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 미국의 패권주의 탓으로만 돌릴 것인가?
9.11테러 사건이 벌어진 지 꼭 1년이 지났다. 세계의 눈은 온통 중동으로 집중되었고, 우리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중동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미국에 의해 테러국으로 지목당한 중동이었지만 그 원인을 두고는 세계화를 내세운 미국의 패권주의 때문이라거나, 이슬람권을 고립시키려는 미국의 정책에 대한 반발 때문이라는 지적이 우세했다. 즉 미국의 책임론에 무게중심을 실은 촘스키적 시각이 힘을 얻었다. 하지만 이번에 도서출판 나무와숲이 출간한 버나드 루이스의 『무엇이 잘못되었나 - 서구와 중동, 그 협력과 충돌의 역사』는 이슬람 세계의 내부에 확대경을 들이대고 그들의 잘못을 군사, 정치 사상과 관습, 경제, 사회, 문화에 걸쳐 역사적으로 짚어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하지만 이 책은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2001년 9월 11일 뉴욕과 워싱턴에서 테러 공격이 발생할 당시 이미 출판을 위한 준비가 다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테러 사태의 원인과 여파에 대해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언급되는 내용은 9.11 사태를 야기한 보다 근본적인 역사적 배경, 즉 서구와 중동의 관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기존의 사건과 사상, 감정적 태도 등을 보다 큰 틀에서 설명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또한 일방적인 미국 책임론에서 벗어나 이슬람 내부의 문제는 없는가라는 문제제기를 하므로써 중동문제에 관한 편향된 시각에 균형추를 달아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세계를 주름잡던 이슬람권의 철저한 몰락
알다시피 한때, 그러니까 유럽사의 시대구분으로 중세라 일컬어지던 시기에 이슬람권은 군사, 정치, 문화면에서 가히 세계 최강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중국에서 아프리카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고, 중세문화의 꽃이라 불리는 비잔틴 문화도 그 자양분은 온전히 이슬람 문화였음을 부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세의 유럽 또한 한편으로는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수차례의 십자군 전쟁을 통해 이슬람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지만 번번히 좌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유럽과 이슬람권의 차이는 분명했다. 유럽이 당시로서는 선진이었던 이슬람의 각종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새로운 지식과 기술, 군사력을 개발시켜 이슬람 추격에 나섰던 데 비해 이슬람권은 유럽의 발전된 과학적 기술마저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들에게 서구란 비이슬람만도 못한 미개인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서구로부터 배울 것이 없다”라는 그들의 말은 이러한 인식을 잘 나타내준다.
하지만 이러한 자부심은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이슬람권이 산산조각나면서 추격이 아닌 추월을 당했고, 이 자랑스런 고대문명의 후예들은 어느새 그들의 기업과 기술자들이 수행할 수 없는 사업들을 서구의 기업들에게 위임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버나드 루이스의 표현에 따르면 심지어는 "불과 수십 년 전에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한국의 기업과 기술자들에게 이러한 사업을 위탁"할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슬람권은 이제 가난한데다가 무식하고 힘없는 국가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수세기 동안 번영과 강성함을 마음껏 누렸지만 이제는 세계의 주도권도 상실하고, 게다가 서구 문명의 선도자가 아닌 문하생으로 전락하면서 자존심은 여지없이 구겨졌다. 만신창이가 된 자존심을 부여 안고 그들은 이렇게 외친다. "무엇이 잘못되었나?"하고.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가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내 자신들을 불행으로 내몬 몇 개의 대답을 발견한다. 13세기 몽골의 침략,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통치와 그 역할을 이어 받은 미국의 등장, 또 1948년 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5개국으로 구성된 아랍 연합군이 50만에 불과한 이스라엘에게 패한 경험을 들추며 미국과 유대인의 음모론을 제기한다.
하지만 이같은 대답은 설득력이 없다. 몽골의 침략은 이슬람의 위대한 문화적 업적이 나타나기 이전에 있었던 일이며, 몽골인들은 그야말로 치명적으로 쇠잔해진 이슬람을 멸망시켰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생활, 그리고 미국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것은 곧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힘이 약해서 식민통치를 당했을 따름이지 식민통치를 당해서 이슬람다움을 잃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음모 역시 그렇다. 유대인들은 지난 14세기 동안 기독교권뿐 아니라 이슬람권에서도 거주하면서 두 문명의 한 구성요소로 자리를 잡아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이 잘못되었나”에 대해 이슬람권이 찾아낸 대답은 그 원인을 모두 타인에게 돌리는 안일함을 보인다.
“이스라엘을 비롯한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서구의 발전 모델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동양과 서양 간 세력 구도 변화의 원인이 중동의 쇠퇴가 아니라 서구의 부상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신대륙 발견, 과학적 발전, 산업혁명, 정치적 성숙 등은 서구를 변모시키고 부와 함께 힘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답을 주지는 못하고 있다. 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사람들이 장거리 항해를 시도해 왔던 이슬람 세계의 항구가 아닌 스페인에서 출발하였는가? 그리고 왜 그러한 위대한 과학적 발견들이 경제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더 발전하였던 이슬람 세계가 아닌 유럽에서 나타났는가?” 버나드 루이스의 이런 탁월한 지적처럼 이슬람 불행의 원인은 일단 내부로부터 찾아져야 한다.
정교일치, 여성차별, 근친결혼 등이 이슬람 몰락의 원인
내부에서 찾은 원인으로 많은 이들이 종교, 즉 이슬람교 자체를 탓하기도 한다. 하지만 버나드 루이스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이슬람교가 자유, 과학, 경제 발전에 장해 요인이라고 가정한다면, 현재보다 이슬람이 사회 모든 분야에서 더 큰 영향력을 사졌던 과거 무슬림 사회가 어떻게 이 세 분야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겠느냐?”고 되묻는다.
이슬람주의자 혹은 원리주의자들은 무슬림들이 외래의 관념과 관습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 후진성의 원인이라고도 하고, 반면 근대주의자 혹은 개혁주의자들은 구습을 과감히 타파하지 않고 유지하기 때문이라고 원인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버나드 루이스의 견해는 보다 근본적이다. 즉 서구의 발전을 뒷받침한 원동력이 정치와 종교의 분리, 그리고 종교적 성향을 배제한 시민사회의 발전인데 반해 이슬람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아 인구 절반에 해당하는 사회적 자원을 포기하고 있으며 이는 절반의 무슬림에 대한 교육의 무관심과 비효율성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꼬집는다. 또 사촌 간의 결혼을 허용하는 바람에 열등한 후손들이 태어났고, 지나친 방목과 목축으로 토지들이 황폐해진 점들도 꼽았다. 특히 야만인으로 인식한 서구로부터는 과학적 발전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비무슬림의 땅에 무슬림이 거주하는 것조차도 금기시하여 상대 문명을 파악하는 첨병이라 할 외교까지도 등한시한 것이 이슬람의 몰락을 부채질한 내부적인 요인이라는 것이다.
중동을 바라보는 서구의 시각을 대표하는 책
그러면서 이슬람에 대한 애정 어린 충고로 긴 글을 맺는다. “중동의 무슬림들이 현재의 길을 고집한다면 자살 테러가 이슬람 세계의 상징이 될 것이며, 증오, 자기연민, 분노, 빈곤, 그리고 억압으로 가득찬 추락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조만간 또다시 외세의 지배에 신음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무슬림들이 불평과 피해의식을 극복하고, 각자의 의견 차이를 좁히며, 밝은 미래를 위한 공동의 노력에그들의 재능과 자원을 결집시킬 수만 있다면, 무슬림들은 다시 한번 중동을 고대와 중세에 이어 오늘날에도 문명의 중심지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중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