, 철학, 문학, 심리학을 넘나들며 탐구한 책이다. 중세 신비주의 고행자부터 15세기 아동살인마 질 드 레, ‘사디즘’을 탄생시킨 18세기 작가 사드를 거쳐 아우슈비츠의 살인마들, 소아성애자와 테러리스트에 이르기까지 인류 역사상 존재한 다양한 유형의 도착자들과 그들의 잔혹 행위를 분석하면서 시대와의 관계를 살피고,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천사를 함께 고찰한다.
저자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지속되어 온 인간의 도착적 행위는 단지 일부 ‘사악한 인간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사회 전체를 죽음으로 내모는 페스트적 사건일 뿐이라는 윤리적 선입견은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보기에 이 파괴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욕망, 곧 변태적 심리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공통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사악함이며, 이것이 다른 형태, 특히 예술적 행위로 표출될 때는 얼마든지 숭고한 것으로 변화될 수 있는 창조성의 원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이러한 결론을 섬세하고 성실한 사례 연구와 분석만으로 증명하고 있지는 않다. 들뢰즈, 라캉 등과 함께 프랑스 정신분석학 운동을 이끈 68세대 철학자답게 루디네스코는 우리 사회의 모순과 침묵을 드러냈던 위대한 스승들을 통해 이와 같은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이 책을 신뢰할 수 있게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빅토르 위고와 발자크, 오스카 와일드와 사드 등의 작품 속에 나타난 은밀하고 잡다하기까지 한 도착 행위들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의미화 작업을 통해 자신의 결론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 증명 과정 속에는 성적 인식의 역사와 의미를 탐구한 전 시대와 동시대의 위대한 세 철학자, 프로이트와 바타유, 푸코의 논의에 대한 비판적 수용이 자리한다. 그 다양한 형태와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도착자들을 통해 저자가 보편적이며 초역사적인 담론을 추출해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이러한 비판적 수용의 결과일 것이다.
숭고하고도 비천한 인간 내면의 탐구
도착이냐 아니냐는 악을 즐기느냐 아니냐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도착자란 어떤 사람인가? 그저 악을 행하는 것만으로는 도착자라 할 수 없다. 도착자는 악을 행할 뿐만 아니라 그 행위 속에서 쾌락을 느끼는 사람이다. 즉 도착자란 악을 의식하면서 행하고, 그 행함 속에서 쾌락을 느끼는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악행이 도착 행위인 것은 아니며, 모든 범죄자가 도착자인 것은 아니다. 정신착란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도 도착 행위가 될 수 없다. 같은 의미로 동물의 세계에서는 도착도 도착 행위도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인간만이 즐거움을 위해 300명의 아이들을 성폭행하고 잔인하게 살해할 수 있으며, 단지 유대인이기에 지상에서 살아갈 권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몰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잔인성을 가지고 태어난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신과 대치된 혹은 신과 동등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쾌락이라는 차원만 떼어놓고 볼 때 인간은 모두 잠재적 도착자라 할 수 있다. 살인 충동, 가해 충동, 노출 충동, 지배 충동 등 타인을 통해서든 자신을 통해서든 고통을 즐기려는 충동, 곧 도착의 환상은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는 욕망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그런 충동을 행동으로 옮기느냐 아니냐에 따라, 또 그 가해가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냐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냐에 따라 한없이 숭고해질 수도, 더없이 비천해질 수도 있다. 이 파괴적이고도 잔인한 충동이 예술이나 창의력으로 발산될 때 그것은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환상으로 드러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드다. 18세기를 대표하는 저주받은 작가 사드는 성도착자의 한계를 위대한 작품으로 구현해낸 작가다. 변화무쌍한 계몽주의시대를 살았던 사드는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와의 괴리를 모든 형태의 자유로움으로 풀어냄으로써 사회의 질서에 맞서 대항했던 대표적 인물이다.
계몽주의시대는 과학적 합리, 곧 자연적 순리의 시대였다. 당대에 자위하는 어린아이와 히스테리 여성, 동성애자를 가장 도착적인 인간들로 규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즉 그들의 행위는 자연을 거스르는, 다시 말해 번식의 의무를 거부하는 행위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러한 규정은 좀 더 세분화되어 도착증은 이제 정신의학적으로 분류, 연구되기 시작했다. 모든 비합적리적이고 비순리적인 행위, 곧 모든 비정상적인 행위들을 목록화하여 단속하였고, 번식을 거부하는 자들(자위하는 어린아이와 동성애자)과 사회에 도전하는 자들(히스테리 여성)과 함께 자살 행위를 자행하는 자들을 모두 도착증 환자로 몰았다. 이 시기에 쓰인 『보바리 부인』의 엠마 보바리를 도착증의 화신으로 여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동성애가 도착 행위 목록에서 빠진 것은 겨우 1974년이 되어서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떨까? 오늘날 소아성애를 가장 도착적인 행위로 분류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까? 소아성애자에게 약물을 투여하거나 전자팔찌를 채워야 한다는 오늘날의 관점은 과학만능주의와 생체권력에 대한 맹목적 숭배와 떼어놓을 수 없다. 하지만 과학에 대한, 생체의 권력화에 대한 이러한 무모한 숭배는 맹목적 위생학의 망상이 저지른 나치의 인종대학살처럼 언제 또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다.
중세시대 신비주의자들의 희생의식, 즉 채찍질, 오물 삼키기 등은 악에 대항한 신에게 바치는 의례였다. 사드에게 있어서 도착은 모든 차이를 허물고, 자유를 지향하는 혁명과 해방의 묘사였다. 그러나 동성애자나 히스테리 여성, 자위하는 아이들을 성도착자로 몰아붙이면서 성도착 목록을 만들고 이를 통제하기 시작한 19세기 이후의 도착은 어떠한가? 그것은 개개인의 욕망에 대한 사회와 권력, 그리고 과학의 억압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그것을 그저 막기만 하고 통제하기만 한다면, 인간의 도착적인 측면은 또 다른 분출구를 향해 파괴를 단행할 것이다.
도착, 공포의 대상에서 연구의 대상으로
이 책은 도착적이다. 아니, 도착적이 될 수밖에 없는 책이다. 도착의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도착자들의 변태적 행위를 묘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세 신비주의자들의 속죄행위에서부터 사드의 성적 환상, 아우슈비츠의 집단대학살에 이르기까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행할 수도 없다고 생각되는 행위와 사건들을 이 책은 담고 있다.
고름을 먹는 성녀, 300명의 어린아이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질 드 레, 에뾔티시즘의 창시자 사드의 『쥘리에트 이야기』와 『소돔의 120일』에 묘사된 인간의 변태적 행위들은 소름끼치게 잔인하고, 구역질이 날 정도로 엽기적이다.
질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농가에서 잡아온 어린아이들을 가두어놓고 끔찍한 학대를 저질렀다. 사지를 자르고 장기들을, 특히 심장을 꺼내면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강간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때로는 광분해서 발기된 성기를 움켜잡고 죽은 아이들의 배에 문지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일종의 정신착란 상태에 빠져들면서 사정을 했다. --- 질 드 레, 잔 다르크의 전사에서 아동 살인마로 중에서 p.46
그 다양한 형태와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도착 행위는 보편적이며 초역사적인 담론으로 묶여질 수 있다. 이는 조르주 바타유가 ‘저주받은 몫’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 속에 포함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루디네스코가 이 책에서 특히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계몽주의가 도래하면서 신성을 빼앗긴 도착증을 ‘공포의 대상에서 연구의 대상’으로, 즉 자연 질서와 사회 규범을 위반하는 개인의 행위로 타락시켰다는 것이다. 동성애자나 자위행위자, 성도착자, 시체애호가, 배변음욕자 등의 생명주권주의적 행위를 그저 사회의 상징적 토대를 허무는 일탈로 분류하고 차단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차단의 가장 극단적이고 도착적인 결말은 계몽주의시대를 지나 20세기 초, 아우슈비츠에서 이루어진다. 이에 대한 루디네스코의 분석은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명명을 통해 결국 인간은 누구나 대량집단학살을 저지른 루돌프 헤스가 될 수 있음을 주장한 것에 대한 과학적 뒷받침이기도 하다.
청교도적이고 정숙했던 헤스는 술이나 담배도 하지 않았고, 수수한 작업복을 즐겨 입었으며, 함께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아내를 사랑했다. 하지만 아내는 자녀들과 함께 살고 있는 작은 집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헤스는 어쩌다 한 번씩 가스실에 들어가서 모든 걸 확인하기를 무척 좋아했다. 그는 희생자들이 고통 받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희생자들의 얼굴과 ‘경련 없는’ 시신을 확인하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 학살자의 시선으로 본 홀로코스트>로 중에서 pp.185~186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단지 20세기 초, 가장 끔찍했던 과거에 그치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880년 생체권력으로 탄생했던 멋진 이론이 40년 후 나치주의를 이끌었듯, 현재 자행되고 있는 소아성애자에 대한 약물 투여와 전자팔찌 착용 등은 새로운 아우슈비츠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루디네스코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사회의 저주받은 부분을 감시하고 없애서 투명하게 만들려 하는 사회야말로 도착적인 사회다”라고 결론짓는다.
우리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들춰내다
도착자들이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은 도착이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내면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고, 우리 자신에게도 그런 부분이 잠재되어 있음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 모두의 내면에 은밀하게 잠재되어 있는 이 도착성은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를 부수는 어두운 힘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어찌 보면 도착성은 창조적이고 자기초월적이며 위대하다는 특징을 포함하고 있는 숭고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차원 높은 자유에 다가가기 위한 우리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기도 한 것이다.
이 책은 성적 도착 행위들에 대한 과도한 억압과 거대 산업이 된 포르노그래피가 공존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반드시 고민해 봐야만 할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너무나도 다양한 도착 행위의 ‘역사적 박물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도착의 역사’만을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랜 과거부터 최근의 시기까지 끊임없이 행해지고 있는 다양한 도착 행위와 그 행위의 주체자들을 통해 인간의 변태 심리에 대한 시각의 변천사를 확인시켜주는 한편,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변태 심리와 도착 행위에 관한 윤리적 선입견을 제거하고 그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봐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가히 도착 행위와 도착자에 대한 새로운 위상의 정립이자 인간의 변태 심리에 대한 새로운 의미부여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류가 성적, 정치적, 사회적, 심리적 역사를 두루 관통하면서 반복하고 있는 악의 쾌락과 도착의 역사를 그려 보임으로써 우리는 우리 내면의 도착적 욕망을 인정하여야 하며, 더 이상 그 정당한 권리를 배척하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도착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프로이트가 주장했듯 '승화'를 통해 그 근원을 초월하는 방법뿐일지도 모른다. 사실 도착은 치유를 통해 없앨 수도 없고, 통제를 해서 막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철저한 통제와 포르노그래피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현대 사회가 얼마나 위험하고 도착적인 사회인지를 저자는 경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