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레랑스의 나라’의 이면, 공화주의의 위기!
2005년 프랑스 방리유 사건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자유, 평등, 박애, 그러나 시테에는 없다!” ‘시테’(cit)는 원래 ‘도시’를 뜻했던 프랑스어이다. 그러나 1950년 이래로 시테에는 ‘저가 공공 임대주택 단지(HLM) 밀집 구역’이라는 뜻이 덧붙여졌다. 『공존의 기술: 방리유, 프랑스 공화주의 이면』은 바로 이 시테를 무대로, 지난 2005년 10월 27일부터 11월 18일까지 프랑스 전역 274개 방리유(도시 외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방리유 사건’의 의미와 원인을 철학, 역사학, 정치학, 사회학 등 각 분야의 젊은 국내 연구자들이 다각도에서 추적한 책이다.
‘인권혁명’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한 보편적 가치(자유, 평등, 박애)의 국가임을 자임했던 프랑스 곳곳에서, 시테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마그리브 지역(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과 서부 아프리카(세네갈, 코트디부아르 등) 출신 이민 2~3세대 청년들이 그동안의 차별대우에 분노하며, 그 보편적 가치가 자신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고 부르짖은 방리유 사건을 살펴봄으로써 『공존의 기술』은 지난 반세기의 프랑스 사회통합정책이 왜 실패했는지, 그들의 실패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공존의 기술』의 각 필자들은 사건 당시뿐만 아니라 그 여파가 지속되고 있는 현재까지 프랑스 체류 중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비록 방리유의 청년들과는 구분되지만 그들 역시 프랑스 내의 또 다른 이방인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작업을 프랑스 내의 이방인이 또 다른 이방인을 근접 관찰한 일종의 ‘현장 리포트’이자 공식 언론매체 보도의 틈새를 메워주는 ‘대안언론’으로 만들 수 있었다. 각 필자들은 ‘프랑스적 상황의 독특함’을 몸소 느끼고 있었기에 기존 언론이 방리유 사건을 보도하면서 ‘추상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었던 주제들, 예컨대 프랑스 내의 인종주의, 정교 분리주의, 공화국 이데올로기, 도시폭력과 경찰폭력, 비상사태 선포, 이민자 사회의 실업과 소외, 이주자들에 대한 포함과 배제의 메커니즘 등 여러 복잡한 문제들의 상호 연관성을 입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공존의 기술』이 단순한 저널리즘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각 필자들은 지난 1980년대 초반 르팽의 국민전선으로 대변되는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기 위해 프랑스의 여러 연구자들이 축적해놓은 연구성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소개해 주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공존의 기술』의 필자들은 방리유 사건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이 보여준 ‘기이한 침묵’을 앞장서 깬 프랑스의 대표적 좌파 지식인 에티엔 발리바르와의 대담을 통해 장문의 원고를 받아내는 등, 현지 체류 중인 연구자라는 위치를 십분 활용해 ‘방리유 사건’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들을 균형 있게 제시해 준다.
한국과 프랑스 양국이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을 시작으로 공식 관계를 수립한 지 올해로 120주년이 되어간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프랑스는 어떤 ‘이미지’로만 상기될 뿐이다. 멀리는 와인과 패션의 나라, 가깝게는 혁명의 나라, 더 최근에는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똘레랑스의 나라로……. 『공존의 기술』은 이렇듯 과도할 만큼 긍정적인 이미지로만 소개됐던 프랑스의 이면을 보여줌으로써 ‘상상 속의 프랑스’가 아니라 ‘현실 속의 프랑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주며, 프랑스 사회의 문제를 통해 우리 사회를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방리유와 방리유자르: 무례와 야만의 위협>
국내에 ‘프랑스 소요사태’로 알려진 방리유 사건은 파리로부터 북쪽으로 15.8㎞ 떨어진 방리유, 클리시수부아에서 경찰의 지나친 불심검문을 피해 변압기 주변에 숨었던 2명(당시 15세와 17세)의 이민 3세대 소년이 감전사한 일로 촉발됐다. 여러 증인들에 의해 경찰들은 이 소년들이 변압기 주변에 숨은 사실을 알면서도 이들의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조차 취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사건 발생 이틀 후,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니콜라 사르코지가 “경찰의 추격은 없었다” 라고 주장함으로써 클리시수부아 지역의 긴장이 고조될 무렵, 이 지역의 이슬람 사원에 경찰의 최루탄이 떨어졌고 이는 방리유 사건의 확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 뒤 국무총리 도미니크 드 빌팽은 “행정문서들에 의하면 어떤 순간에도 경찰이 이슬람 사원을 향해 조준 발사한 일이 없다”라고 주장하며, 프랑스 본토에서는 한번도 발동된 적 없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공화국을 보호해야 한다!”: 방리유를 둘러싼 치안논리와 낙인찍기의 통치메커니즘」(1장)은 프랑스 정부가 보여준 이 유례 없는 강경 대응의 정치적?사회적 배경을 살펴보고 있다. 특히 이기라는 정부의 강경 대응에 70%가 넘는 프랑스 국민들이 동의와 지지를 보냈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프랑스 대중의 자발적 복종 메커니즘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기라의 분석에 따르면, 1980년대 중반부터 유포되어온 ‘치안 담론’과 ‘낙인찍기’라는 통치기술의 결합이 이런 자발적 복종 메커니즘을 가능케 했다. 낙인찍기란 이민자들과 이민 2~3세대를 범죄나 테러리즘과 연결시켜 ‘범죄인화’(criminalisation)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이는 정치?언론?학계 등 여러 분야의 지원사격 아래 이민자들과 이민 2~3세대가 그들의 문화적?종교적 이질성 때문에 프랑스의 국가정체성을 위협한다는 이미지로 발전하고, 이는 다시 그들의 범죄율과 탈선이 높다는 ‘가상의’ 통계자료와 맞물려 그들이 프랑스 사회의 질서(치안)를 어지럽힌다는 담론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통치기술로서의 치안 담론과 낙인찍기가 근대적 주권론 자체에 내재해 있는 논리라는 점을 토머스 홉스(“무질서에 대한 공포”를 전제로 한 주권론)와 칼 슈미트(주권의 본질을 “비상사태, 즉 예외적 상황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음”에서 찾은 주권론)의 논의를 분석해 입증하고 있는 이 글은 사회의 안전이란 치안을 빌미로 한 권력의 강화가 아니라 사회안전망의 재구축을 통해서만 궁극적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양창렬은 「시테의 야만인: 방리유 거주자를 통해 본 이방인 통제의 계보학」(2장)에서 이민자들과 이민 2~3세대에 대한 낙인찍기 논리는 도시 공간의 분할 자체에 내재해 있다고 분석한다. 도시의 외부를 지칭하는 프랑스어 ‘방리유’(banlieue)나 ‘외곽’(faubourg)은 모두 도시의 ‘성벽 바깥’을 의미하는데, 역사적으로 성벽은 모두의 ‘안전’을 보장하고, 그것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공통된 것’의 발명과 실행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늘 문명을 상징했다. 그렇다면 성벽 바깥에 사는 사람은 문명의 바깥, 또는 야만의 지대에 사는 자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이들 성벽 바깥의 거주자들을 지칭하는 ‘방리유자르’(banlieusards)가 원래 “문명화된 도시의 문가에 숙영하는 천박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처음 등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양창렬에 따르면 이런 맥락에서 프랑스 정부는 무례하고 야만적인 방리유자르들의 일탈과 비행이 불안전과 불안감을 가져왔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는데, 그는 여기에서 프랑스 정부가 안전(scurit)을 치안(sret)으로 둔갑시키는 데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자가 ‘안전하다는 의식 혹은 느낌’과 관련된다면, 후자는 ‘실제로 안전을 보장받은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프랑스 정부는 기존 복지국가 모델의 위기에 따른 사회적 안전의 ‘불안’(실업, 완전고용의 위기, 노동계약 방식의 불안정, 복지정책의 축소)를 치안상의 ‘안전감’(어디서나 쉽게 눈에 띄는 경찰)으로 해소하려 했다는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이렇듯 불안전과 불안감의 증대가 방리유자르들의 무례와 야만(성)과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 그 해결방안으로 즉결심판, 근접경찰제도, 지역안전협약 등과 같이 방리유자르들을 근거리에서 ‘교정’하는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고등학교 1학년 수업과 교사 임용고시에 시민권 교육과 시민도덕 과목을 도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례의 원인이 지나친 똘레랑스, 권위의 실추, 지나친 자유(방종)에 있다고 주장하는 프랑스 사회의 ‘무례 담론’은 사실상 ‘아나키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 양창렬의 결론이다.
<이민과 노동: 방리유 위기의 근원>
제1부가 방리유 사건의 의미와 그것이 제기하는 근본적인 쟁점들을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있다면, 제2부는 방리유 사건으로 촉발된 위기를 보다 역사적이고 광범위한 시각에서 조망하고 있다. ‘정치의 역사적 사회학’이라는 방법론에 기초해, 19~20세기 프랑스 이민사와 이민정책의 변화를 추적하고 있는 「이민과 프랑스 사회의 공존: 19~20세기 프랑스 이민사」(5장)에서 강진희는 노동인구가 부족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프랑스 노동시장에 유입된 이민자들이 경제위기 때마다 주로 극우담론(“프랑스를 프랑스인에게!”)의 주도 아래 실업난?주택난을 비롯한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간주되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강진희에 따르면, 프랑스는 이민국가로 널리 알려진 미국만큼이나 수많은 이민자들의 피와 땀으로 건설된 이민국가이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쉽게 잊곤 한다. 현재 프랑스에 살고 있는 인구의 1/3 이상이 조부나 조모가 외국인인데도 불구하고, 현재 프랑스의 각종 미디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를 ‘재건’하기 위해온 식민지 출신 북아프리카계 이민 2~3세들이 ‘이민자 동화정책의 공화국 모델’을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고 설명한다는 것이다. 강진희는 과거 프랑스로 입국한 대다수의 이민자들이 결국 프랑스에 정착하지 못하고 더 나은 곳으로 이주했다는 통계자료를 보여줌으로써, 프랑스의 ‘이민자 동화정책’이 과연 진정으로 ‘통합적 모델’을 지향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손영우의 글 「프랑스 노동시장의 이원주의 성격: 이민자와 이민 2세의 사회경제적 위치」(6장)는 전반적인 이민사의 토대 위에서, 방리유에 밀집한 이민자 출신 자녀들이 고실업과 불안정 노동에 시달리는 이유를 프랑스 노동시장의 ‘이원적 구조’에서 찾는다. 이민 2~3세대들의 열악한 교육환경과 학업실패, 고용에서의 인종차별 등은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이전부터 노동자들을 잠재적으로 분할한다. 프랑스 노동시장 전체의 일반화된 불안정화?비정규직화 속에서 비숙련 프랑스 백인노동자들, 소상인들,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갈등은 방리유 ‘내부’의 갈등 속에 다시 한번 투영된다. 따라서 이를 해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지만 언제나 빈곤한 노동자들’이 일반화되고 있으며, 그것은 노동구조 전반의 문제이지 누가 누구의 일자리를 빼앗기 때문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손영우의 결론이다.
이처럼 최근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방리유의 위기와 갈등을 통해서 프랑스 사회의 이민자 통합노력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강진회와 손영우에 뒤이어 「이민자 관점에서 본 통합을 위한 정부 노력의 현실과 한계」(8장)는 프랑스 정부가 내세우는 통합 원칙을 통해 프랑스 정부의 이민자 통합정책을 평가하기 위한 독창적인 준거틀을 제시하고 있다.
이권능에 따르면 ‘통합’(integration)이란 ‘동화’(assimilation)나 ‘편입’(insertion)과는 다르다. “한 생명체가 완전한 대체를 통해 다른 생명체로 바뀌는 과정”을 지칭하는 동화는 식민국이 식민지의 구성원들에게 식민국의 정치적?문화적?사회적 체계들을 일종의 개종을 통해서 이식시키는 것을 일컫는다. 또한 편입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흡수하려는 시도 없이 공생하는 과정”을 지칭하는 편입은 이민자 그룹이 본래의 정체성, 문화적 특수성, 삶의 방식 등을 그대로 보존하고, 이민 수용국이 이민자 그룹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위치를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나 이와 달리 통합이란 “통합당사자들 간의 상호변화 및 평등한 역할 부여”를 뜻하는 개념이다.
이런 개념적 구분 아래 프랑스 정부가 내놓은 이민자 통합정책을 분석하고 있는 이권능은 “이민자들이 문화가 달라서 근본적으로 프랑스 사회에 통합될 수 없다”는 사회 통념과는 반대로, 오히려 “프랑스 사회가 그들을 통합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왜냐하면 프랑스 정부의 이민자 통합정책은 그 일정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상호간의 차이가 고유함의 침투에 의해 없어지고 이 고유함의 침투가 서로에게 비슷한 비율로 주어지는 ‘진정한 통합’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위기에 빠진 프랑스 공화주의의 사회통합모델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공존의 기술』은 ‘방리유 사건’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방리유를 둘러싼 문제는 2006년 5월 몽페르메유 청년들의 시청과 경찰서 습격, 2007년 3월 파리 북역에서 무임승차한 청년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소요, 그리고 얼마 전 사르코지 전 내무부 장관의 대통령 당선 이후 전국적으로 일어난 시위 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즉, 지난 2005년 방리유 사건을 통해서 수면 위로 떠오른 프랑스 사회의 여러 문제는 아직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공존의 기술』이 다루고 있는 방리유는 단순히 파리라는 대도시 주변의 신도시가 아니다. 그보다는 명목적으로는 프랑스에 포함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각종 권리와 지위 등에서 배제되는, 보다 정확히는 배제를 조건으로 해서만 포함되는 사회적 장소이다. 즉, 방리유는 형식적으로는 포함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배제되어 있는 모든 불안정한 존재들(주변인, 소수자, 이방인 등)이 거주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방리유 소요를 과거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일회적 사건으로 치부하거나 한국에 프랑스식의 방리유가 있느냐라고 질문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공존의 기술』의 각 필자들이 드러내고자 한 ‘포함과 배제의 동학’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어디에도 정확히 위치지울 수 없는 그 배제된 자들이 ‘도처에서’ 일어설 수 있음을, 아니 이미 일어서고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1988년 이후 빠르게 증가한 이주노동자의 수가 오늘날(2004년 기준) 4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또한 한국 정부 역시 지난 20여 년 동안 산업연수생제도(1991년), 고용허가제(2004) 등 다양한 이주노동자 정책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이주노동자 정책 역시 진정한 통합과는 거리가 먼 정책일 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들 역시 공존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쫓아내야 할 존재로 표상되고 있다. 방리유 사건이 국내에 소개될 당시에도, 국내 이주 노동자들과 프랑스의 아랍계 청년들을 중첩시킴으로써 나타난 이주자들에 대한 ‘잠재적 공포’는 이미 각종 인터넷 댓글 속에서 “우리도 빨리 외국인 노동자들을 쫓아내야 한다!”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나타난 바 있다.
그러나 『공존의 기술』의 필자들은 방리유 사건이 단순히 ‘그들’의 문제인 것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방리유 문제를 관통하는 여러 쟁점들은 프랑스 사회에서도 그러했듯이, 한국 사회에서도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국민(민족)이란 무엇인가, 시민의 주권이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다시 질문하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존의 기술』은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을 보여줌으로써,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민족주의’의 그림자를 들춰내고, ‘국민(민족)’에서 배제됨으로써만 한국 사회에 포함되는 존재들을 만나도록 해줄 것이다.
다양한 관점과 수위로 프랑스 공화국의 어두운 그림자를 들춰내고 있는 『공존의 기술』이 곧바로 프랑스식 공화주의나 사회통합모델의 전면적 폐기를 주장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요컨대 『공존의 기술』은 방리유 사건을 참조점으로 삼아,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공존의 기술’, 즉 대안적 사회통합모델에 대한 논의를 근본적으로 다시 시작해 보자는 제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