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개념사 연구’를 제안하며
한림과학원 『한국개념사총서』는 학술진흥재단 인문한국(HK) 지원사업의 일환으로서 ‘동아시아 기본개념의 상혤먕통사업’을 위해 기획되었다. 철학, 문학, 역사를 비롯한 인문학과 정치, 경제, 사회, 법학 등 사회과학의 기본개념정리를 통해 인문학의 기초연구에 기여하고, 나아가 동아시아 근대 논의의 새로운 담론 지형을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문학의 미래지향적 전망을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한림과학원의 『한국개념사총서』 편집위원회는 한국 인문?사회과학 개념들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를 19세기 중엽으로 설정한다. 이로부터 1950년까지 100여 년 동안 한?중?일 동북아 3국은 유럽의 이질 문명을 만나 새로운 개념의 충돌, 투쟁을 경험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충돌의 혼란은 냉전체제 아래 지속되어 과거완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에서 개념사 정리의 당위성은 강조된다. 기본개념들에 대한 정확한 인식 없이 비학문적인 방법으로 무분별하게 사용되어 학문적 혼란이 가중되었고, 그간 오해되고 굴절되거나 사라진 개념들에 대한 학문적 통찰이 이루어지지 않아 많은 혼선을 빚어 왔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 인문?사회과학 개념의 인식 및 복원은 인문학적 토대를 다시 세워 ‘전체의 역사’를 시도하는 방대한 작업이다. 한마디로 ‘개념사 연구’란 21세기 인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총서 발간과 더불어 한림과학원은 개념사 연구의 서장을 열고 학계의 분위기를 고양하기 위하여 반연간지 『개념과 소통』을 발간한다. 그 창간호(2008년 여름)에는 「번역과 국제정치학』(김용구/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장), 「번역과 근대 한국』(김효전/동아대학교 법학과 교수), 「한국에서의 ‘민족’ 개념의 형성』(박찬승/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 국가 개념의 전통 연구』(박상섭/서울대학교 외교학과 교수), 「프랑스의 역사 연구와 개념사』(고원/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 등 향후 『한국개념사총서』를 집필할 학자들의 연구논문이 실려 있다.
2. 개념이란 무엇인가
『한국개념사총서』 편집위원회위원장인 김용구 교수는 그의 논문 「번역과 국제정치」에서 다음과 같이 개념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개념은 특정한 사회현상을 인식하는 단어들 속에 함축된 여러 역사적 의미와 경험들이 하나의 단어로 응축되어 그 사회 구성원들이 타당하다고 인식하는 경우에 발생한다. 모든 정치 명분이 그러하듯 개념도 그것을 사용하고 주장하는 집단이나 계층의 가치관을 반영하지만, 사회 구성원 전체의 명분으로 합리화하여 표상한다. 따라서 개념은 그 출발부터 사회운동의 성격을 띠게 마련이다. 어느 역사적 시점에서 새로이 발생한 개념은 기존의 개념과 대립하여 다시 새로운 개념의 탄생을 예고한다. 개념은 장소(topos)와 시간(tempo)에 따라 상이하게 된다.”
시간과 맥락의 변화에 따라 새롭게 만들어지고 변용되기 마련인 ‘개념’은 유럽과 비유럽 지역의 개념 분석 방법론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개념 연구의 시각은 비교문명권의 입장에 입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번역’의 형식을 통한 유럽식 개념들은 자기 성찰과 비판의 겨를도 없이 근대 한국의 역사적 파고와 함께 휩쓸려 들어왔다. 19세기 근대 한국의 지성사를 채웠던 그 첫 단추를 이해해야만 하는 대목이다. 이 시기의 개념들은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19세기 중엽 이전 우리 사회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회 현상들이 전파된 현상을 가리켜 우리에게는 생소한 개념들이 있다. 유럽 학문체계의 이런 개념들에 대한 오해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둘째, 19세기 이전에 사용되었던 개념들이 그 본래의 내용이 굴절되어 새로운 현상을 지칭하게 된 개념들이 있다. 본래의 의미와 굴절된 내용이 혼재하게 된다.
셋째, 19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사라진 개념들이 있다. 통용의 중단이 일시적인 것도 있고 다시 부활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이건 스스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배경에는 사회적인 격동이 있다.
이런 점에서 인문?사회과학의 개념은 정치?사회운동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개념사 연구는 정치?사회제도의 분석을 전제로 한다.
이 같은 개념정의를 바탕으로 한림과학원 ‘한국개념사’ 연구 편집위원회는 개념들의 유입을 다룰 때 서구로부터의 일방적 수입이 아닌, 이질적인 문화권 간의 ‘협상(negotiation)’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에 초점을 둔다. 무조건 서구적 시각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동양과 서양의 관계의 변화 속에서 소통의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 그런 시각에서 바라볼 때 ‘한국개념사’ 연구는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맞서 근대성을 성취하려 분투했던 동아시아인들의 노력을 주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작업이다. 또한 전 지구화의 물결 속에서 편협한 민족주의를 넘어 탈근대를 달성해야 하는 동아시아인들의 ‘근대 적응과 근대 극복’라는 이중과제를 실천하는 활동이기도 하다.
3. 한국개념사의 대장정을 알리는 『만국공법』
그동안 개별연구자 차원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던 개념사 연구를 국내 최초로 본격화시키는 『한국개념사총서』는 앞으로 10년에 걸쳐 수행될 방대한 학술 사업이다. 이번 학술 사업은 지난 150년 동안 우리 학문 세계를 지배하고 충격을 준 기본개념 50개 항목을 선정하여 이에 대한 분석을 시도할 계획인데, 그 대장정의 막을 여는 첫 번째 책이 이번에 출간된 『만국공법(萬國公法)』이다.
19세기 말 한때 유행하던 용어인 만국공법은 일본 학계에서 사용하던 국제법이란 호칭에 밀려 학계에서 사라진 진부한 고유명사이다. 하지만 이 말은 이질 문명권의 정신구조들이 서로 충돌하던 19세기 조선 사회에서 서양의 공법과 동양의 예(禮) 질서의 충돌을 웅변적으로 보여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현실 인식적인 개념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한 권의 책으로 동북아 질서에 충격을 던졌다고 말하는 『만국공법』은 과연 어떤 번역서였는가? 먼저 저자는 동양과 서양의 서로 다른 질서 개념을 역사적 배경 속에서 설명한다. 즉, 중국중심주의의 사대 질서와 유럽중심주의의 공법 질서가 충돌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사대 질서를 유지해 온 기본개념은 사대자소(事大字小: 소국은 대국을 섬겨야 한다는 예 관념), 조공(租貢: 소국은 대국에게 조근할 의무가 있다는 관념), 인신무외교(人臣無外交: 제후의 신하들이 다른 제후와 비밀리에 접촉할 수 없다는 관념), 이적(夷狄: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념), 천하(天下: 사대 질서의 명분체계가 타당하다고 인식하는 장소의 관념)라는 개념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이는 19세기에 접어들어 유럽의 공법 질서와 충돌하면서 파괴된다. 19세기 유럽의 국제법이란 유럽의 법이고, 종교적으로는 기독교 법이며, 경제적으로는 중상주의의 법이고, 정치적인 목적에서는 제국주의적인 법을 말한다. 이는 실정법주의, 유럽중심주의, 팽창주의에 입각한 폭력의 규범이었다. 이러한 특징을 갖고 있던 유럽의 국제법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도 유럽의 세계 팽창을 합리화하는 법적 도구로 전락한다. 그리고 사대 질서와 공법 질서의 서로 다른 개념은 1839~1842년 중국과 영국 사이에 발생한 아편전쟁을 통해 충돌하게 된다.
아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린쩌쉬(林則徐)는 서양의 국제법 관련 글을 한문으로 번역함으로써 이제 두 문명권은 번역을 통해 충돌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본격적인 충돌은 미국 선교사인 마틴(W. A. P. Martin)이 유럽 문명권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합리화하는 국제법 이론가인 휘튼(H. Wheaton)의 『국제법 원리』를 『만국공법』이라는 제목으로 한역(1864년)한 이후의 일이다. 마틴은 『만국공법』 영문 서문에서 국제법 지식이 없었던 중국을 돕고자 하는 순전히 개인적인 동기에서 이 책을 번역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서유럽 국제법 이론이 중국에 전파된 이후 중국은 반(半)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번역의 본래의 의미가 굴절되어 새로운 현상을 일으킨 첫 번째 부류에 속하는 개념이 된 경우이다.
4. 19세기 조선 지식인에게 만국공법은 저항의 개념이었다
조선이 중국과 맺어 온 사대교린 질서는 서양 공법 질서에서 명분을 찾은 일본에 의해 부정되고 해체된다. 19세기 조선과 일본의 국제 질서에 대한 갈등은 일단 강화도 조약(1876)으로 마무리지만, 교린과 공법 두 개념의 충돌은 계속되었다. 저자는 강화도 조약은 19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이 만국공법에 대한 지식을 드러냈다는 점에서도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19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은 제국주의의 침탈이 본격화되는 당시 현실세계를 왜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을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저자는 한반도의 장소적 특징인 오지사고(奧地思考)를 거론한다. 무엇보다도 오지의 특징은 외래 개념에 대한 저항과 오해가 그 어느 지역보다 강하고, 이미 지켜 온 개념들에 대한 집착이 강하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의 변모는 당연히 조선 지식인들에게 개념의 갈등과 충돌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교린 질서에 살고 있던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서는 일본이 개념 담론의 세계화에 박차를 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사대 질서에 살고 있던 중국은 사대 질서의 개념들을 서양 공법 질서의 개념으로 전환시키려고 해서 충돌하게 된다. 이에 유길준(兪吉濬)은 조선과 중국의 관계는 조공 관계와 더불어 근대적인 국제법 관계를 공유하는 이른바 두 개로 접혀 있는 ‘양절체제(兩截體制)’이기 때문에 조선은 결코 속국이 아니며 당당한 독립국가라는 천재적 직관으로 중국 정책에 저항하였다고 평가한다.
이런 점에서 조선에서 만국공법은 기본적으로 사대 질서를 파괴하는 정치운동의 개념이 되었다. 따라서 사대 질서를 옹호하는 반대 세력으로서는 정치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19세기 조선이 바야흐로 서양의 개념에 대한 저항의 장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1880년 유원식이 『조선책략』을 비판하는 상소를 한 것을 필두로 영남 만인소의 상소, 황재현과 홍시중의 상소, 이항로의 문하생 홍재학의 상소 등이 연이었다. 하지만 세계사의 흐름을 거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서양 열강과 수호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파행적으로 세계 질서에 편입되었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이제 새로운 국제정치 질서에 대처하고자 공법을 논하게 되고, 지석영과 변옥의 상소를 시작으로 개화파 인사들은 공법의 적극적인 도입을 제창하고 나선다. 사대 질서의 세계에 서양 공법 질서에서 통용되었던 이질적인 개념들이 무차별 전파되어 두 질서의 개념들이 투쟁하게 되었고, 투쟁의 대표적인 현상은 조선에서는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대립으로 나타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