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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07년 11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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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82쪽 | 274g | 132*224*20mm |
ISBN13 | 9788937461613 |
ISBN10 | 8937461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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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명의 예스24 회원이 평가한 평균별점
<욕이전>의 주인공 블랑시는 집을 잃고 결혼한 여동생 집을 찾아온다. ‘집 없이 떠도는 여자’라는 설정은 시작부터 무거울 수밖에 없다. <유리동물원>은 작가의 첫 희곡이자 자전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만큼 아기자기하고 ‘남자 없는’ 윙필드가를 결론으로 취한다. 한 가정이 희망을 잃고 늦가을 낙엽마냥 흔들리는 지점을 끝으로 삼는다. 그에 비해 <욕이전>은 처음부터 삶에 기진맥진하고 온갖 상실과 죽음으로 얼룩진 신경쇠약자의 상태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한 인물 블랑시의 히스테리가 주가 되는 일방적인 대사로 빼곡하다. 이전에 읽을 때는 그녀의 과도한 망상과 자기 연민과 슬픔, 자기 정당화가 병적이라서 불편하고 거북했다. 한마디로 지나치게 드라마적으로 극화된 인물이라고 생각했었다.
나와는 흡수되고 물들기 힘든 텍스트라며 멀리 뒀던 작품인데 지난 초겨울에 읽어보니 느낌이 달랐다. 몰입도 있게 빠져드는 내 모습에 놀라며, ‘연극적 자아’에 관심이 많던 나는 다음을 기약했고 최근 이주 동안 몇 차례에 걸쳐 다시 읽었다. 최근 몇 년간 안팎으로 힘들어하면서도 정작 나는 나의 아픔과 상태에 거리를 두고 싶어 했다. 자꾸 생채기를 건드리거나 그 중심부를 파고들 자신도, 용기조차 없었다. 그런 나에게 블랑시의 분열과 망상과 자기변론은 픽션 속 이야기라기보다는 그냥 현실로 다가왔다.
블랑시 정도로 삶에 지쳐있고, 환영이라도 붙들어야 현재를 버틸 정도로 몸과 마음이 바닥이었다. 그래서 나는 왜 이렇게 지친 것일까?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야 했다. 그랬더니 존중받지 못하고 모욕감을 느낀 순간과 상황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랬다. 모욕감과 불쾌감으로 자존감이 바닥을 찍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릴 수 있는 ‘집’이라는 공간과 ‘편안한 숨’에 노심초사했던 시간들이 썰물처럼 밀려왔다.
블랑시가 추구하는 외모에 대한 집착과 허영, 그리고 눈속임과 거짓말도 예전처럼 위선적이지 않아 혼동되었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상실과 죽음은 그녀를 가증스럽도록 포장하게 만든다. 그녀의 성적 문란함과 정신분열, 그리고 남성 편력증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면 열여섯 때 만난 첫사랑 남편에 대한 트라우마가 자리하고 있다. 눈부신 섬광으로 자신의 세계를 강타했던 앨렌의 ‘이반’적 실체와 자살은 그녀의 삶의 불을 꺼버린다. 빛과 광명을 잃은 그녀는 어둠 속에서만 편안할 수 있다. 그녀의 고백대로 그녀에게 허락된 불빛이란 고작 불안하게 점등된 촛불 같은 것이다.
어린 날의 상실과 죽음은 제대로 애도되지 못한 채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한다. 훈련병 군인과 어린 학생과의 염문의 중심축에 ‘젊은’ 시절의 상처가 고스란히 피맺힌 채 변태적 성애와 채울 수 없는 공허와 외로움을 끊임없이 양산한다. 제도권 안에 안착하지 못한 채, 안정감과 안전 없이 불온하게 낯선 이의 손길에 그녀의 하루하루를 내맡기고 연명하기에 이른다. 평생 호텔을 드나들며 살았던 동성애자 극작가의 삶을 투영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사랑을 지키려면 자신은 물론 상대를 구할 단단한 손이 있어야 함을 모른 채 막무가내로 겪은 사랑의 열병과 환멸은 그녀를 늪에 빠뜨려 평생 허우적거리게 한다. 보통의 우리는 미치나 스텔라처럼 주어진 현실에 안도하며 자신의 삶의 질서를 지키기에 급급하다. 더럽혀진 채로, 전락한 채로, 그러나 살기 위해 끊임없이 대상을 욕망해야 했던 블랑시의 고단한 날개짓이 가엽고 안타깝다. 나를 뒷받침해주는 성장배경과 교육받은 가치가 어느 날 날아든 통보와 결정 앞에 꺾이고 무용지물이 된다면, 다시는 원래의 고향집 벨리브(아름다운 꿈)로 돌아갈 수 없다면, 연이은 방출로 닳을 대로 닳아버렸다면... 나의 정신과 마음과 감정을 어떻게 정상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까.
블랑시에게 꿈꾸는 이상과 안기고 싶은 가상의 인물과 현실의 간극은 가혹할 정도로 벌어져 있다.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으로부터 몸을 쉬일 공간이나 틈조차 찾기 어렵다. 한 남자의 품에 안겨 편안히 숨쉬며 더 이상 동요되거나 과거의 그림자에 치이고 싶지 않았던 블랑시의 ‘작은 낙원’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욕망의 경로가 막힌 블랑시의 결말은 바다에 수장되어 그녀의 머리를 점령한 폴카 음악(바르소비아)을 풀어내는 것이다. 포도알과 해안처럼 푸르게, 파랗게, 청록색으로.
여자의 몸이 상품화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적 응시와 응대, 취급방식을 통렬히 흔들어대서 테네시 윌리엄스의 블랙홀 같은 극의 세계에 다시금 놀랐다. 어떤 사이코 혹은 미친 엑스의 마지막을 이처럼 농후하고 밀도 있게 그려낼 수 있겠는가. 이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몸을 둘러싼 온갖 권력과 제도의 영향력과 함께, 삶은 결국은 ‘연기’이며 자기기만이자 속임이고 허영이고 사기이며 마술이라고 ‘눈뜨게 한다.’ 만약 그렇지 않은 자는 아직 슬픔과 상실을 겪어내지 못해 진실을 알지 못하는 자라고 말하는 듯하다.
지난 이주, 블랑시의 대사 안에 머물며 함께 출렁이고 몸부림치며 지금의 나를 둘러볼 수 있었다. ‘블랑시, 당신은 2014년 내가 만난 최고의 말벗이고, 외롭지 않고자 사랑을 찾아나서는 ‘길 위의 여자’로 제 안에 오래 머물 거예요. 당신은 내 안에 숨죽여 울고 있던 여자를 비춘 라이터 ‘불길’이니까요. 묵묵히 살다가 어둠 속에서 잠깐의 빛으로 다시 만나요.‘
끝으로 서른의 블랑시를 구기고 조각낸 세상의 거친 손아귀가 너무 못됐고 못났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을 버텨내는 망상과 속임과 연기만이 어쩌면 가장 인간적이고 진솔한 삶의 진면목이 아닐까 싶다. 부디 나를 지키고 상대를 지킬 단단한 사랑을 찾고 작은 낙원과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신년에 바라본다.
블랑시 제부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에요. 그 사람은 신사고 나를 존중해줘요. (흥분해서 말을 만들어 내며)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은 내가 친구로 함께 있는 거예요. 재산이 많다는 게 때로는 사람을 외롭게 만들거든요! 세련되고 지성과 교양을 갖춘 여자는 남자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줄 수 있죠, 한없이 말이죠! 나는 그런 것들을 제공할 수 있어요. 그런 것들은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육체적 아름다움은 사라지죠. 순간적이죠. 하지만 마음의 아름다움과 영혼의 풍요로움 그리고 가슴속 부드러움은..... 나는 그런 것들을 다 가지고 있어요. 그런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더 증폭되죠! 세월이 가면 갈수록이요! 내가 가난한 여자라고 불려야만 하다니 정말 이상하죠! 내 가슴속에 이런 보물들이 간직되어 있는데요. (목이 멘 흐느낌이 흘러나온다.) 나는 나 자신을 매우 부유한 여자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어리석었죠,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다니! (김소임 역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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