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위한 ‘이야기 서양 미술사’
『이야기 청소년 서양 미술사』는 고대 그리스ㆍ로마부터 오늘의 미술까지 서양 미술사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이다. 미술사 입문자들이 꼭 알아야 할 사조와 양식, 대표 미술가와 작품을 소개하되 그들이 탄생한 배경과 발전하고 쇠퇴하기까지 과정을 자세하게 들려줌으로써 독자들이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고 즐길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매력은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한 편의 긴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듯 당시 상황을 속도감 있지만 구체적으로, 현장감 넘치게 그려낸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미술사를 공부했다기보다 아주 먼 곳에서, 긴 시간 여행을 하고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위대한 화가들 곁에서 그들의 질곡 많은 삶과 작업 과정을 낱낱이 지켜보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고와 양식이 또다른 무엇으로 옮아가는 것의 필연성을 이해하게 함으로써 역사의 흐름을 체화하게 해준다.
이 책을 쓴 박갑영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다섯 번의 개인전을 가진 화가이면서 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현직 교사이다. 하루의 대부분을 학생들과 함께하며 어떻게 하면 좀더 재미있고 생생하게 미술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를 궁리하는 일이 그의 직업인 셈인데, 이 책에 그 오랜 고민과 그가 찾은 작은 실마리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 책을 쓰게 된 것도 학교 현장에서 미술 수업이 도외시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다가 책을 통해 학생들에게 서양 미술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들려줘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이 가장 큰 중점을 둔 것은 눈높이를 맞추는 일이었다. 미술을 낯설어하는, 미술사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미술 창작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아름다운 행위인지, 그것은 사회와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 역사는 어떻게 모양을 바꾸며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것을 통해 지금 여기의 우리를 어떻게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 호소력 있게 들려준다. 미술사를 공부할 때 중요한 것은 특정 양식이 태어나고 작품이 만들어지고 역사가 바뀌게 된 ‘사건’을 아는 일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변화한 인간의 사고와 태도이며, 그것이 바로 미술사를 공부하는 이유이자 본질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 뒤에 숨은 수많은 이야기
앞서 언급했듯 이 책의 가장 기본적인 접근 방식은 ‘이야기’이다. 모든 것에는 이야기가 있고 더 많은 이야기를 알수록 그것을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그래서 지은이는 들려준다. 거대한 신전들과 하늘 높이 치솟은 교회 첨탑들과 유럽의 도시들을 황금빛으로 물들여놓은 화려한 궁전들과 거친 붓질, 어두운 색조, 뒤틀린 형상들 뒤에 도사리고 있는 놀라운 이야기들을. 정치와 종교 같은,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이동이 미술의 흐름을 어떻게 바꿔놓았는가에 대한 이야기도 그중 일부이다.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이 서양 미술의 뿌리로 자리 잡은 것은 로마 황제의 강력한 힘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고, 모든 예술 활동이 종교의 틀 속에 담기게 된 것은 권력의 중심이 교황에게로 넘어간 것이 계기가 되었으며, 다시 왕과 귀족이 힘을 가지면서 그들의 화려하고 과시적인 문화가 번성했고 보헤미안들의 자유분방하고 도시적인 취향이 성행한 것은 시민혁명을 통해 사람들의 인식 전환이 이뤄진 덕분이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는 예술문화의 주도권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갔고, 국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미국이 세계 미술의 선두주자가 되면서 다시 한번 미술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그리고 대중과 거대 자본이 문화의 중심축 역할을 담당하게 된 오늘날에는 어느 지역도 문화의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미술시장과 그것을 움직이는 자본이 위대한 작품을 만들고 오늘의 미술사를 만들고 있다.
단 한순간도 미술은 사회와 그 구성원들에게서 동떨어져 있었던 적이 없다. 결국 미술작품이란 그때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그 시대에 관해 가장 많은 것을, 어쩌면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거울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사실인데 미술을 어렵다고만, 나와 무관한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낯설기만 한 이야기이다. 『이야기 청소년 서양 미술사』에서는 ‘역사에서 배워요, 아트 인 히스토리’ 섹션을 마련하여 독자들이 미술과 사회, 미술과 역사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또한 큰 장이 끝나는 지점에는 ‘정리해봐요, 아트 브리프’라는 장을 만들어 각 시대를 대표하는 양식과 대표 미술가, 대표 작품을 도표로 보여주고, 연대표를 통해 당대의 주요 사건들과 함께 미술세계에 벌어진 일들을 시간 순서대로 비교하며 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미술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소위 ‘천재 예술가’들의 위대한 업적을 칭송하는 대신 지은이는 그들을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곤경과 열정과 성취에 공감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을 진정으로 알아가게 한다. 사회의 비난과 편견 속에 외로웠을 화가들의 처지에 함께 안타까워하고 그들의 혁명적인 생각들의 가치를 대변하며 오늘 우리라면 어떻게 반응했을지 되묻기도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조금씩 배워가듯 그들을 헤아리고 그들에게 가깝게 다가서게 해준다. 미술은 소수 천재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같은 인간의 손에서 태어난 것이며, 오늘날 높이 평가받는 사상이나 양식들도 당대에는 폄하를 받았다는 사실, 그런 핍박을 견뎌내고 끊임없이 상상하고 표현한 그들이기에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같은 인간으로서 그들의 발자취를 되짚고 그 의미와 가치를 환기시키며 우리가 그들과 함께 숨 쉬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다. 그렇게 이 책은 독자들에게 미술에서만 얻을 수 있는 벅찬 감동을 되찾아준다.
피카소에 대한 오래된 오해, 미술은 어렵다는 편견
흔히 사람들은 형상을 알아볼 수 없고 비현실적인 느낌이 강한 추상미술을 보고 “피카소 그림 같다”라고 말한다. 피카소를 난해한 현대미술의 대명사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런 편견이 피카소의 전체를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며, 그의 초기 유화와 데생이 소년의 그림임을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완벽한 묘사력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한다. 완전히 입체주의로 접어들기 전, 즉 청색 시대나 장밋빛 시대까지만 해도 피카소의 그림에는 구체적인 형상이 살아 있었고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명확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물을 기하학적으로 바라보고 표현한 세잔의 작품과 아프리카 흑인 조각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는 사물의 본질을 담기 위해 형체를 해체하고 그간 이어져 내려온 미술의 상식과 전통을 깨끗이 저버리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피카소에 이르게 된 것이다.
피카소를 둘러싼 우리의 오랜 오해처럼 미술이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된 계기를 찬찬히 살펴보면 미술은 무조건 어렵다는 편견을 의외로 쉽게 깰 수 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산업혁명과 기계문명의 발달, 현대화를 거치며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고급문화 개념은 점차 무너져갔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진정한 가치로 여기는 풍토가 미술가들 사이에 조성되었다. 이와 함께 눈에 보이는 작품이 아니라 아이디어 자체를 중요시하는 개념미술이 등장했고 추상미술 이후 미술에 거리감을 느끼던 대중은 현대미술을 더욱 난해하고 복잡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카소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결과물만 보고 속단하기 전에, 미술가들의 사고 발전 과정을 살피고 그들이 담아내고자 했던 메시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작품 속에 숨겨진 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은이는 이야기한다.
미술가들이 작품을 만드는 것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이다. 누군가와 나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그럼으로써 소통하고 싶어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근본 욕구이기 때문이다. 수천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미술과 사회가 분리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사람과의 소통을 원하지 않는 미술작품 또한 없을 것이다. 다만 원활한 소통을 위한 매개나 창구, 우리의 편견을 불식시켜줄 강력하고 믿을 만한 안내자가 부족했던 건 사실일는지 모른다. 이 책 『이야기 청소년 서양 미술사』가 이제 그 빈자리를 메우고자 한다. 흥미진진하고 감동할 거리가 충분한 서양 미술사의 긴 시간 여행에 이 책이 든든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