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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소년이온다+흰 3권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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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저자 소개 (1명)

1970년 늦은 11월에 태어났다.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1993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검은 사슴』 『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영원』,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등이 ... 1970년 늦은 11월에 태어났다.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1993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검은 사슴』 『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영원』,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등이 있다. 만해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동리문학상, 이상문학상, 오늘의 젊은예술가상, 한국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한편 2007년 출간한 『채식주의자』는 올해 영미판 출간에 대한 호평 기사가 뉴욕타임스 등 여러 언론에 소개되고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며 인간의 폭력성과 존엄에 질문을 던지는 한강 작품에 대한 국내외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만해문학상 수상작 『소년이 온다』의 해외 번역 판권도 20개국에 팔리며 한국문학에 활기를 더해주고 있다. 2023년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가 프랑스 4대 문학상 중 하나인 메디치 외국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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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 리뷰

단편과 한국문학에 대한 선입관을 깨는 식물적 상상력의 변주.
이민정(ladyinred@yes24.com)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모으는 친구에게 그 중에 꼭 한권만 추천을 해달라고 했다. 선뜻 『몽고반점』이란다. 왜냐는 질문에 ‘야하니까’라는 다소 싱거운 소리를 내뱉는다. 형부와 처제의 정사라는 소재만 보면 이 싱거운 소리가 수긍이 갈 법도 한데, 무미건조하고 존재감을 내뿜는, 그러면서도 지극히 탐미적인 문체를 읽다보니 그저 주인공 영혜의 차가운 손발과 드러낸 상체가 주는 담담한 해방감, 상상력을 자극하는 색채의 화려하고도 관능적인 이미지에 강렬히 사로잡힌다. 소감을 묻는 질문에 “어, 좋았어. 근데 왠지 이야기가 더 있을 거 같아.” 라고 대답을 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몽고반점을 포함한 연작소설 전체가 담긴 『채식주의자』가 출간되었다.

『채식주의자』는 10년 전 저자의 단편 「내 여자의 열매」의 변주로, 식물적 상상력을 궁극의 경지까지 확장시킨 인물, 영혜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1부인 「채식주의자」는 영혜의 남편의 시각에서 아내가 점차 육식을 거부해 가는 과정과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본인과, 사회, 가족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2부 「몽고반점」은 영혜의 형부의 시각에서 그려진다. 그는 처제의 몸에 남아있다는 몽고반점에 욕정을 느끼고, 이 욕정을 평소 머리 속에 그리다 못해 각인된 관능적 이미지와 결합시켜 비디오 아티스트로서의 작업으로 전환한다. 3부인「나무 불꽃」은 영혜의 언니의 시각에서 그려진다. 그녀는 떠나버린 남편과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하는 생계의 부담, 동생의 부양을 몸으로 겪어낸다. 또한 점점 나무가 되려고 하는, 세상의 시선에서는 점점 구제할 수 없이 미쳐가는, 영혜의 모습을 담아낸다.

몽고반점을 덮으면서 가장 걸렸던 부분은 주인공 영혜가 왜 육식을 거부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모호하게 표현되었던 점이었다. “꿈을 꿔서……그래서 고기를 먹지 않아요.” “무슨……꿈을 꾼다는 거야?” “얼굴.”(-「몽고반점」중에서)” 1부인「채식주의자」에서는 그 꿈과 트라우마가 된 사건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개에 물린 상처가 나으려면 먹어야 한다는 말에 나도 한입을 떠넣었지. 아니, 사실은 밥을 말아 한그릇을 다먹었어. 들깨냄새가 다 덮지 못한 누린내가 코를 찔렀어. 국밥 위로 어른거리던 눈, 녀석이 달리며,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나를 보던 두 눈을 기억해. 아무렇지도 않더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 (-「채식주의자」중에서)

세 단편은 육식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욕망을 버리려고 하는 영혜와 대립되는 주변인들의 욕망을 드러낸다. 평범하게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싶어 하는 남편의 욕망과 몽고반점을 모티브로 한 관능적 이미지와 색채로 표현되는 예술에 집착하는 형부, 삶에 내부가 말라가면서도 부양을 계속해야 하는 언니. 이 대립성에서 식물로 대표되는, 인간이 잃어버린 태고의 순수성에 대한 동경과 어쩔 수 없이 욕망을 품고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동물적인 욕망이 함께 쏟아진다.「몽고반점」에서 영혜는 육체에 바디 페인팅으로 꽃을 담으면서 욕망이 배제된 식물을 지닌 육체가 되고, 그 식물성에서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또한 역설적으로 지독히 동물적인 욕망의 행위로 태고의 순수성으로 돌아간다.

주인공 영혜의 잃어버린 순수에 대한 갈망은 남을 해치지 않는 소극적인 면에서 -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로는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채식주의자」중에서) 궁극적으로 생명을 탄생시키고 지지하며 소멸하는 회귀로 발전해 간다 - 난 몰랐거든.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이제야 알게 됐어.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구. 봐, 저거 봐, 놀랍지 않아? (-「나무 불꽃」중에서)

삶에 치이는 순간순간, 일상의 끈을 놓아버리고 궁극적으로 소멸에 가까운 자연으로의 회귀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던가. 또한 지독히 세속적인 욕망으로 삶에 집착하고 조용한 열정을 불태우는 것 역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영혜는 그 극단에 서 있고, 우리는 범인으로 그 중간을 헤맨다. 작가 한강의 연작소설은 하나하나의 단편으로도 충분히 완결적이며, 연작이라는 형식으로 소설의 폭을 다시 확장하고 다양한 욕망을 보여주면서 또 다른 완결 작을 만들어 간다.

책 속으로

--- 「채식주의자」중에서
---「수의」중에서

출판사 리뷰

추천평

존재의 숙명적 상처와 세상의 근원적 어둠에 대한 처연한 인식에서 출발하여 식물적 상상력으로 그에 대응해온 작가가 도달한 이 새로운 미적 차원은 놀랍고 신선하다. 상처와 어둠의 극한까지 밀어붙여 존재의 처음과 끝, 그 신비로운 근원을 엿보고자 하는 열망으로 도달한 놀라운 상상력의 세계는 우리 소설을 일상과 탐욕의 저잣거리로부터 끌어올려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시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황도경 (『문학사상』 2005년 2월호)

작가는 상처와 치유의 지식체계를 오랜 시간 동안 기록해온 신비로운 사관(史官)이다. 그녀의 많은 소설은 일상의 트랙을 벗어나 증발해버린 타인을 찾아나서는 이들의 움직임을 그린다. 이런 여러 탐색담은 대상을 찾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정상성을 벗어난 인물들을 찾아나선 ‘정상적’인 인물들은 스스로 감추었거나 잊었던 트라우마와 조우한다. 마치, 애초에 그들이 그토록 닿으려 했던 목적지가 그 깊은 상처였던 것처럼.
― 허윤진 (문학평론가)
어둠과 폭력의 세계 속에 상처 입은 존재들을 섬세하게 그려온 한강의 소설이 5월 광주의 시공간에서 벌어진 잔혹한 학살의 참상과 정면으로 마주한다. 증언하는 자의 소명의식과 듣는 자의 상상력이 치열하게 어우러지는 간절한 고백의 서사는 잊을 수 없는 ‘그 도시의 열흘’을 고통스럽게 되살린다. 물방울이 내쏘는 햇빛의 파편에도 눈이 시린 순결한 ‘어린 새’의 흔적을 쫓는 이 소설은 우리가 ‘붙들어야 할’ 역사적 기억이 무엇인지를 절실하게 환기하고 있다.
백지연(문학평론가)
어떤 소재는 그것을 택하는 일 자체가 작가 자신의 표현 역량을 시험대에 올리는 일일 수 있다. 한국문학사에서 ‘80년 5월 광주’는 여전히 그러할 뿐 아니라 가장 그러한 소재다. 다만 이제 더 절실한 것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응징과 복권의 서사이기보다는 상처의 구조에 대한 투시와 천착의 서사일 것인데, 이를 통해 한국문학의 인간학적 깊이가 심화될 여지는 아직 많다. 『소년이 온다』는 한강이 쓴 광주 이야기라면 읽는 쪽에서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겠다고 각오한 사람조차 휘청거리게 만든다. 이 소설은 그날 파괴된 영혼들이 못다 한 말들을 대신 전하고, 그 속에서 한 사람이 자기파괴를 각오할 때만 도달할 수 있는 인간 존엄의 위대한 증거를 찾아내는데, 시적 초혼과 산문적 증언을 동시에 감행하는, 파울 첼란과 쁘리모 레비가 함께 쓴 것 같은 문장들은 거의 원망스러울 만큼 정확한 표현으로 읽는 이를 고통스럽게 한다. 5월 광주에 대한 소설이라면 이미 나올 만큼 나오지 않았느냐고, 또 이런 추천사란 거짓은 아닐지라도 대개 과장이 아니냐고 의심할 사람들에게, 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둘 다 아니라고 단호히 말할 것이다. 이것은 한강을 뛰어넘은 한강의 소설이다.
신형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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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주간우수작 군인들의 총칼에 으스러진 소년이 한 줄기 빛이 되어 우리에게 온다
평점9점 | YES마니아 : 로얄 g********k | 2021-10-02 | 신고

군인들의 총칼에 으스러진 소년이

한 줄기 빛이 되어 우리에게 온다

한강, 소년이 온다(창비, 2014.)를 읽고

 

 

 

한강은 소설 채식주의자(The vegetarian)를 통해 우리나라 최초로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작가로, 일찌감치 한국 현대문학의 기수로 손꼽히던 인물이다. 이렇게 촉망받는 작가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었던지라, 이번 기회에 그녀의 작품이 왜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하게 했는지 알고 싶었다. 이렇게 잘 나가는 소설가가 왜 굳이 우리의 아픈 역사를 소재로 새롭고도 위태한 도전을 하는지도 궁금했다. 1970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난 그녀에게 805월 광주는 쉬이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소설가이자 광주 태생으로서의 한강은, 이 책을 쓰기로 마음을 먹고 책을 쓰면서 무엇을 느꼈을까? 그녀의 생동감 있는 묘사와 섬세한 표현력에 담아내려 한,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는 목적을 지니고 책을 읽으니 더욱 가슴에 와닿았다. 이 책은 장마다 시점과 주인공을 달리 하여 805월의 광주를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했다. , 평상시 우리가 5.18 민주화 운동을 바라보는 관점과는 완전히 다른 미시적 관점에서 이를 재조명한다. 무엇보다도, 현장감 있는 묘사와 살아있는 듯한 표현은 책을 뚫고 나올 것만 같이 뚜렷하면서도 가슴이 아린 것들로 가득하다. 감히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41년전 광주의 봄을, 작가는 충분히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도 소설적인 요소를 가미해, 독자에게 박진감과 감동, 그리고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명저를 남겼다. 나라를 위해 두렵고도 장엄한 걸음을 내딛으면서 하나둘씩 쓰러지던 시민들의 존재만 잊지 않는다면, 이 책은 뇌리에 강한 인상을 심어줄 귀중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17.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이 문단을 읽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쫘악 끼쳤다. 그 이유는, 첫째로 한번도 열사들의 시신을 태극기로 감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둘째로 이것은 열사들이 목숨바쳐 지켜내려한 나라가 결국 그들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에 바로 이어져 나오는 은숙 누나의 명쾌한 대답이다.

17.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이 지점에서 나는 다시 한번 탄복을 금할 수 없었다. 이런 명징한 표현에는 작가가 진정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함축적으로 담겨있는 듯했다. ‘은숙 누나가 말했듯이, 당시 군인들은 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나라의 일부가 아니라, 권력욕에 눈이 먼 장교의 졸개들이었을 뿐이다. 이 장면에서 군인들이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역설함으로써 나라를 위해 투쟁하는 애국열사들의 존엄성과 위대함을 더욱 부각하는 작가의 통찰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76. 바닥에 떨어진 유인물을 주웠다. 굵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학살자 전두환을 타도하라. 그 순간 억센 손이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유인물을 뺏고 그녀를 의자에서 끌어냈다.

학생들의 강한 민주화 요구에도 사복경찰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을 잔인하게 진압하고 탄압하였다. 이 장면을 찬찬히 읽어내려 가며, 문득 KBS 대화의 희열 2이라는 토크쇼 8화에서 80서울의 봄에 관한 자신의 경험과 소회를 밝히던 유시민 작가가 생각났다.

근데 11시 반쯤인가 됐는데 라디오에서 비상계엄 확대 조치가 딱 발표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왔구나. 이제는 덮치겠구나. 이제는 도망가야 해.’ 그래서 우리가 한 대엿 명 정도 있었는데, 남자들, ‘, 도망가자. 이제 여기도 들어올 거야.’ 그러고 문을 타 여니까 밖에서 쇠사슬을 뜯고 있는 거야. (중략) 근데 나오는데 전화벨이 울리는 거야. (중략) ‘여기도 왔어요, 빨리 도망가세요.’ 그러고 끊고 나오는데 딱 잡혔지. (중략) 그냥 이단 옆차기 바로 날아오고, 권총 딱 대고. ‘너 누구야. 이름 뭐야.’ 그냥 유시민이라 그랬지, 뭐라 그래.”

이 소설과 유시민 작가의 이야기는 같은 시기 다른 지역에서 있었던 일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똑같은 일이 전라남도 광주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벌어졌던 것이 805월이었다.

제가 스무살 때 학생운동 이런 걸 하고, 유인물을 뿌리러 다니고, 데모를 하고, 이렇게 시작했을 때, 저는 될 거라고 생각 안 했어요. (중략) 그때 이길 수 있다라고 생각을 하고 하면 못 해. 해야 되니까 하는 거지. 근데 왜 해야 된다고 생각하냐면, 너무 못나 보이잖아, 그냥 있으면. (중략) 못 이길 거 같은데, ‘에이 못 이겨.’ 그러고 그냥 가면, 너무 비참한 거야. (중략) 세상을 이렇게 해서 못 바꾼다는 걸 알면서도,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걸 한다고요. 나를 지키려고요. 내 스스로,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비천하다, 비겁하다 이런 느낌을 안 가지고 살고 싶은 거지. 아니, 내 책임이 아니에요, 유신 체제 이런 거. 나는 그냥 그런 세상에 왔을 뿐인데.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근데, 그냥 가면 그런 감정을 계속 느낄 거 같애, 자기 비하의 감정을.”

군부독재국이었던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에 쓰여진 대로 진정한 민주공화국으로 변모하는 데에 있어서, 그 공을 민주화 운동에 몸소 뛰어드셨던 분들께 돌린다.

 

 

종이도 네 귀를 들어야 바른 이유

 

114.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 양심. / 그래요, 양심. /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 (중략) /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지난 9년간 학교에서 배운 ‘5.18 민주화 운동, ‘박정희 정권이 10.26 사태로 허무하게 막을 내린 이듬해 1980518일 광주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난 민주화 운동으로, 197912.12 군사 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 세력의 주도로, 광주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참극이다. 이 말만 들으면 805월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잘 요약해 놓은 듯하지만, 사실 저 문장에는 광주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학교에서 흔히 배우는 거시적 관점이 아니라, 이 소설에서 제공하는 미시적 관점에서 5.18 민주화 운동을 재해석한다면, ‘1980518일을 전후하여 광주 시민들이 독재 타도를 외치며 일제히 봉기한 민주화 운동으로, 이때 시민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거대한 민중의 한 지체로서 참여했으며, 이는 양심과 민주주의를 향한 갈망에서 비롯된 시민 불복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앞서 언급한 소설의 본문을 통해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한 개인의 심경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 개인은 어찌 보면 나약하고 불안한 인간일지라도, 그들이 모여 하나가 되었을 때 창조해내는 시너지 효과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정의를 례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사회의 변혁이나 개혁을 통해 바꾸고자 하는 것은 어렵고 힘들다. , 그렇기에 용감하고 대담하다. 그렇기에 위대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답을 찾지 못한 질문도 더러 있다. 가령, 한강이 왜 이 책을 집필했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감히 추측컨대, 작가는 독자가 이 책을 읽고 본인의 삶에 대한 태도나 생활 속 행동에 변화가 있기를 바라고 이 책을 집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 자신이, 한강이라는 사람이 805월 고향에서 어떤 비극이 일어났는지, 또 그 비극의 주인공들은 얼마나 미약하면서도 강인했는지를 알리고 싶었기에 이 책을 저술했다고 생각한다.

자칫 잘못하면 무거운 시대극으로만 치부되어 고리타분하고 읽기 힘든 책이 될 수도 있었으나, 작가의 탁월한 표현력과 묘사력은 이 책을 논픽션 보고서가 아니라 소설 그 자체로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었다. 일례로, 2검은 숨에서 는 자신이 죽어가는 과정을 혼이 되어 묘사한다.

57.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 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 /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이 장면에서 한강의 거침없는 표현력을 엿볼 수 있었고, 또 그녀의 상상력에 감동받았다. 죽은 육의 살아있는 령이 자신의 주검을 빠져나와 그것을 보면서 본인의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보통 소설의 전개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 앞서 2문단과 3문단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소설은 독자에게 근현대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을 대하는 새로운 관점을 소개하였고, 개인이 섣불리 하기 어려운 행동을 민중 속에서는 그들 각자가 어떻게 실현하는지를 생생히 표현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 장마다 시점과 주인공이 다르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고, 그러면서도 인물 간의 관계가 복잡하지 않아서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당시 광주의 모습과 개인의 감정에 대한 묘사가 퍽 사실적이어서 책을 읽는 내내 가슴 한켠이 아플 정도였다.

평소에 당신이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와 관계없이, 이 소설은 당신을 푹 빠지게 만들만한 매력이 흘러넘친다. 시대극으로서도, 소설 자체로서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기에 모든 이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표현이 다소 거칠고 끔찍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소설의 사실성을 더욱 드러내기 때문에 오히려 소설에 몰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어린 새에서 라고 불리는 주인공 동호는 군인의 총에 맞아 중학교 3학년 16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말 그대로 군인들의 총칼에 으스러진 소년임에 틀림없다. 2검은 숨에서 서술자이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정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요절한 청년으로 불쌍히 여겨야만 하는 대상은 아니다. 그들은 광주의 민주화,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누구보다도 강한 양심과 행동력을 갖추었던, 우리나라 민주화의 주역들이다. 그런 그들이 2021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성큼성큼 걸어온다. ‘한 줄기의 빛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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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주간우수작 고통과 불안 속에서
평점9점 | a*****4 | 2017-05-26 | 신고

                                                            고통과 불안 속에서

[서평] 한강 저 <채식주의자> (창비, 2007)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p.197)

<채식주의자>책은 연작소설로, 1부 <채식주의자> 2부 <몽고반점> 3부 < 나무불꽃>으로 이루어졌다. 10년 전, 한강의 작품 <내 여자의 열매>의 후속작격이다. 2016년 5월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여 더 관심을 받게 된 작품이기도 하다. 한강은 고통과 불안이 존재하는  삶속에서 느끼는 인간의 실존과 주체성을 늘 주제의식으로 자신의 소설속에서 질문을 던진다.

주인공 영혜는 책속에서 늘 대상화되었다. 1부 <채식주의자>에서는 영혜의 남편이 화자가 되어 어느 날부터 육식을 거부한 채 점점 말라가는 영혜을 바라보며 답답함과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 가족들의 반응이 담겼다. 2부 <몽고반점>에서는 영혜의 형부의 시각에서 소설이 시작된다. 영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예술혼과 성욕을 불태우며 영혜의 몸에 꽃을 직접 그리고 서로 몸을 섞어 정사까지 나누며 예술와 욕망사이에서 갈등하며 열정을 불태우는 형부의 모습이 담겼다. 그러나 인혜(영혜의 친언니)가 두사람의 정사신이 담긴 비디오를 보므로써 결국 예술이 아닌 파멸로 끝이 난다. 3부 <나무불꽃>에서는 인혜의 시각에서 시작된다. 결국 남편은 떠났고, 가족들과 연이 끊긴 채 자신마저 친동생을 버릴 순 없어서 영혜를 정신병원에 수감시켜 보호자로 살아간다. 또한 그녀에게는 아들이 있기에 책임감을 가지고 하루하루 삶을 견뎌나간다. 하지만 영혜는 서서히  미쳐가며 죽음의 문턱에 서게된다.

"아내의 입이 벌어진 순간 장인은 탕수육을 쑤셔넣었다. (중략) 아내는 몸을 웅크려 현관 쪽으로 달아나는가 싶더니, 뒤돌아서서 교자상에 놓여 있던 과도를 집어들었다. "여, 영혜야." (p.51)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만 먹으며 살아가는 자식을.. 부모는 어떻게 대해야할까? 가부장적인 아버지 입장에서는 난감했을 것이다. 비록 어렸을 때 폭력을 휘둘렀던 아버지이지만, 자식이 육식을 거부한 채 몸은 말라가는데..어떤 부모가 가만히 있겠는가?..결국 아버지는 영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뺨을 때리며 억지로 탕수육을 입에 쑤셔넣는다. 이제껐 자신의 소리를 내보지 못했던 영혜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자해를 하게 된다. 겉으로 보기엔 평화로운 가정이지만..가족간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또한 가족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하게 만든다.

영혜는 왜 육식을 거부하는 걸까? 해석에서도 말했듯이 영혜에게 육식은 가부장적인 가정.. 사회에 대한 거부, 저항을 뜻한다. 그녀에게는 자아도 ..말할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이 인간으로서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은 육식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는 영혜뿐만 아니라 현대인들도 자신의 자아가 없이 그저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이를 통해 서로 상처를 주고 받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

성실은 천성과 같았다. 딸로서, 언니나 누나로서, 아내와 엄마로서, 가게를 꾸리는 생활인으로서, 하다못해 지하철에서 스치는 행인으로서까지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p.169)

인혜는 이런 사람이었다. 그저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우리내의 보통사람이다. 부모님을 돌봐야하고 자식들은 키워야 하는..우리 부모님의 모습..나아가 우리들이 걷게 될 미래의 지도이지 않을까? 특히, 인혜에게 연민을 느끼는 독자가 많다. 인혜가 가장 현실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혜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친정 엄마를 생각했다. 가게를 아빠와 꾸려나가야하고 자식들이 오면 삼시세끼를 차려주고 손자손주가 태어나면 돌봐주며 그렇게 가족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친정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책을 읽고 친정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엄마도 엄마 인생을 살아!" "가게도 아빠한테 좀 맡기고 우리들은 신경쓰지 말고 엄마 인생을 좀 찾아" 엄마 왈 " 그러게 말이다..이제껏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본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묵묵히 가게를 꾸려 나가시고 자식들을 챙기는 엄마의 모습에서 좀 더 엄마에게 잘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철이 없는 나다. 이 세상에서 완벽한 사람이 있을까? 완벽한 환경을 가진 사람은 있겠지? 하지만 아무리 완벽한 환경에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내면이 상처도 없고 고독도 없다면 그건 신이겠지.

한강은 부조리한 인간의 삶에서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 같다. 내면의 상처는 누구에게나 있다. 이를 어떤 이는 잘 극복했을 것이고, 어떤 이는 영혜만큼은 아니지만 어떡해든 삶속에서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이다. 고통과 불안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할까? 어떤 욕망을 품으며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나 또한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있고, 어떤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이해하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해할려고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혜의 친정아버지를 나는 이해할 수 있을까?

사회의 성공을 우선시 했던 영혜의 남편.. 비디오 아티스트로서 자신의 열정을 불태우려 했던 형부..이들 모두 주변 사람보다는 자기 중심적으로 행동했다. 영혜 또한. 어쩌면 이들은 속 편할 수 있다. 하지만 인혜는 이 모든 상황과 가족들을 받아드리고 희생하며 살았던 인물이다. 나 또한 아내로서 언젠간 엄마로서 자식으로서 이 모든걸 받아드리고 희생하며 살 수 있을까? 마음이 다소 무거워지는 책이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싶은 독자가 읽으면 좋을 책이다. 아직도 삶은 나에게 어려운 존재이고 가족을 이해한다는 것 또한 어렵기만 하다.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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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주간우수작 삶이라는 폭력, 삶이라는 희망 [소년이 온다 / 한강]
평점10점 | YES마니아 : 골드 j****y | 2016-08-09 | 신고

한강의 소설을 읽기로 결심했을 때 <소년이 온다>는 되도록 나중에 읽고 싶었다. 주로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해 온 작가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사회 문제를 다루기로 마음먹기까지 일련의 과정의 있을 것 같았고 그 과정이 무엇인지 알고 나서 <소년이 온다>를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채식주의자>로 시작해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을 부지런히 읽었고 이제 드디어 <소년이 온다>를 펼쳐들 시간이 되었다. 


1980년 5월 광주, 열다섯 살 동호는 친구 정대를 찾아 합동분향소가 세워진 도청 상무관에 갔다가 그곳에 먼저 와있던 수피아여고 3학년 김은숙, 미싱사 임선주의 부탁을 받고 시신을 관리하는 일을 돕게 된다. 얼마 후 도청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지고, 이들은 시신을 두고 밖으로 나갈지 아니면 안에서 계엄군을 맞을지 고민한다. 계엄군의 총소리가 도청을 중심으로 온 도시에 울려퍼진 그 날이 지난 후, 은숙은 작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게 되지만 검열에 걸려 경찰에게 피멍이 들도록 뺨을 맞는 폭행을 당한다. 선주와 진수는 체포 당시 총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극렬분자', '빨갱이'로 분류되어 성기 고문, ‘모나미 볼펜’ 고문 등 끔찍한 고문을 당한다. 


특별하게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다. 처음 자료를 접하며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연행할 목적도 아니면서 반복적으로 저질렀던 살상들이었다. 죄의식도 망설임도 없는 한낮의 폭력. 그렇게 잔인성을 발휘하도록 격려하고 명령했을 지휘관들. (p.206) 


젊은이들을 죽인 것은 다름 아닌 동족의 군인들이었다. 작가는 집필에 앞서 5.18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읽으려 했지만 두달 여가 지나자 주저하는 마음이 들었다. 다른 아무 것도 읽지 않고 5.18 관련 자료만 읽다 보니 밤마다 군인들에게 쫓기거나 그들이 들이민 총검에 찔리는 악몽에 시달렸다. 꿈이라도 이렇게 공포스러운데 현실에서 같은 일을 당한 사람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들을 유린한 군인들은 과연 어떤 낯짝을 하고 있을까. 작가는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던 군인들이 한 해 전 부마항쟁을 잔혹한 방식으로 진압했던 이들, 베트남전에서 몇백만 명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이들이 아닐까 암시한다. 그리고 이들의 핏줄이 2009년 1월 용산에서, 2014년 세월호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그럼에도 작가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라고 적었다. '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공수부대원이 있었다. 집단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사람을 맞히지 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 도청 앞의 시신들 앞에서 대열을 정비해 군가를 합창할 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외신 카메라에 포착된 병사가 있었다,' (p.212) 작가는 인간의 잔인성을 의심하지 않지만, 잔인성을 강요하는 권위 앞에 굴하지 않고 양심을 지키는 인간도 있다는 믿음 또한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이 시점에 1980년 5월의 광주를 작가가 재조명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p.134)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에 이어 <소년이 온다>를 읽으니 작가가 무엇에 관심이 있고 누구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싶은 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작가는 이토록 잔혹하고 폭력적인 사회를 다름 아닌 인간이 만들었다는 사실에 좌절감을 느끼고 그런데도 인간을 사랑해야 하는지 갈등했던 것 같다. 이로 인해 <채식주의자>에선 육식을 거부하다 못해 스스로 식물이 되기를 택한 영혜를 통해, <바람이 분다, 가라>에선 짐승마냥 자기 욕망에만 충실한 사람들 속에서 바로 살 수 없었던 두 친구 정희와 인주를 통해, <희랍어 시간>에선 말을 잃어가는 여자와 빛을 일어가는 남자를 통해 잔인한 세상에 순응하지 못하고 자기만의 해답을 찾아가는 사람들을 그렸다. 


그렇다면 <소년이 온다>에선 어떨까. 이 소설은 작가의 소설 중 가장 이질적인 느낌이 들지만 외려 작가의 문제 의식이 가장 극대화된 듯하다. 사회는 평온한 일상을 보내던 시민들을 향해 총구를 들이밀 만큼 폭력적이다. 사람들은 집문을 걸어 잠그고 두 귀를 틀어막고 점점 그 사건을 외면하고 잊어버린다. 그런데도 사회의 폭력에 적극적으로 저항한 사람들이 있었다. 차마 저항하지 못했어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작가는 저항했던 사람이나 저항하지 않은 사람이나 이 사회에 거대한 악이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는 한 죽어도 죽지 못하고 살아도 살지 못함을 그림으로써 간접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믿음은 스스로 증명하지 않는 한 미신(myth)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러니 스스로 자신의 존엄성을 증명하라는 것을. 벼른 끝에 이 책을 읽은 마음이 가볍지 않고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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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주간우수작 타인에 대한 책임이 오히려 우리가 바라는 자유와 안정을 가져다 준다
평점10점 | l****1 | 2016-06-19 | 신고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읽었다. 맨부커상을 탔다고 하니, 워낙 신뢰하는 상이기도 해서 읽어본 것이다. 그래서 더욱 놀라고 말았다. 설마 이런 이야기일 줄이야. 3편의 소설로 묶여 있다. '채식주의자','몽고반점' 그리고 '나무 불꽃'. 이야기는 모두 '채식주의자' 영혜를 둘러싸고 벌어진다. 하지만 영혜는 주인공이 아니다. 그녀는 오로지 보여지는 대상, 즉 객체에 불과하다. 3편의 소설은 관찰자를 달리하며 그에 눈에 비친 영혜를 담는다. 처음은 남편이며, 두번째는 형부고, 마지막은 언니다.(형부는 언니의 남편이다.)


 그런데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모두 다르다. 영혜의 남편은 갑자기 채식을 시작하고 점차 나무로 되어가는 그녀에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을 보낸다. 영혜의 형부는 그녀처럼 되고 싶다는 동경의 시선을 보낸다(내가 보기에 그가 영혜에게 보이는 이상 성욕은 분명 존재론적 합일을 향한 것이다. 그는 새를 즐겨 찍는데, 그것엔 자유에 대한 그의 간절한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 그는 영혜가 바로 그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원한다. 그녀를 취함으로써, 그녀가 누리고 있는 자유를 같이 구가하고 싶은 것이다.) 영혜의 언니는 동생의 모습에 자신의 과거 모습을 투영한다. 그리고 유일하게 타자에 대한 책임을 느껴간다. 이렇게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이, 모두 똑같은 영혜를 바라보지만, 얻게 되는 것은 서로 다르다.


 여기서 눈에 띄는 점이 하나 있다. 남편, 형부 그리고 언니 모두 이름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어도 영혜만큼 지속적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보다 '나'로 더 많이 읽게 된다. 고유명사로 존재하는 것은 영혜 뿐이다. 다른 이들은 대부분 보통 명사로 존재한다. 작가는 왜 이렇게 한 것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보통 명사의 존재는 독자가 감정 이입하기 쉽다. 그런 점에서 혹시 작가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들에게 투영하도록 만드는 장치는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사실 그들이 보여주는 반응이란 우리 역시 타인의 변화를 보면서 얼마든지 보일 수 있는 모습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나 역시 소설을 읽으며 객관적인 관찰자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소설의 이야기 속으로 깊이 뛰어든 나를 깨닫게 되었다. 영혜를 바라보는 누군가에게 감정 이입되어 현실 속에서 정말 영혜와 같은 존재를 만난다면 나는 어떡할 것인가를 자문하고 있었다.


 그런 영혜는 결코 정신병자가 아니었다. 그건 영혜의 남편이 그랬듯이, 일상이 견고한 자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상식과 인습으로 무장한 눈에만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그 눈은 현상만 볼 뿐, 근저에 놓인 '왜'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가지는 생활의 불편과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하는 시선만 중요했다. 그러니 영혜의 채식이, 나무가 되고자 하는 소망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결코 볼 수 없었다.


 이것은 어쩌면 일상인의 눈으로 봐서 그럴 지도 모른다. 영혜는 현재 일상의 궤도를 이탈한 존재.  이탈이 각도마저 시간이 지날수록 벌어지고 있다. 일상인의 눈에 비일상이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비춰지기 마련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일상이 그리 견고하지 않은 자들의 눈에는 어떨까? 영혜와 똑같이 일상의 경계 바깥에서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는 자들의 눈이라면, 영혜가 공감과 대화가 가능한 존재로 보일까?


 그 대답의 역할을 맡는 것이 바로 '몽고반점'의 형부다. 여기서 우리는 보통명사로 등장하는 세 사람이 모두 어떤 한 측면을 대변하는 존재란 걸 알 수 있다. 남편과 형부가 일상과 비일상의 시선을 대변한다면, 형부와 언니는 한 존재에 대한 착취와 공감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남편과 형부의 관계는 형부가 남편과 정반대의 존재라는 것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남편은 세속에 찌든 직장인이고, 형부는 현존재의 초월을 포착하고 싶어하는 예술가다. 남편은 일상에 굳게 머무르려 하기에 자신의 일상을 위협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배척하지만, 형부는 일상을 뛰어넘길 원하기에 자신에게 일상을 강요하는 것은 무엇이든 혐오한다.


 그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제 동서라고 부를 필요도 없게 된 그녀(영혜)의 옛 남편의 얼굴을 떠올렸다. 감각적이고 일상적인 가치 이외의 어떤 것도 믿지 않는 듯 건조한 얼굴, 상투적이지 않은 어떤 말도 뱉어본 적 없을 속된 입술이 그녀의 몸을 탐했을 거란 상상만으로 그는 일종의 수치를 느꼈다. 둔감한 그는 그녀의 몽고반점을 알기나 했을까. 알몸의 두 사람을 상상한 순간, 그것은 모욕이라고, 더럽힘이라고, 폭력이라고 그는 느꼈다.(p. 93)


 그런 존재이기에, 형부의 일상은 불안하다. 현재의 일상에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 위에서 그는 늘 위태롭게 서 있다. 그런 면에서 형부는 영혜와 동류(同類)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부가 영혜를 대하는 태도는, 그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 남편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 역시, 영혜의 폐부 깊숙이 존재하는 아픔은 보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영혜의 외부만 취한다. 그녀를 카메라로 찍는 그의 작업은 이 사실을 드러낸다. 그의 일방적인 요구와 그가 원하는 부분의 촬영만 있을 뿐, 그녀의 내면을 헤아리는 대화는 없는 것이다. 형부에게 영혜는 자신이 작업하는 사진과 똑같다. 2차원 평면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영혜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영혜가 누리고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자신이 가져올 수 있을까 하는 것 뿐이었다. 영혜는 그에게 평면 거울이었다. 그것도 진실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거짓을 들려주는 거울. 그 거울에 자신을 비추면 자기가 원하는 모습이 진실처럼 나타났다. 그가 영혜의 육체 위에 꽃을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가상이 영혜에겐 실체가 되었다. 그의 거짓이 영혜에겐 진실이 되었다. 영혜에겐 경계 자체가 없었다. 가상과 실체도, 거짓과 진실도 하나였다.  당연했다. 외부가 나누는 어떤 경계도 영혜에겐 통용되지 않았으니까.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경계는 가볍게 무시되고 그녀에겐 오로지 자신의 질서만 있었다. 두려움도, 의심도 없었다. 무한의 신뢰만 있었다. 현실 세계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 주체. 형부가 영혜에게 본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아름답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육식에서 채식으로, 사람에서 식물로 거침없이 변화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조금의 두려움 없이 훌쩍 넘나들었다. 영혜는 그런 주체만 누릴 수 있는 절대적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그 자유가 한없는 안정 또한 보장하고 있었다. 어찌 매혹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무임승차만 하려 한다. 영혜가 어떻게 해서 거기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그 과정은 보려 하지 않는다. 지금 현존한 결과만 취하고 싶을 뿐이다. 자기가 바라는 것을, 원하는만큼만.

 그래서 그가 영혜에게 하는 모든 일은 착취와 다를 바 없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영혜의 남편과 똑같다. 남편은 영혜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그는 영혜의 존재 자체를 착취한다. 둘 다 영혜의 외양만 취한 결과다. 형부는 한계를 느낀다. 별 짓을 다하지만 영혜에게 조금도 다가갈 수 없다. 마지막까지 그는 결국 베란다를 넘지 못한다. 베란다는 일상의 경계를 상징한다. 형부는 일상을 초월하기 위해 영혜를 욕망했으나, 결국 일상에 고착되고 만다. 어쩌면 당연하다. 그는 자기가 영혜에게서 본 모습을 영혜의 실체로 규정하려 했을 뿐, 영혜라는 존재 자체를 헤아리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의 좌절은 우리에게 다른 시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 준다. 바로 영혜라는 존재 자체를 헤아려야 한다는 것을. 3부인 '나무 불꽃'은 바로 그런 이야기다. 우리가 형부처럼 영혜의 존재를 선망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영혜의 남편도, 형부도 결코 묻지 않았던 질문. 영혜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그녀가 도달한 경지에 대해선 이미 앞에서 말했다. 모든 경계와 욕망을 초월한, 오로지 자신이 만든 경계와 라캉이 말하는 대타자의 욕망이 아니라 순수하게 내면에서 자생된 욕망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절대적 주체라는 사실을. 그래서 온전히 자유롭고, 사람들의 편견과 달리 무한정 안정하다는 것을. 맞다. 그녀는 이미 나무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그녀 존재의 정체가 아니다. 실은 과정이다. 과연 그녀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될 수 있었나?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이다.


 여기서 채식을 시작하게 된 이유가 중요해진다. 그것이 오늘의 영혜를 만든 원점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왜 채식을 하게 되었나? 대답은 우리가 상정할 수 있는 범위를 훌쩍 벗어난다. 왜냐하면 그녀의 채식은 정말 오랜 세월 해묵은 죄책감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어렸을 때의 일이다. 그녀는 자신의 다리를 문 개를 아버지에게 일러바쳐 아주 고통스럽게 죽인 적이 있다. 개가 죽은 뒤엔 어른들과 함께 그것을 먹었다. 자신이 원인이 된 죽음. 그것도 자신보다 약자인 개를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이고도 그녀는 연민이나 애도의 시간도 없이 먹어버렸다. 아마도 그녀의 양심은 그것을 아주 무자비하다고 여긴 것 같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이기적이라 어떤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채색하지만 무의식은 그것의 진실을 제대로 따진다고 한다. 옳은 일을 하지 않았을 경우 우리의 마음이 상처 받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말이다. 영혜도 그랬던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무의식에서 비롯된다는 꿈이 그 기억을 환기시킨 것이 아닐까 싶다.


 조용하고 느리지만 편안한 일상을 영위하던 그녀. 어느 날 갑자기 그녀는 어릴 때의 일을 꿈을 통해 기억하고는 더는 육식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녀는 말한다. 고기의 냄새를 맡을 때조차 자신의 뱃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라온다고. 그건 과거에 자신이 먹었던 개의 육신이며, 거기 깃들어 있는 것은 분명 죄책감이다. 그랬기에 그 기억을 환기시킨 꿈은, 그대로 영혜에 대한 고발과 같았다. 네가 그런 짓을 벌이고도 잘도 편하게 살고 있구나 하는 비난이라고 해도 좋다. 남편에게 오래도록 보여준 침묵은 그 앞에서 그녀가 아무런 변호를 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는 일상을 포기한다.


 채식은 그런 의미다. 더이상 예전 그대로 살 수 없다는 고백. 나아가 그녀는 나무가 되고자 한다. 소설에서 나무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절대적 주체의 상징, 다른 하나는 죽음이다. 후자는 물론 인간 측에서, 일상의 눈으로 바라본 의미다. 그런 시선에게 나무는 움직일 수 없고, 현실 삶을 굴러가게 만드는 욕망도 없으므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비난 앞에서 나무가 되고자 하는 마음은 죽음을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이 초래한 개의 죽음에 대해 책임지기로 한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말이다.


 이제 우리는 영혜가 과거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려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이 책임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는 것이 바로 3부, '나무 불꽃'이다. 여기서 영혜를 바라보는 자는 그녀의 친언니다. 

 

 언니는 영혜를 보면서 자신의 일상과 과거를 복기한다. 1편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언니는 3편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녀 역시 그저 고통을 참고 견디고 있을 뿐으로, 그녀의 남편과 마찬가지로 끝도 없는 삶의 무의미를 체감 중인 것으로 말이다. 그녀는 자살마저 하려고 했다.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그녀는 소설에서 유일하게 영혜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그녀는 남편과 똑같이 허무의 절벽까지 걸어 갔으나, 남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특히 마지막이 그렇다. '몽고반점'의 마지막에서 형부는 영혜를 내버려두고 달아나려 한다. 그러나 '나무 불꽃'의 마지막에서 언니는 끝까지 영혜의 손을 꼭 잡고 있다. 영혜를 마지막까지 책임지려는 듯이.


 3부에서 우리는 언니 역시 영혜처럼 책임지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그 전의, 남편과 형부가 보여준 모습과 정반대다. 사실 이러한 차이는 이미 '몽고반점'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우리는 '몽고반점'에서 형부와 언니 사이에 '지우'라는 아들이 있다는 것을 본다. 소설에서 유일하게 친자식을 가지고 있는 부부다. 하지만 형부는 자기 아들을 돌봐야할 때, 제대로 맡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반면, 형부가 방치한 아들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것은 늘 언니다. 형부는 늘 작업 핑계를 대며 아들을 방치하지만, 언니는 아무리 바빠도 기꺼이 아들을 돌본다.


 바로 이 '책임을 지느냐, 안지느냐'의 차이가 영혜의 존재가 표상하고 있는 '주체가 되느냐, 안되느냐'를 결정짓는다고 할 수 있다. '나무 불꽃'은 이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 준다. 소설이 세 등장 인물들 중 책임을 떠 맡는 언니만이 유일하게 영혜와 같은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마치 이것을 입증하듯, '나무 불꽃'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눈부신 빛을 본다. 빛은 구원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어떻게 언니는 그럴 수 있었을까? 여기서 아들이 그녀에게 말한, 그녀의 사진이 새처럼 날아갔다는 꿈이 인상 깊게 다가온다. 사실 그 꿈은 남편의 소망을 형상화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것은 구원 보다는 절망에 가까웠다. 아들이 그 꿈을 꿨던 순간, 그녀는 자살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 죽으려는 순간, 그녀는 아들의 웃음을 떠올렸고, 그 때문에 자살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기적인 죽음보다, 이타적인 책임을 맡기로 한 것이다. 그 뒤, 돌아온 집에서 그녀는 아들에게서 꿈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녀는 아들을 끝까지 책임질 것을 결심한다. 바로 이 책임이 그녀를 구원으로 이끈 것이었다.


 '한 가지 결정적인 장면이 더 있다. 바로 언니가 보는 가운데 간호사들이 절식하는 영혜에게 튜브를 통해 억지로 음식을 먹이는 장면이다. 그것은 길고도 처절하게 묘사된다. 또한 이 행위는 영혜에게 오직 고통만 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장면은, 영혜에게 트라우마가 된, 아버지가 개에게 가했던 고통을 환기시킨다. 과거의 영혜처럼, 언니도 오래도록 무자비하게 가해지는 고통의 현장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과거가 반복되었다. 분명 이것은 작가가 의도한 것이다.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치뤄야 할 시험이 있고,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겪어야 할 수난이 있다. 이를 흔히 통과의례라고 부른다. 작가는 언니에게 바로 그것을 주려 한다. 영혜처럼 책임을 기꺼이 떠맡는 존재이긴 하지만, 과연 진정 주체가 될 수 있는지 마지막 시험을 치르도록 하는 것이다.


 똑같은 상황에서 과거의 영혜는 보고만 있었다. 그녀가 한 것은 가해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눈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언니는 그러지 않는다. 그녀는 동생에게 손을 내밀고, 끝까지 잡는다. 마지막에 본 빛은 바로 이렇게 해서 찾아온 것이다. 이제 우리는 분명히 알게 된다. 영혜와 같은 절대적 주체는 오로지 책임을 떠 맡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절대적 주체가 무한의 자유와 안정을 구가한다면, 그것 역시 오로지 타인에 대한 무한 책임을 떠 맡을 때 도래 하리란 것을.


 이렇게 소설은 세 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궁극엔 타인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책임을 흔히 구속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부담을 느끼지만,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타인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자유와 안정을 가져온다는 것을, 소설은 놀랍도록 설득력있게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 소설을 읽기 전엔 결코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충격이었고, 그렇지 않아도 소설 속 인물에게 날 깊이 투영하고 읽고 있던 나는 한동안 깊은 여운에 젖어 '나는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자꾸만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시대는 아픔이 보편적인 상황이다. 세월호 참사가 있었고, 강남역 묻지마 살인이 있었으며, 구의역 스크린 도어 기사 사망 사고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흑산도 여교사 특수 강간 사건이 있었다.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충격적인 사건사고 소식을 들으면, 마치 시간이 지날수록 아픔만 더욱 배가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보면서도 우리는 아직도 영혜의 남편이나 형부의 모습을 흔히 취한다. 보려 하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으며, 고치려 움직이지도 않는다. 마치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벙어리 3년인 것처럼 살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영혜의 형부와 똑같이 막연히 누군가 나보다 먼저 나서서 이런 상황을 고쳐주기만 기다린다. 하지만 한강은 '채식주의자'에 실린 세 편의 소설을 통해 분명히 말한다. 그런 식의 태도로는 결코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출구는 오직 하나. 타인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기꺼이 맡는 것밖에는 없다고.


 소설을 통해 마음 깊이 설득 되었지만, 그래도 막상 실천하기 저어되는 것은 거기서 하게 되는 일도, 거기에 이르는 길도 내겐 너무 어렵고 힘들어 보이기 때문이다. 어쩐지 한강 작가에게 '너무 지나친 낙관 아닌가요?' 반발하고 싶어질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대놓고 무시해선 안된다는 속삭임이 자꾸 들려온다. 아마도 소설을 읽으면서 이것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바로 작가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조언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래, 타인에 대한 책임으로 보자면 솔직히 난 아직도 뿌리가 여리고 어린 나무에 불과하다. 한강의 조언에 깊이 통감했다면, 일단 뿌리부터 튼튼히 만들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앞으로도 자극과 성찰을 위해 이 소설을 반복적으로 읽어야 할 듯하다. 지금은 여기까지만 말하자. 솔직하게. 이것이 지금 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지는 태도이기도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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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주간우수작 170. 채식주의자...자기파괴를 통한 죄의식 탈피 몸부림?
평점8점 | k****d | 2016-06-19 | 신고

채식주의자...자기파괴를 통한 죄의식 탈피 몸부림?

 

50평생을 넘게 살아오는 동안 특별한 거부감없이 타인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그저 순응하면서, 때로는 분위기를 맞춰가며 배려?라는 차원에서 혹은 왕따? 당하기 싫어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대세를 따르며 그렇게 보낸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하지만 한강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그렇게 산다는 게 얼마나 허무한 삶인지 깨닫는다. 내 몸이 시키는 바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또한 얼마나 어려운 건지도 알게된다. 제도적 굴레와 관습, 정형화된 생활패턴에서 벗어나려는 영혜의 몸부림과 이를 지키려는 인혜의 처절한 삶, 그리고 또다른 영혜 남편의 쳇바퀴 삶을 유지할려는 의지와 자신의 삶을 뒤늦게나마 발견하고 몸부림치며 벗어나려는 인혜 남편. 이들 4명의 삶을 돌아보는 채식주의자는 쉽게 다가와서 무겁게 막을 내린다.

 

우선, 주인공 영혜를 중심축에 두고 주변 환경을 돌아보는 순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3편의 단편이 모여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고 있는 데, 그중 ‘채식주의자’는 전체 그림을 제공하면서 또한 영혜를 둘러싼 영혜 남편의 입장에서 ‘나’란 일인칭 관점으로, 내가 생각하는 삶의 방식과 아내와 처가 식구들의 행태를 다룬다.

 

소시민으로서의 평범한 삶을 원하는 나는 대다수가 원하는 아주 일반적인 삶의 형태일 수도 있다. 그저 조용하고 평탄한 삶에 무게를 둔다. 하지만 아내의 브래지어를 답답해하는 행동이나 채식주의가 한 점의 불안 요소다. 도화선이 된, 부부동반 회사 모임에서 아내의 돌출 행동은 그의 삶에 오점?을 남긴 이벤트였다. 물론 그 역시 일상을 벗어날 기회?로 아내보다 여성스럽고 다정다감한 처형에 대한 감정을 품었으나 그뿐이었다. 결국 아내의 손목 자해와 함께 그의 일상은 무너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지켜내기 위해 그만의 길을 간다. 타인의 시선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자신의 틀을 지켜내기 위해 사랑과 희생, 봉사 같은 윤리의식은 던져버리고 ‘이혼’이라는 방식을 통해 그의 삶을 이어간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그가 원하던 평범한 삶인지는 모르겠다. 제3자의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이기적인 취향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난 삶의 형태이기에. 정답은 없어도 그가 원하던 제도적 굴레 속에서 지켜낸 것이 무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언급된 건 없으나 그의 삶 역시 더 이상 안정위주의 평온한 삶은 이상향에 그친 게 아닐까 싶다.

 

‘몽고반점’이란 목차로 다뤄진 인혜 남편이야기는 극적이다. 아내의 뒷바라지? 덕분에 일반적인 예술가들의 삶처럼 찌든 생활고를 겪거나 아내와의 불화로 위태위태한 삶 대신, 하고 싶은 것 다해가며 살아가는 비디오아트 작가이자 화가로 명맥을 유지한다. 그 역시 평범한 일상에서 무미건조한 평상심을 유지하고 있던 중 처제의 돌발적인 자해와 그녀를 업고 병원으로 가면서 그의 일상은 변하기 시작한다. 아무런 미동없이 무심하게 보낸 세월 속에서 아내가 던진 ‘20살까지 영혜가 몽고반점을 간직하고 있다’는 기억이 새롭게 예술가적 본능을 깨우고, 갈등의 골 역시 깊어진다. 예술이냐 불륜이냐를 두고 심각한 내면의 고민 끝에 본능과 예술 둘을 거머쥐기 위해 몰입한다. 처제를 향한 적극적인 구애와 의외로 영혜는 그런 형부의 접근을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남편에게서 발견하지 못한 열정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녀의 본능 또한 그동안 육식으로 인해 몸에 켜켜히 쌓인 찌꺼기를 제거하기 위한 식물로 탄생?하는 과정을 경험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자 열정이 샘솟아 자연스럽게 형부에게 온몸을 맡긴다. 이미 그녀에겐 제도의 속박 같은 건 문제되지 않았다. 남편과 이혼한 상태였고, 책임질 아이도 없었으며, 아니 제도권에 안주하려는 모순덩어리?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았으니 믿음 같은 건 저버린 지 오래였다는 표현이 맞다. 꽃을 통해 고스란히 부활을 꿈꾼 그녀에겐 몸뚱이 같은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또한 기존 질서(형부와의 불륜)에 반하는 윤리의식 따윈 개나 줘버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결국 남은 껍데기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기 보다는 철저히 제도권의 모순에 대항할 수 있는 최대의 무기인 몸을 통해 저항하고 있다. 어떻든 화가는 삶의 평화가 한순간 무너질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본능에 충실해 마음이 내키는 바를 따르고 결과적으로 처참한? 삶의 바닥을 경험하게 된다.

 

제도를 벗어난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 가를 처절하게 보여준다. 이또한 그가 원한 삶 이었는 지 의문스럽다. 지극히 평범하게 비록 무심한 세월을 보내온 그였지만 강렬한 열정이 고개를 쳐든 순간 모든 걸 거부할 수 밖에 없었고, 아내보단 처제와의 코드가 맞았다는 생각도 든다. 일상이란 게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마음까지 어쩌지는 못한다. 아들 지우를 보고싶다는 울부짖음은 오래도록 그를 기억하게 만들지만 한 번의 열정은 하나의 작품이자 그의 삶 자체로 귀결된다.

 

영혜와 인혜의 뒷이야기를 다룬 ‘나무불꽃’. 우선 채식주의자 및 몽고반점의 결과를 통해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영혜의 이야기는 죽음으로 치닫는 그녀의 불꽃인생이자 해탈을 위한 몸부림이다. 모순된 기성 제도권을 향한 죽음불사는 장엄하기 보단 애처롭고 넘을 수 없는 장벽 같은 것으로 느껴진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같다는 인상도 받는다. 서서히, 그러나 죽음마져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의 찌꺼기를 완전하게 도려내지만 거대한 사회의 굴레는 미동조차 않는다. 오히려 마지막까지 제도에 순응시키려 안간힘을 쓴다. 그것이 의사의 책무이든 병원의 존재감이든 간에. 음식을 거부하는 그녀를 향해 흡혈귀처럼 달려들어 강제로 주입시키려 하는 건 흡사 권위적인 아버지가 그녀 입에 강제로 고기를 넣으려다 자해소동의 원인이 된 것을 상기시킨다. 결과적으로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닌 좀더 빨리 죽음을 재촉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출발은 아주 단순하게, 단지 육식위주의 식단을 채식으로 바꾸는 행위에서 비롯되었으나 이를 둘러싼 기성질서는 채식주의자로 한층 높여 구석으로 몰아가고 전쟁이라도 벌이듯이 강제로 제도의 권위 속으로 끌어들이려 안간힘?을 쓴다. 심지어 왕따는 기본이고 형제라는, 자식이라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자행되는 질서유지를 위한 그들의 단합된? 모습은 비열해 보이기까지 하다. 결코 영혜를 위한 게 아니란 생각이 들 정도로. 오히려 거부감만 더 키운 결과로 나타나고 그렇게 득달같이 달려들던 가족이란 구성원들이 정작 정신병원에 입원하자 외면과 이탈의 조짐을 보인다. 이것이 인간 본성이 아닌가 싶다. 하는 척, 도와주는 척, 의무감 내지 상대를 배려하기 보단 자신들의 울타리 지키기의 일환으로 밀어내기 작전에 동원된? 쇼를 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인혜의 이야기는 고통이란 틀에서 보면, 흔히 당사자가 가장 고통스럽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진실이 아니란 걸 보여준다. 모두 떠난 자리를 끝까지 함께 하며 이꼴저꼴 다 지켜봐야 했던 인혜의 삶이 과연 평범한 삶인가. 우리 자화상을 돌이켜 본다. 보통 바둥바둥하면서도 삶을 지켜내기 위해 애쓰는 게 인지상정. 그러나 그건 차라리 평범함이 아니다. 생활에서 살짝 비껴있는 화가 남편, 채식을 고집하다 자해 및 정신병원, 더 나아가 죽음으로 치닫는 여동생, 그런 동생을 지켜주기 보다는 자신의 길을 가는 제부, 그리고 친정 식구들의 인혜에게 떠맡긴 행동들. 남의 얘기가 아닌 절절하게 다가오는 아픔이 교차된다.

 

올 봄 돌아가신 장인이 치매로 병원을 전전했던 지난 몇 년, 처형과 아내, 그 가운데서도 처형의 역할이 그대로 인혜의 삶 자체다. 맏이라는 이유로 병원비, 병문안, 형제 돌보기, 장모조차 나몰라라 하던 장인에 대한 일거수 일투족을 외면하지 못하고 때로는 지치고 고통스러운 자신의 몸(축농증 수술등)조차 돌보지 않으면서 지낸 몇 년, 고스란히 인혜의 삶과 괘를 같이한다.

 

어떻든 인혜의 삶은 결코 평범을 가장했지만 평범할 수 없었다. 생활비 한 푼 주지않는 남편, 내조의 끝은 보이지 않고, 영혜와 남편의 불륜을 지켜봐야 했던 아픔, 그리고 나무불꽃으로 마지막 삶을 불사르던 영혜를 지켜봐야 했던 인혜의 삶은 어떻게 봐야할까. 자신의 이름으로 살기 보단 언니로, 아내로, 처형으로, 딸로 살아야 했던 그녀의 삶이 다들 그렇게 산다고 말들은 하지만 결코 쉽지않다. 이 한마디로 귀결된다. '그녀의 담담한 목소리는 얼마나 많은 담즙을 세계의 이면에 방울방울 떨어뜨리고 있는가'(P.223).

 

마지막으로 영혜의 삶을 돌이켜보자. 영혜가 채식주의 삶을 시작한 건 트라우마에서 비롯된다. 어린 시절 개가 물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 의해 잔인하게 죽어간 개가 현몽하고, 무책임하고 무덤덤한 남편의 몰인정과 야수성을 지닌 모든 인간의 잔혹함을 떠올린다.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희생시킨 것에 대한 죄의식이 발동한다. 이를 벗어나려는 일환으로 채식만의 식단을 꾸미기 시작한다. 냉장고로부터 육식을 퇴출시키고 심지어 육식국물조차도 거부한다. 자신에게 남아있는 동물의 살을 도려내는 행위를 통해 살아있는 화석의 삶을 지향하면서(P.232). 어린아이의 순수함에 가까워지지만 어느새 죽음의 끝에 다다른다. 식탁에서 고기를 치우면서 시작된 제도권에 대한 항변(육식거부)이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을 초래하고 채식주의자로 낙인찍고 정신병원으로 가두는 등 갖은 횡포 끝에 죽음을 협박?하지만 오히려 죽음을 불사하면서 맞선다.

 

그녀의 외침에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여전히 쳇바퀴를 돌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리없이 식탁 혁명을 가져오고 있다. 웰빙, 직거래, 도시농업등을 통해 육식 위주의 삶에서 채식을 곁들인 자연순응 체제로 변화의 조짐이 감지된다. 지구온난화 같은 대명제 앞에서 대안을 모색하려는 다양한 모습도 펼쳐진다.

 

짧은 소설 속에서 긴 서평이 되었지만 자명하다. 우리 삶 속에서 퇴출시켜야 할 찌꺼기는 무엇인가에 대한 철저한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 수작이다. -주의자로 비록 낙인찍었지만 우리 스스로 -주의자를 향한 발걸음을 재촉하는 촉매제가 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주홍글씨가 각자의 삶 속으로 깊이 스며들어 건강한 삶, 회복하는 삶이 되는 극적반전이 펼쳐지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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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주간우수작 범주화,반지성,그리고 폭력과 죽음
평점8점 | k**u | 2016-06-18 | 신고

이 소설을 읽게 된 동기는 어떤 의미에서 발칙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ㅇㅇ주의자'라고 하는 범주화된 제목에 대한 저항감에서 비롯된 것이니 말이다. 사람을 어떤 특정한 부류에 카테고리화하는 것, 이를테면 문화적 구별짓기와 같이 어떤 성향이나 취향이라는 일견 순수한 것 뒤에 숨어 사회체계와 분리될 수 없는 계급적 에토스(ethos;관습)를 만들어내는 폭력의 한 양식이라는 의미에서 '채식주의자'라는 표현은 반감을 자아낸다.  멀리 갈것도 없이 연작중 첫번째 작품인 <채식주의자>에서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라고 말하는 영혜에게 남편의 직장 전무부인은 즉시 "그러니까 채식주의자시군요?"  "골고루 못 먹는 것 없이 ~(중략)~ 정신적으로 원만하다는 증거죠."라고 한 사람을 범주화 해버리는 장면에서 바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범주화의 폭력성은 요즘 부쩍 회자되고 있는 '반지성(反知性)'으로 연결되어 더욱 고착된다. '우치다 다쓰루(內田 樹)'는 그의 저서 <<반지성주의를 말하다>>에서 "자기주장을 내세우기 위해서라면, 조금만 시간을 들여 알아보면 간단하게 들켜 버릴 거짓말, 근거가 빈약한 데이터, 일리가 있는 해석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사례를 거리낌 없이 구사하는 것인데, 이것이 문제적인 것은 사람들, 혹은 사회를 어떤 한 방향으로 몰아 특정한 집단이나 계급의 이해관계에 복무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그들은 "지식도 교양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하는일'을 하지 않는다. 특히스스로 생각하는 일." 이라고 그 편협성과 타자에 대한 불용이라는 분리적 폭력의 한 양태를 통찰하기도 한다.

 

아마 이 지점이지 않을까 싶다. 스스로 생각하는 일을 멈춘 사람들의 세계, 그러나 맹렬한 지적 정열로 타자를 압도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한 책략만을 구사하는 데 능숙해진 사람들이 넘실대는 세계, 그렇지만 이들 아무도 자신은 범주화, 반지성의 책략을 행사하고 있지 않다고 여기는 세계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코 타자를 이해하려하거나 관용하려 하지 않는다. 영혜의 형부가 기억하는 "감각적이고 일상적인 가치외에 어떤 것도 믿지 않는 듯 건조한 얼굴, 상투적이지 않은 어떤 말도 뱉어본 적 없을 속된 입술"이라고 기술하는 그녀의 남편이나 고기를 안 먹는다는 영혜의 두 팔을 잡고 강제로 입 속에 고기를 쳐넣는 영혜의 아버지에게서 이 일상적인 범주화의 반지성적 폭력을 엿볼 수 있다. 게다가 <몽고반점>에서 처제인 영혜의 엉덩이에 남아있는 푸른 몽고반점으로부터 그녀를 오직 자신의 예술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 이용하는 실험예술가인 형부의 위선과 책략을 발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믿는 지식과 정보에 정열적이다. 그리곤 이 열악한 것들로 상대를 누르는데 열중한다. 상대의 두려움, 공포, 고통은 이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이것이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아버지에게 손찌검, 그 폭력을 뼈속까지 받아들이고 성장했다. 그런 그녀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의 꿈을 꾼다. 꿈 꾸기 전날 아침, 남편은 그녀에게 화를 내며 재촉한다. "제기랄, 그렇게 꾸물대고 있을 거야?"  그녀의 저 침잠해 숨어있던 심연의 그림자, 그 어떤 폭력에도 저항하지 않았던 내면의 분노와 마주케 했던 촉매였을 것이다. "내 잇몸과 입천장에 물컹한 날고기를 문질러 붉은 피를 발랐거든. 헛간 바닥, 피웅덩이에 비친 내 눈이 번쩍였어." 그녀 자신의 이 폭력성과 마주한 순간 더 이상 자신을 지탱하기가 불가능 해진 것이리라. 그녀는 고기를 먹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그녀는 "무엇을 찌르려고 하는지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라면서 더이상 둥글지도 않은 자신의 가슴에서 점증되는 어둠의 그림자에 침전하는 자신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병원 벤치에 앉아있는 그녀의 손아귀에서 목이 눌려있던 새 한마리가 떨어졌을 때, 거기에는  " 포식자에 뜯긴듯한 거친 이빨자국 아래로, 붉은 혈흔이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

 

<몽고반점>은 어떤 의미에서 지옥도를 상상케한다. 불합리하고 음란한 인간의 측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많은 모더니즘 예술을 비롯한 실험예술에서 발견되는 몰인격, 예술의 형식으로 죽음을 포용하는 그것에서. 어떤 인상적인 대상을 영상과 음악을 넣어 편집해 시각적인 작품을 만드는 일종의 실험미술가인 영혜 형부의 시점에서 서술되고 있는데, 나는 그의 지성에서 오직 악마성만을 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정신적 시련을 겪고 있는 처제 영혜를 대상으로 '몽고반점 1 - 밤의 꽃과 낮의 꽃'이라는 영상작품을 찍어대곤, 음란과 예술의 경계, 아니 자기 욕망의 마지막까지를 채우기 위해 '몽고반점 2'를 찍는다. 나무가지와 잎사귀, 꽃이 그려진 영혜와 자신의 몸을 섞는 그 이미지를. 머리만 무거워진 현대의 불안정한 지성,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원시적이고 충동적인 것들로 나아가는 도피와 은둔의 표상, 감각에 호소하는 내용으로 채워지기는 커녕 극도로 인격이 결여돼 있는 그것, 고통스러운 자기부재를 채우려고 타인의 생명을 빨아먹는 악마적 에너지 그것 말이다.

 

<나무불꽃>에 이르러 죽음, 무화(無化), 무의식에 엉켜있는 어둠의 그림자, 그 폭력성에 대항하는 여인을 보게된다. "오랫동안 혼자여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시선으로 차창을 두드리는 세찬 빗줄기를 바라보는" 영혜의 언니 인혜의 시선에서. "모든 이차성징이 사라진 기이한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요양원에 누워있는 동생을 보는 그녀의 고통에서. 그녀는 비로서 이혼한 남편의 열정어린 작품과 일상의 간극이 지닌 의미, 그의 눈에 담겼던 것이 욕정도 광기도 아니라 공포였음을 인식한다. 그네들의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버텨냈던 자신의 모습을 그들을 통해 비춰본다. 영혜와 인혜의 남편, 고통과 공포 그것으로부터의 궁극적인 자유라는 그네들의 동일한 방향은 소멸이다.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자유를 아예포기하는 것 이상의 자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자기가 가진 가장 소중한 대상을 포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자유일테니까. 그래서 영혜가 향하는 곳, 더이상 고통을 받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출발점인 부동(不動)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 뿐이었을 것이다.

물구나무를 서서 뿌리가 내리고 대지에 굳건히 자신을 내리는 나무가 되고있다는 영혜를 보는 것은 그렇기에 참아내기 힘든 아픔이다. 그러나 무화하려는 동생에게 인혜는 말한다. "기껏 해칠 수 있는 건 네 몸이지. 네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그거지.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지." 인혜, 그녀의 구원은 삶의 견뎌냄이리라. 우리네 내면의 저 밑바닥에 있는 어둠의 그림자를 기꺼이 대면하고, 그것의 목소리를 듣고 자기의 실체를 온전히 반영하는 것 말이다. 그것에 굴복할 이유도, 그것을 외면할 것 도 아니다. 마침내 그녀는 바라본다. "초록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 범주화, 반지성, 폭력, 고통, 죽음, 그리고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반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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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주간우수작 한강,[채식주의자] - 무기력하지만 또렷한 사색
평점8점 | q******s | 2016-06-14 | 신고

읽고 사색하는 시간

 

아이가 아프고 난 후에는 어른스러워진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아프고 난 후에 자란다는 말은 어른도 마찬가지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같은 고통의 합리화가 아니라 좀 더 나은 나를 위한 고통의 사색을 말하고자 한다. 성숙해지거나, 성장한다는 의미부여로 현실의 아픔이 잊히는 건 아니다. 최근 이슈가 되는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보는 며칠간 온몸에 힘이 빠지는 무기력을 경험했다. 소설을 읽을수록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흡입력 때문에 계속 읽을 수밖에 없었다. 무기력에 감기몸살과 식중독까지 앓는 덕분에 소설을 제대로 숙독할 수 있었다. 무기력하고 아픈 몸으로 할 수 없는 일이 많아지자 자연스럽게 소설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가족이란 주제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책을 덮고도 가족과 개인에 대한 생각은 무기력한 몸에서 천천히 싹을 틔웠다.

 

<채식주의자>에서는 한 가족의 구성원들, 개인의 현실적 아픔을 훑어보게 한다. 가족 안에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일상을 보여준다. 서로의 영향권에 존재하는 소설 속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소설을 읽는 독자는 일상의 내밀한 연결고리에 익숙함을 느끼면서 생각의 싹이 자라난다. 특히, 가족의 다양한 역할에서 빚어지는 영향을 치밀하게 관찰하고 있다. 언제나 성실한 장녀이자 가장인 인혜, 가부장적 아버지, 모성애의 다른 이면을 느끼게 하는 어머니, 삶의 기준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위 등 다양한 가족 구성과 역할 때문에 개인의 욕망이 상실될 수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가족의 의미, 역할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아니다. 누구도 가족에게서 자유롭지 못하다. 설사 부모나 형제가 누군지 알지 못한다고 해도 자신의 뿌리에 대한 갈증을 해갈할 수는 없다. 가족을 관찰하다 보면 가족의 구조나 역할 뒤에 숨겨진 필요나 희생 등 다양한 가족 관계의 비밀을 알게 된다.

 

그때 그녀가 처음으로 생생하게 의식한 것은 그와 함께 살아온 긴 시간이었다. 기쁨과 자연스러움이 제거된 시간, 최선을 다한 인내와 배려만으로 이어진 시간, 바로 그녀 자신이 선택한 시간이었다.’

 

가족 역할로 인해 억압되는 욕망들을 개인의 책임으로 떠밀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가족의 긍정적 변화를 내세우면서 개인의 인식 변화를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으로 다가갈 수 있다. 차라리 가족 구성원들의 숨겨진 욕망을 각자가 알아서 찾도록 서로에게 여유를 남겨두는 것이 함께 살아가는 지혜가 아닐까. 일상을 살다보면 내 욕망이 우선이냐, 가족 구성원의 욕망이 우선이냐 하는 선택의 순간을 많이 겪게 된다. 자신의 욕망과 가족 공동의 욕망을 구분하고 균형점을 찾아가려면 관찰의 시간이 필요하다. 관찰은 힘겹고 귀찮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를 주기보단 따뜻한 지지를 주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욕망을 먼저 관찰하고 인지해야 할 것이다. 나의 욕망을 알고 활용할 줄 앎으로써 생기는 여유에서 가족 구성원에 대한 여유도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꼭 기억했으면 하는 욕망 사용주의 사항이 있다. 내 욕망이 우선이기는 하지만 내 욕망의 한계점을 스스로에게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 욕망은 끝이 없어서 어느 순간 가족보다 내 욕망에 잠식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욕망을 관찰하게 된 출발점, 함께 잘 살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잊지 않고 나와 가족의 균형점을 맞추어 나가야 한다.

 

소설 <채식주의자>를 읽다 보면 무기력할 정도로 조용한 감정에 빠져들게 된다. 하지만 무기력 속에 담담하고 또렷한 의지를 싹 틔우기도 한다. 그래서 책 읽는 동안 무기력이라고 느껴질 만큼 가라앉은 상태가 계속 되었는지 모르겠다. 조용하면서 나른하지 않은 또렷함이었다. 장남이자, 가장역할 한다고 생각하는 내게는 소설 속 인혜의 삶에서 밑줄을 그으며 많은 공감을 했다. 누군가는 가족 안에서도 각자 독립된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삶의 여러 불안정한 구조에서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도 있고, 아직 독립하기에는 좀 더 시간과 애정이 필요한 사람도 있다. 그래서 무조건적으로 책이나, 홍보물, 강의에서 말하는 이론을 맹신하기보다는 고민하면서 자신만의 맞춤식 여유를 생산해야 한다. 여운이 많이 남는 소설이었다. 특히, 무기력한 감정을 듬뿍 느끼는 시간을 보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우선, 무기력에서 해방되어서 기쁘다.

 

 

저자소개

 

한강 /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계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시가,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만해문학상, 이상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오늘의 젊은예술가상, 한국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재직중이다.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영원>, 장편소설 <검은 사슴> <그대의 차가운 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산문집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등이 있다.

<채식주의자>탄탄하고 정교하며 충격적인 작품으로, 독자들의 마음에 그리고 아마도 그들의 꿈에 오래도록 머물 것이다라는 평을 받으며 한국인 최초로 2016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했다.

 

목차 따라쓰기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해설(허윤진),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 지면

 

공명한 구절 및 느낌

 

p18. 꿈을 꿨어, 라고 아내는 두 번 말했다. 달리는 차창 너머, 터널의 어둠 위로 그녀의 얼굴이 스쳐갔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 얼굴은 낯설었다. 그러나 거래처 사람에게 둘러댈 변명과 오늘 소개할 시안을 삼십분 안에 정리해내야 했으므로, 더 이상 아내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어떻게든 오늘은 일찍 들어가야겠어, 부서 바뀌고 몇 달 동안 하루도 열두시 전에 퇴근한 적이 없었잖아, 라고 잠깐 속으로 뇌까렸을 뿐이었다.

-> 바쁜 현대인들의 애정 실종

 

p19. 그렇게 생생할 수 없어,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분명 내 얼굴이었어. 아니야, 거꾸로, 수없이 봤던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설명 할 수 없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을.

-> 내 안의 외면하던 나

 

p26. 정말이지, 나에게는 이상한 일들에 대한 내성이 전혀 없었다.

 

p43.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 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 스스로 억압? 집착? 벗어나려는 몸부림

 

p44. 처형은 예전의 아내처럼 음식솜씨가 좋다. 딱 부러지게 차려놓은 점심상을 보니 나는 새삼스레 허기를 느꼈다. 적당히 살이 붙은 처형의 몸매, 사근사근한 말씨, 커다랗게 쌍꺼풀진 눈을 바라보며, 나는 내가 잃고 살아왔을지 모를 많은 것들을 아쉬워했다.

-> 정해놓은 기준이 결핍 되는 순간, 불완전한 안정은 쉽게 무너진다.

 

p45. “여기 분양가가 얼마였어요?”

“.....그래요? 어제 부동산사이트에 들어가봤는데, 이 아파트는 벌써 오천만원쯤 오른 거네요. 내년엔 지하철도 완공된다면서요.”

매형이 수완이 참 좋으세요.”

제가 뭐 하는 게 있나요. 다 집사람이 알아서 했죠.”

의례적이며 정다운, 그리고 실질적인 대화가 듬성듬성 오가는 동안 아이들은 떠들고 서로를 때려가며 볼이 미어지게 음식을 먹어댔다.

-> 일상의 현실적 매서움

 

p46. “너 정말 어쩌려구 그러니? 사람한테 필요한 영양소가 있는 건데...채식을 하려면 제대로 식단을 잘 짜서 하든가. 얼굴이 그게 뭐야.”

처남댁도 거들었다.

저는 딴사람인 줄 알았어요. 얘기는 들었지만, 그렇게 몸 상해가면서 채식하는 줄은 몰랐지 뭐예요.”

지금부터 그 채식인지 뭔지는 끝이다. 이거, 이거, 이거, 다 먹어라 얼른. 없어 못 먹는 세상도 아니고 무슨 꼴이냐.”

-> 애정 어린 폭력. 강요, 간섭과 애정의 차이?

 

p78. 그러나 아내의 무엇인가가 그의 취향을 살짝 비껴가 있음을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목구비며 체격이며 사려깊은 성격까지 오래전부터 그가 찾아온 여자의 이미지였는데, 무엇이 부족하게 느껴지는지 딱히 짚어내지 못한 채 그는 결혼을 결심했다.

 

p80. 그는 정 많은 아내의 책임감있는 얼굴을, 숟가락의 약을 쏟을까 조심하며 아들에게 다가가는 신중한 뒷모습을 보았다. 좋은 여자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내는 언제나 좋은 여자였다. 좋기만 한 것이 오히려 답답하게 느껴지는, 그런 여자였다.

-> 좋은 vs 취향

 

p90. 성욕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가만히 바라보고 싶어지는 몸이었다.

 

p99.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아내는 울고 있었다. 그것이 격정 때문인지, 그가 모르는 어떤 감정 때문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 알고 있지 않았을까

 

p103. 그것은 단순한 성욕이 아니라, 무언가 근원을 건드리는, 계속해서 수십만 볼트의 전류에 감전된 듯한 감동이었다.

-> 터부에 대한 접근

 

p104. 그제야 그는 처음 그녀가 시트 위에 엎드렸을 때 그를 충격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단지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 넓은 창으로 모래알처럼 부서져내리는 햇빛과, 눈에 보이진 않으나 역시 모래알처럼 끊임없이 부서져내리고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 몇마디로 형용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이 동시에 밀려와, 지난 일년간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던 성욕조차 누그러뜨렸던 것이었다.

 

p105. 이따금 그녀의 눈이 단지 수동적이거나 백치스러운 담담함이 아니라 어떤 격렬함을, 동시에 그것을 자제하는 힘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p119. 이토록 쉽게 체념하고, 그 체념의 앙금이 우울함으로 가라앉는 아내의 성격이 그를 숨막히게 했다. 그것이 아내의 선하고 약한 면임을,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임을 모르지 않았다.

 

p158. 영혜는 그녀보다 네 살 어렸다. 터울이 제법 져서인지, 그녀들은 자매간에 흔히 볼 수 있는 티격태격하는 갈등 없이 자랐다. 손이 거칠던 아버지에게 차례로 뺨을 맞던 어린시절부터 영혜는 그녀에게 무한히 보살펴야 할, 흡사 모성애와 같은 책임감을 안겨주는 존재였다.

 

p169. 어린시털부터, 그녀는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스스로 감당할 줄 알았으며, 성실은 천성과 같았다. 딸로서, 언니나 누나로서, 아내와 엄마로서, 가게를 꾸리는 생활인으로서, 하다못해 지하철에서 스치는 행인으로서까지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그 성실의 관성으로 그녀는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난 삼월 영혜가 갑자기 사라지지 않았다면, 비내리는 밤의 숲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날 이후 모든 증세가 급격히 악화되지 않았다면.

 

p172. 병원에 자주 드나들게 된 뒤, 그녀에게는 가끔 정상적인 인간들로 가득 찬 평온한 거리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

 

p183. 차라리 눈이 안 보이면 좋겠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누군가 자신의 눈을 가려준다면.

-> 피하고 싶은 삶의 순간들 표현

 

p188. 동생의 굳은 어깨를 흔들고, 억지로 입을 벌리고 싶은 충동을 그녀는 억누른다. 고막이 찢어지게 영혜의 귀에 대고 고함을 지르고 싶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죽고 싶니. 정말 죽고 싶어? 자신의 안에서 뜨거운 거품처럼 끓어오르는 분노를 그녀는 망연히 들여다본다.

-> 가족 간의, 사람간의, 애정에 의해 생기는 분노

 

p192. 그렇게 그녀는 영혜의 운명에 작용했을 변수들을 불러내는 일에 골몰할 때가 있었다. 동생의 삶에 놓인 바둑돌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헤어리는 일은 부질없었을뿐더러 가능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 나 또한.

 

p193. 처음의 얼마 동안은 여느 부부들처럼 그와 크고작은 언쟁을 하기도 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체념할 수 있는 것들은 체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그를 위한 것이었을까. 함께 살았던 팔년 동안, 그가 그녀를 좌절시킨 만큼 그녀 역시 그를 좌절시켰던 것은 아닐까.

-> 체념과 서로 배려하는 것의 차이는

 

p194. 용서하고 용서받을 필요조차 없어. 난 당신을 모르니까.

 

p196. 그때 그녀가 처음으로 생생하게 의식한 것은 그와 함께 살아온 긴 시간이었다. 기쁨과 자연스러움이 제거된 시간, 최선을 다한 인내와 배려만으로 이어진 시간, 바로 그녀 자신이 선택한 시간이었다.

-> ...

 

p197.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p204. 지우가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 그녀를 웃기고, 그녀는 문득 멍해진다. 어떨 때는 자신이 웃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더 웃기도 했다. 그럴 때 그녀의 웃음은 즐거움이라기보다 혼돈에 가까울 테지만, 지우는 그렇게 그녀가 웃는 모습을 좋아한다.

(...) 그녀가 웃을수록 지우는 익살의 강도를 높인다. 마침내는 언젠가 통했다고 기억되는 모든 웃음의 비법들을 동원한다. 어린아이의 그런 필사적인 노력이 오히려 그녀에게 죄책감을 일으켜, 그녀의 웃음이 결국 흐려져버린다는 것을 지우가 알 리 없다. 

 

해설

p223. 의식의 퓨즈가 나가는 편이 덜 고통스러운가, 의식의 퓨즈를 잇는 편이 덜 고통스러운가.

 

p226~227. 누군가는 그를 동물이라고 부를지 모른다. 그렇다. 우리는 동물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호모 사피엔스라고 불리는 하나의 종()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꾸만 잊는다. 종의 연대기적 계보와 무관하게 흘레붙는 개들을 보면서 막연하나마 욕지기가 치밀어오르고 불쾌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런 장면이 우리의 무의식적인 욕망의 누선을 건드리기 때문인지 모른다.

 

p230. 고기 요리 앞에서 입을 닫고, 그 외의 음식 앞에서 입을 여는. 사뭇 단순하고 절제된 행위는 어째서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는가?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준수해야 하는 식탁의 법에 그녀가 어떤 식으로든 저항하고 있다는 것이 불편함을 자아냈을 것이다. 그녀가 남편과 함께 회사의 부부동반 모임에 가서 자신의 유두만큼이나 두드러진존재로서 자리를 지켰던 장면에서처럼, 법의 충실한 옹호자들은 법의 체계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이들이 품고 있을 법에 대한 불신을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 말하는 것도 이와 같다. 조금이라도 분석적이거나 비판적 시각을 보이면 사람들은 긍정적이지 못하다고 불편해한다.

 

p231. 생각보다 타인의 습성과 문화에 대해서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채식주의자는 사람들이 그녀의 행위를 이해하기 쉬운 속성으로 환원한 호칭에 불과하다.

 

p237. 그녀의 피는 안에서 잦아드는 피, 숨어드는 피다.

 

p238. 인내의 힘으로 쓰라림을 억누른 체 일상의 등짐을 묵묵히 지고 걸어가는 그녀에게는 무관심의 채찍질만이 가해질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존재감과 고독은 아픔 속에서 가장 온전하며 다채롭게 구현된다. 파괴적인 열정에 부딪쳐 깨져버린 이들이 숭고한 예술작품을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인내의 근육을 가다듬으며 일상의 곡예를 아슬아슬하게 연마한 그녀의 삶을 감히, 예술작품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는 또 어디 있겠는가. 욕망을 감추는 데 들이는 에너지는 욕망의 나신을 드러내는 데 들이는 에너지보다 훨씬 더 막대할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다면

 

쓸 수 있을까

탄탄하면서 세련된 문장력이 돋보인다. 딱 거기에 맞는 단어를 찾아 넣었다.

나는 가끔 생태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현대판 나무꾼에 대한 소설을 써보고 싶다. 자연에서 어떻게 힐링이 진행되는지 과정을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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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주간우수작 나는 의식이라는 퓨즈를 잇는 댓가로 삶이라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가...
평점10점 | g*****g | 2016-06-10 | 신고

 

 

 

 

 

튀지 않는 외모와 성격, 무난한 식성을 가지고 있었음에 그런 평범하고 조용한 성격을 편안하게 여긴 조금은 냉정한 한 남자와 결혼까지 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영혜.

그녀는 평범했다.

아니, 그녀는 다만 그들의 기준에서 그렇게 여겨졌던 것 뿐이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순간 180도 돌변한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녀의 다소 어두운 죄책감이 가득 실린 내면의 세계를 이 규칙이 많은 어지러우나 질서정연한 모순 투성이 세상에 날 것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꿈...

너무도 무섭고 끔찍하며 어두운 그 꿈...

그녀는 그 꿈을 통해 과연 무엇을 본 것일까?

그 누구도 진심으로 그 내용을 궁금하게 여기지도 않고 상세히 들어보려 시도조차 않는다.

단지 그녀의 이상하리만치 말라가는 외양과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태도에 거북함을 표할 뿐...

이에 그녀의 튀지않는 평범함을 향한 열정을 가진 냉담한 그는 철두철미하게 혐오 아닌 혐오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런 부분에서 그녀의 가족들도 그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앙상한 몸을 하고서 마치 자연인이 된 것 같이 수치심을 가지며 가리지 않고 나보란듯 과감히 드러내어 보는 이로 하여금 자꾸 시선이 가고, 신경쓰이게 하는 그녀의 여성성을 상징하는 가슴 부위의 그 두 개의 것이 그들의 신경을 거듭 거슬리게 했음이다.

그들은 그녀가 고기를 먹지 않아 말라서 죽을 것이 두려웠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런 기이하고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행동들이 그들을 타인에게 이상하게 여기도록 미미하게나마 영향을 줄까 염려되었던 것일까?

어떤 것이 두 가지 중 우선될 지라도 그들 또한 무조건 타박하거나 비난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이 지금 그러한 반응을 보이기에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한 듯 돌아가고 있기에 말이다.

 

 

 

 

영혜, 그녀의 아버지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살을 찌워 죽음의 그늘이 지기 시작한 그녀의 입에 억지로 고기를 쑤셔 넣으려다 거부한 그녀의 뺨을 사정없이 내려쳤기 때문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행된 강렬한 그녀의 거부반응...

어찌보면 그녀는 너무나도 살고 싶어서, 두렵고 무서워, 자신을 집어 삼킬 듯한 그 무시무시한 고깃덩어리를 거부하고자 자신의 손목을 그은 것이 아닐까 싶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음의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그녀...

그 핏방울을 옷에 묻힌 그녀의 형부.

그들의 운명은 이렇게 서서히 그의 옷을 물들인 그녀의 검붉은 핏빛처럼 무섭게 번져가고 있었다.

 

 

 

 

계속된 고기 섭취와 평범한 삶의 거부를 일삼는 그녀를 감내할 수 없다 여긴 냉정한 그의 남편은 그만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녀와의 법적 관계를 끊게 되고 그녀의 언니는 그런 그녀를 가엽고 안타깝게 여겼다.

그녀는 그녀의 남편, 즉 영혜의 형부에게 이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영혜의 엉덩이에는 아직도 푸른 몽고반점이 남아있을 것이다.'

라는 그 말을 말이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않은 아기들만이 잠시 소유할 수 있는 '몽고반점'.

그 의미는 이 소설에서 남다르게 다가온다.

생계에는 직접적으로 도움되지는 않지만 어찌되었든 믿음직하고 착한 든든한 아내에게 탄탄한 경제적 지원과 내조를 받으며 지우라는 사랑스러운 남자 아이를 하나 두고 있는 어찌보면 평범한 예술가 그에게는 더더욱 끌리는, 아니 그의 불같은 열정을 강렬하게 피어오르게, 끓도록 만드는 그 단어였던 것이다.

몽고반점을 처제의 그 엉덩이에 아직도 고스란히 점찍혀 있을 그 몽고반점을 그의 비디오에 꽃으로 완성시켜 남기고자 하는 그...

그의 예술적 감각이 그를 자극한 것인지, 그 단어가 그를 자극한 것인지 그 처음이 무언지 그것이 뭐가 그리 중할까.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욕망을 얼른 해소하는 것, 그 뿐이라 보여졌다.

 

 

 

 

무엇을 직감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 자신의 내적 고통때문인지 그런 그의 예술적인 면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착하고 다소 여성스러운 영혜의 언니이자, 그의 아내.

그녀가 평소와 달리 그와의 잠자리에서 거부감과 힘듦을 표하는데 그는 그것을 자신의 처제를 향한 급박한 욕정에 대한 그녀를 향한 죄책감의 한 부분으로 간단히 치부하고 마는데 결국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벌어지기에 이른다.

온전한 정신이 아닌 처제에게 그는 해서는 안될 제안을 한 것이다.

그녀의 몸에 꽃을 그리고 그의 몸에 꽃을 그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저 위험한 불장난으로 보이는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을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아내에게 보여지기에 이르고 그들은 그 행위에 대한 온당한 댓가를 받게 된다.

형부와의 그런 위험한 행위를 한 정신이 온전치 않은 처제가 된 영혜는 정신병원으로 그리고 그것을 제안한 형부는 이 세상의 눈을 피해 정처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는 것으로 말이다.

 

 

 

 

영혜는 가부장적인 그리고 손이 거친 아버지에게 맞았던 기억과 자신을 물어 무자비하게 잔인한 죽임을 당한 강아지에 대한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빠져 더이상 정상적인 생활과 육식을 할 수 없었음이라.

그리고 유난히 날개가 있고, 나는 것에 집착을 한 그녀의 형부.

이 둘의 공통점은 그녀의 언니이자 아내가 이해할 수 없는 형질의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어느순간 그녀는 직감하게 된다.

그녀도 결국 믿음직하고 성실한 아내와 엄마, 그리고 순응하는 딸의 역할에 짓눌려 힘들어하고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자신보다 더 아버지에게 잦은 손찌검을 당한 어린 여동생, 영혜를 방관하고 되려 술에 취한 그에게 술국을 끓여주는 장녀의 역할을 담당한 그녀가 죽음을 기꺼이 택하려했던 9살의 어린 그녀의 동생에게 죄의식을 느낀 것은 그리고 그것을 그녀 스스로 직시하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언제였는지 중요치 않다.

자신을 나무라고 생각하며 그 어떤 음식도 먹기를 거부하는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영혜가 죽음을 반기는 모습과 그 과정을 낱낱이 지켜보며 괴로움에 몸서리 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의식을 놓아버린 그녀의 동생이 어찌보면 더 행복하고 자유롭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되는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의식의 퓨즈...

그것을 놓아버린 영혜와 자신의 어린 아들을 저버릴 수 없어 오락가락 갈 곳을 찾아 헤매는 상처받은 의식을 차마 놓을 수 없는 그녀 사이의 감정선이 후반부에 두드러지게 보였다.

그녀의 시선에서 동생은 먼저 이 지긋지긋한 악몽에서 꿈을 깰 용기를 가진 진정한 의미의 행동파로 보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꿈에서 깨고 나면 그때 다시 만나기를 바라며 마지막일지 모르는 그녀의 동생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그 말들을 힘겹게 입밖으로 내뱉아낸 것이 아닐까...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어두움이 나를 갉아먹고 죽음으로 내모는 경우들을 나는 길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며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저 주욱 몰입하여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는 그 단순한 행위만으로도 이 작품처럼 나를 강렬하게 사로잡으며 유혹하는 것은 여태까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다고 생각했다.

죽음이라는 것과 죄책감, 나를 파괴하며 회복되는 인간의 단상을 보았다고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모든 것을 마치게 되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이 내게 다가올 때 영혜의 그 '나무'가 떠오를 것만 같다. 

팔로 바닥을 짚고 두 다리를 활짝 저 드넓은 하늘을 향해 과감하게 벌리어 만든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자연스러운 그녀만의 그 나무의 형상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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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주간우수작 이제 5월이면 기억나는 책, 소년이 온다
평점10점 | YES마니아 : 로얄 l*****5 | 2016-05-24 | 신고

한강 작가님의 책 <채식주의자>의 맨부커상 수상으로 인해 서점과 출판계가 들썩인다.

포털 기사에서 소식을 접한 순간 뭉클했다.

책을 좋아하고 즐겨 읽는 한 사람으로서 그 기쁨이 오롯이 전해진 것 같다.

한국 문학계가 사실 불미스런 일들로 인해 침체기였는데, 한강 작가님의 수상 소식은 그래서 의미 깊다.

맨부커상은 노벨문학상,  콩쿠르상과 더불어 3대 문학상의 하나인데 문학상을 수상한 전례가 없는 우리

나라이기에 더욱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 아닐까 하고 생각든다.

다른 문학상과는 다른 맨부커상은 작가와 번역가가 공동으로 수상의 영예를 안게되어 더 가치있는 상이며, 최대한 원문의 의미를 되살려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우리 문학의 해외 수상이 흔해질 것 같은 기대감이 드는 이유다.

 

그러고보니 한강 작가님 책은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구나.

이런 기쁨 처음 맛보기에 한강 작가님의 책들을 지금에서야 읽게 된다.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시선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먼저 구매했다.

그리고 카트에 넣어둔 <희랍어 시간>, <바람이 분다, 가라>도 꼭 읽을 예정이다.

냄비 근성의 민족이라 하지만 어떤가? 이런 계기로 책에 관심 없었고, 잘 읽지 않았던 사람들도 책 읽는

기쁨을 알게 되고, 책 잘 안 읽는 나라 사람들이라고 낙인 찍힌 것 조금이나마 희석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한강 작가님 하면 생각나는 책이 <소년이 온다>이다.

이 책을 먼저 읽고나면 한강 작가님이 어떤 문체와 어조로 이야기를 끌어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구매한 3권의 책 중 <소녀이 온다>를 먼저 읽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항쟁이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다.

내 나이 5살...... 기억하는 순간들이 있기에는 너무 어렸다. 신문을 읽기에도,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이해하기엔 또 얼마나 어려운 나이일까? 부산과 광주. 거리감이 느껴진다.

같은 나라에 같은 하늘과 땅인데 이런 거리감은 지금도 계속 진행중이다.

 

이야기는 시, 공간적 배경만큼이나 잿빛, 우울, 먹먹함으로 다가왔다.

겪어보지 못했지만 생생함으로 그 시간 속에 있었던 너, 그, 그녀, 그들의 이야기가 무자비한 폭력으로

얼룩진 그 곳을 상기시켰다. 앳되고 순수한 젊은 청년과 무고한 시민들이 이유도 없이 잡혀가고 죽어갔다. 더 이상 그들을 구할 대한민국은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권력자라 불리는 자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공고하게 지키기위해 그들의 백성들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단지 민주주의와 자유를 갈망했을 뿐인데........

그 댓가치고는 너무 가혹했다.

 

사진을 보는것보다 더 사실적으로 묘사해서 읽기가 힘들었다.

새삼 1970년대, 민주화의 불꽃이 피어올랐던 그 곳 광주에서 태어난 작가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참 많이도

자료를 모으고 배경이 된 현장을 갔다왔을 터 그 마음이 칼로 베인 듯 얼마나 아리고 아팠을까?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이며 후세에도 길이 전해져야되는 역사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그 때 피지도 못한 채 희생당한 젊은이들의 목숨과 맞바꾼

것이기에 진정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다. 참 고맙고 감사하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 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것입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많이 아프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인간에 대한 질문들이었다.

인간의 역사는 그동안 전쟁와 살륙으로 점철된 피의 역사였기에 그럼 그것으로 인간의 잔인함에 대해

정당성이 부여되는가? 어떤 대답을 받기 위한 질문은 더욱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난 잔인함 이면의 인간의 존엄과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는 것

같다. 계속 고민해야 될 부분이 아닌가싶다.

 

80년 5월의 광주는 과거의 시간 속에 묻혀져 서서히 잊혀져갔지만..... 그럼, 그 때 이후 남은 사람은?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 참혹함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5월은 어쩌면 가장

잔인한 달일런지 모른다. 육신이 죽어야만 진짜 끝나는 전쟁임을 알기에 지금 이 땅에서 숨 쉬고 있는

자신들을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 세월이 한참 지나 이 좋은 날들이 펼쳐졌건만 죽지 않고 살아남았기에 더욱 몸서리치도록 아프고 힘겨운 나날들. 그들의 상처와 고통은 언제 즈음 아물어질 수 있을까?

 

새삼 지금 맞이하고 있는 5월의 빛이 참 역설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그 때의 어둠과 그늘, 폭력과 광기가 더욱 도드라져 보이니깐....... 먹먹함이 가슴팍 깊이 박혔다.

자꾸 생각이 날 것 같다. 한강 작가님의 문체가 이렇다면 다음번에 읽을 <채식주의자>도 부담감으로

다가올 것 같은데..... 얼마남지않은 5월이란 시간이 후딱 지나가야 될 것 같다.

아직 내 시계는 5월 그 <소년이 온다>에 멈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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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주간우수작 [파문 10기] 소년이 온다
평점10점 | y******3 | 2016-05-23 | 신고

안흥도서관에서 빌린 『소년이 온다』 

 

완독한 뒤에 도착한 『소년이 온다』

 

『소년이 온다는 안흥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다. 5.18민주화운동이 있었던 5월을 맞아 어떤 매체에서 권장도서로 이 책을 추천했기에 인터넷 서점을 통해 구입을 신청했다. 그러나 한강 작가의 맨부커 상 수상과 함께 저자의 작품 대부분이 품절이 되면서 닷새가 지나도록 발송이 되지 않고 있었다. 마침 안흥도서관에 이 책이 있기에 빌린 것이다. 나로서는 책을 만나려고 적극적으로 애쓴 드문 경우이다. 그런 인연으로 만난 책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몇 가지만 적어보겠다.

  

첫째, 2인칭 시점 소설의 매력을 느꼈다. 대부분의 작품은 1인칭이나 3인칭으로 창작된다. 나의 기억에 떠오르는 2인칭시점소설은 연용흠의 코뿔소 지나가다였다. 그 작품은 단편집인데 그중에 몇몇 편이 2인칭시점으로 되어 있었다. 작품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생소한 서술에서 개성을 느꼈으나 익숙하지 않으니 불편했다. 그러면서 굳이 2인칭시점으로 쓸 필요가 있었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의 첫 대목을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은 읽기에 피곤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기우였다. 2인칭시점 소설의 진수를 맛보았다고 할까? 이 작품을 1인칭이나 3인칭시점으로 서술했다면 느낌이나 감동이 전혀 달랐을 것이다.

 

둘째, 5.18민주화운동의 주인공은 광주 시민임을 느꼈다. 이 책의 주인공이 누구일까? 전체적으로 보면 중3 학생으로 시민군에 참가했다가 12.12 반란으로 권력을 잡았던 신군부에게 무참하게 살해 된 동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또는 서술자에는 동호 외에도 동호의 친구 정대, 정대의 누나 정미, 동호가 시민군에서 만난 여고생 은숙, 여성 노동자로 시민군에 참가했던 선주, 대학생 진수, 진수와 함께 시민군에 참가했다 살아남은 동료 등이 나온다. 가장 가슴이 뭉클했던 대목은 동호 어머니의 독백인 6장이었다. 동호 어머니가 서술하는 부분은 동호에게 전하는 넋두리 형식이었다. 계엄군에 의해 자식을 잃고, 그 충격으로 남편마저 세상을 떠난 뒤에 남은 가족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피를 토하듯 절절하게 전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가슴 아프게 읽은 부분이기도 하다.

 

동호는 실존 인물이라고 한다. 저자는 동호네와 작은 인연이 있기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하고……. 광주의 희생자가 어찌 희생자와 그 가족뿐이겠는가? 그 당시 광주에 살았던 시민들, 아니 그 시대를 살았던 국민 모두가 함께 겪었던 무서운 전염병인 것을…….

 

셋째, 수양대군의 삶이 떠올랐다. 뜬금없이 수양대군을 생각한 이유는 동호 또래였던 어린 조카 단종과 친아우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및 사육신 등 많은 사람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던 수양대군과 5.18의 주범이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다. 수양대군은 행복했을까? 소원대로 권력을 잡았고, 그 후손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도 했으니 뜻을 이루었고 당연히 행복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 겨우 재위 14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남인 의경세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20세에 죽었으며, 차남인 예종 역시 재위 2년 만에 20세에 세상을 떠났다. 수양대군은 자신의 손으로 장남을 묻었으며, 죽자마다 자신을 따라온 차남을 맞아야 했다. 뿐인가? 자신의 며느리인 예종비 장순왕후는 17세에, 손주며느리인 성종비 공혜왕후도 19세에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예종비와 성종비는 수양대군의 일등공신인 한명회의 딸들이기도 하다. 당대 사람들은 수양대군과 추종자를 심판하지 못했어도 역사는 잊지 않고 업보를 내려준 것이다. 수양대군을 잊지 않은 역사의 신이 5.18의 책임자도 잊지 않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이 책을 누구에게 권할까 권하기가 망설여진다. 이 작품을 통해 과거를 떠올릴 광주시민은 얼마나 아플 것인가? 당시 시민군이 좌익이었다고 믿고 있는 이들은 얼마나 당혹스러울 것인가? 그러나 전두환 씨와 박근혜 씨에게는 일독을 권하고 싶다. 아직도 광주학살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 국민 화합을 위한 것인지 책장을 넘기면서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 맨부커 상 수상으로 인해 한강 작가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그의 작품들이 세계적으로 읽힐 것이라고 한다. 수상작인 채식주의자와 함께 이 책도 널리 읽히기를 소망한다. 5.18이 어떤 것인지 한국을 넘어서 세계에 알려지는 것……, 한강 작가가 영광을 차지한 배경에는 주인공들의 그런 염원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소년이 온다'라는 표제는 세계인의 가슴을 향해 소년이 오고 있다는 예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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