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 풀뿌리민주주의인가, 풀뿌리보수주의인가
지방자치를 풀뿌리민주주의라고 부르지만, 지금 한국 민주주의 현실에서 지방자치를 풀뿌리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에 부정적이다. 지역은 오히려 풀뿌리보수주의의 기반이라는 것이다.
풀뿌리보수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한 일본의 유명한 혁신자치체 이론가인 미야모토 겐이치宮本憲一는 “정치의 말단으로 갈수록 보수주의가 강세를 나타내는 현상”을 풀뿌리보수주의로 보았다. 중앙집권적이고 전근대적이었던 일본의 지방자치는 제2차세계대전 뒤 미국의 개혁 대상이 되어 형식적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미야모토가 보기에 실질적으로는 지방 유력자(지주, 중소상공업자 등)들의 영향력이 잔존하였고, 지방 유력자가 지배하는 말단 조직인 부락회, 정내회, 지역부인회, 상공단체, 농업조합 등이 풀뿌리보수주의의 조직적 기반이 되었다고 말한다. 토착성이 강한 지방 유력자들은 자신의 사업이 지방정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만큼 지방정치에 관심이 높고, 스스로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의원이 되려고 하며, 이익단체 등을 통해 지방정치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고 정치에 압력을 행사한다. 저자는 형식적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밑으로부터, 그리고 밑으로까지 민주화가 진전되지 못한 한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한국과 일본이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지역이 풀뿌리보수주의의 기반이 된 데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일까?
1) 지역은 누가 지배하는가
1987년 민주화 이후 20년이 지나는 동안 민주정부가 들어서고 민주화 세력이 정권을 잡아 중앙 정치의 인물은 많이 바뀌었다. 그렇다면 지방정치와 지역사회의 인물 역시 많이 바뀌었을까? 그러나 저자의 대답은 “정권은 바뀌어도 토호는 영원하다.”라는 말에 힘을 실어 준다.1991년 지방자치 부활 이후 제도 정치로 진출한 세력의 사회적·경제적 배경을 살펴본 결과, 대부분이 군사정권의 지지 기반이자 지역사회 기득권이었던 관변단체 출신 인사들이었고, 건설업·상업에 종사하는 지역 유지였다. 특히 3대 관변단체인 새마을운동 조직, 바르게살기운동 조직, 한국자유총연맹 출신이 대거 지방정치에 진출했고, 이들을 지원하는 특별법("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육성법", "한국반공연맹법")을 비롯한 각종 특혜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제왕적 지방자치단체장’과 중앙정당, 그리고 지역 기득권층의 상호 공생적 후견-피후견 관계가 지역사회 지배 구조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지방정치가 풀뿌리보수주의의 기반이 되게 한 핵심이기도 하다.
2) 주민의 낮은 참여
풀뿌리보수주의가 가능한 것은 유권자의 관심과 참여가 낮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례로 지방자치 실시 이후 한국의 지역 현실을 보면, 지방자치에 대한 주민의 관심은 매우 낮다. 일상에 퍼진 무관심은 지방선거에서 낮은 투표율을 초래하고, 낮은 투표율은 선거에서 상대적으로 조직화된 이익단체나 보수적 사회단체 등의 영향력을 키운다. 정치인은 일반 시민보다는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칠 세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지방자치단체의 정책 결정에서 이런 집단의 이익이 대표성을 띠게 되어 부패도 발생하기 쉽다. 부패는 유권자가 지방정치를 혐오하게 하고, 지방정치에 무관심하게 만든다. 이런 과정이 풀뿌리보수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악순환의 고리인 것이다.
현 정권의 균형개발 정책은 과연 균형발전을 지향하는가
이 책의 성과 중 하나는 현 정부의 지방분권 정책과 균형개발 정책을 현실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지방분권·균형발전 정책이 실제로는 경제지상주의와 신개발주의에 치중한 정책이었음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균형발전은 개발을 통한 불균형발전이었고, 결과적으로는 전국의 땅값 상승과 농·어·산촌의 침체만 심화시켰다.”라고 말한다.
지방분권을 표방했지만 국가 체제의 민주적 재편이나 지역 민주화, 시민참여의 확대라는 의제는 뒷전이었고, 균형발전을 추진하겠다 했지만, 수도권 규제를 완화해 개발을 촉진했으며, 부동산값 상승, 수도권 집중 현상 또한 심화되었다. 균형발전으로 지역간 격차를 줄이기보다는 지역간 격차를 심화시킬 가능성이 농후한 데다 현실성마저도 의심스러운 거점 개발 중심의 정책만을 진행했다. 이런 가운데 농·어·산촌은 더욱 소외되었을 뿐이다. 현 정부의 지방분권·균형발전 정책은 개발을 미끼로 지역의 기득권적 지배 구조와 타협하여 지역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2005년 11월 전북 군산시와 경북 경주시, 영덕군, 포항시에서 치른 방폐장 관련 주민투표는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결정판이었다. 첫째, 부지로 선정된 지역에는 3,000억 원의 현금 보상과 각종 지원(한국수력원자력 본사 이전 등)을 한다는 유인책을 제시했다. 두 번째, 지방자치단체가 개입해 찬성하는 쪽에만 예산을 지원했다. 셋째, 실제 생활 권역이나 사회적·경제적 영향은 무시하고, 주민투표 실시 구역도 자의적으로 정했다. 관권과 금권이 난무한 2005년 방폐장 관련 주민 투표는 국가의 무분별한 개발 정책과 제도에 접근하는 정부의 비민주적인 태도가 직접 민주주의 주민 참여 제도를 어떻게 왜곡할 수 있는 지를 잘 보여 주는 예이다.
4. 이론, 제도, 실천의 영역을 아우르는 고찰
이 책은 제도와 이론 측면의 논쟁에만 그치지 않고 현장에서의 실천들을 살펴보고 정리했다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여러 이론적 논쟁과 입법 과정은 물론이고, 제도와 실천의 영역 모두를 아우를 수 있었던 것은 특히 시민운동에 참여한 이력을 가진 저자 개인의 경험이 바탕에 깔려 있어 가능했다. 저자는 중앙 시민운동과 지역 시민운동, 그리고 여러 제도의 입법운동에 참여해 왔고, 실천 현장에서의 고민들에 대해 이론적으로 조사하고 연구해 왔다.
2003년 전북 부안군 방폐장 주민 투표와 같이 참여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 준 예를 집중 조명하는 것을 비롯해 시민운동의 태동에서부터 변화 과정, 주민이 주체로 참여하는 풀뿌리운동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려는 시민운동의 최근 모습까지 정리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현장성을 잃지 않은 고민들을 담았다.
저자는 실천적 경험과 그에서 전개된 고민과 연구·검토를 바탕으로, 현 시점에서 필요한 민주주의의 미래를 위한 모색의 핵심은 무엇보다 “지역에서부터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해 나가는 것”이며, “그에 기반하여 관료주도적-중앙집권적인 정책 과정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임을 책의 전반에 걸쳐 제안하고 있다.
본문의 주요 내용
이 책은 몇 가지 핵심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지방자치와 지역시민운동의 현장에서 제기되고 있는 의문들이다. 왜 한국의 지방자치는 ‘민주주의의 학교’가 아니라 풀뿌리보수주의의 기반이 되고 있는가? 왜 지역에서는 개발지상주의의 한 목소리만이 횡행하고 있는가? 왜 지방자치가 전체 한국 민주주의의 지체 요인이 되고 있는가? 왜 시민의 참여는 부진하고, 지역사회 저변에 존재하는 기득권 단체들의 영향력은 여전한가? 이 책은 현장에서부터 나오는 그러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노력한 책이다.
1장
위와 같은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 책에서는 지방자치 부활 이후의 지방선거 과정을 분석해서 어떤 사람, 어떤 세력들이 제도정치권으로 진출해 왔는지를 분석한다. 그 결과 지역유지, 건설업·상업 종사자, 관변단체 등에 속한 사람들이 지방자치로 열린 지방정치의 공간으로 진입해 들어간 것으로 분석한다.
2장
독주하는 지방자치단체장과 그에 대한 견제·감시 장치의 부족, 시민의 무관심과 낮은 참여도, 지방정치 및 지역사회에의 여성참여 부진, 뿌리 깊은 후견주의와 이해관계로 주민들을 갈라놓는 분할통치가 지역민주주의를 정체·퇴보시키고 있다고 진단한다. 아울러 노무현 정부의 지방분권 정책은 이러한 지역 민주주의의 현실을 무시하고 지역 민주화라는 과제를 소홀히 다룸으로써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3장
“지역사회를 누가 지배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기 위해 미국의 이론과 최근 한국에서의 연구결과들을 정리하고 필자 나름대로 지역사회 지배구조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특히 ‘제왕적 지방자치단체장’과 중앙정당, 그리고 지역기득권층의 상호 공생적인 후견-피후견관계가 지역사회지배구조의 핵심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4장
저자는 직접민주주의 제도의 도입 과정에 비판적으로 참여해 온 경험들을 바탕으로, 주민투표제도, 주민소환제도와 같은 직접민주주의 제도와 주민참여예산 등 지역에서 시도되고 있는 주민참여제도의 배경과 도입 과정, 그리고 문제점에 대해 정리하고 있다. 특히 지금 도입된 주민투표제도는 중앙관료 조직과 지방자치단체장의 정책 결정에 면죄부를 주기 위한 제도로 전락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또한 최근 주민소환제도에 대해 잘못된 비판논리들이 제기되고 있는 것에 대해 그러한 주장들의 문제점을 정리하면서, 주민소환제도의 본질은 선출된 대표자의 부패나 비리뿐만 아니라 독선과 전횡, 무능 등에 대해 유권자들이 심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5장
필자는 참여정부의 균형발전정책에 대해서도 냉철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균형발전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개발을 통한 불균형발전을 추진했고, 결과적으로는 전국의 땅값 상승과 농·어·산촌의 침체만 심화시켰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노무현 정부의 균형발전 정책은 개발을 미끼로 지역의 기득권적 지배 구조와 타협하여 지역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고 비판한다.
6장
저자는 희망의 근거를 지역시민운동에서 찾는다. 중앙시민운동에 비해 소외되고 열악한 조건 아래에 있지만,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에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해 온 지역시민운동에서 풀뿌리민주주의의 희망을 발견하고 있다. 지방 권력 감시, 예산 참여, 성 평등, 복지·인권, 생태·환경, 공동체, 교육, 대안 경제 등의 주제를 실천하며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는 지역시민운동의 역사를 정리하고, 지역시민운동의 심화를 위해 제기되고 있는 ‘풀뿌리운동’ 담론을 소개하고 있다.
7장
지역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지방자치제도의 근본적인 재설계와 지역 패권적 중앙정당으로부터의 정치적 분권화, 그리고 지역 시민 역량의 강화가 필요함을 설명한다. 또한 중앙집권적이고 관료 중심적인 국가 구조의 민주화가 지방자치와 지역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과 풀뿌리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상상력에 대해 제시하면서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