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풀 꺾였다고는 하나 아직도 중국, 일본, 동남아 등 아시아에서 한류 열풍은 여전하다. 표면적으로 이러한 한류 열풍을 주도하는 사람은 배용준, 최지우, 이병헌, 정지훈(비), 송혜교, 이영애 등 연기자들이지만, 이들이 한류 열풍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울연가> <올인> <풀하우스> <대장금> 등 수많은 TV 드라마 때문이었다. 한류는 영화나 노래가 아니라 한국의 TV 드라마를 타고 시작되어 이제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아시아 시장을 염두에 둔, <눈의 여왕> <슬픈 연가>는 물론 총 제작비가 430억 원에 이른다는 블록버스터 드라마 <태왕사신기> 등도 제작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한류 붐을 타고 TV 오락 프로그램의 수출 또한 활발하다고 한다. TV 프로그램이 한류를 주도하고 한류를 유지하는 힘인 셈이다. 이러한 TV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 속에 방송작가가 있다. 실제로 드라마 <겨울연가>는 일본에서 방송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을 뿐 아니라 책으로도 출판되어 100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당시만 해도 신인이었던 <겨울연가>의 작가 두 사람은 방송사에서 받은 원고료보다 몇 배 더 많은 돈을 일본에서 출간된 책의 인세로 받기도 했다.
‘부키 전문직 리포트’ 시리즈 첫 권에서 PD들이 자신들의 생활상을 솔직 담백하게 털어놓은 데 이어 열 번째 권에서는 방송작가들이 입을 열었다.
『방송작가가 말하는 방송작가』에는 지상파, 케이블, DMB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하는 방송작가들이 등장한다. PD가 빨간 사인펜으로 자신의 원고에 줄을 쫙쫙 긋는 걸 보며 자존심 상했던 새끼 작가 시절을 털어놓기도 하고(교양 작가 이정란), ‘못생기고, 혼자 살고, 담배 핀다.’는 PD들 사이에 회자되는 드라마 작가의 조건을 들려주기도 한다(드라마 작가 김기호). 몰래 카메라를 들고 사이비 종교집단에 잠입하기도 하고(교양 작가 이소정), 원하는 그 장면을 얻기 위해 특정 상황이 발생할 때까지 한없이 기다리기도 한다(다큐멘터리 작가 한정). 기획, 구성과 대본 쓰기는 물론이고 연예인 섭외 등의 일까지 해야 하는 작가는 ‘작가’가 아니라 ‘잡가’라고 주장하는 버라이어티쇼 작가(신여진)에 개그맨을 웃겨야 하는 코미디 작가(김은미), 재미있는 시트콤 대본을 쓰기 위해 회의와 집필의 쳇바퀴 속에서 신음하는 시트콤 작가(박민정)도 있다. 내 다시 이걸 하면 성을 간다고 다짐할 만큼 빡빡한 생활을 하는 라디오 시사?교양 작가(최지영), 신변잡기적 수다가 아닌 제대로 된 음악 프로그램에서 원 없이 음악 원고 한 번 쓰고 싶다는 라디오 음악 작가(구자형), 청취자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애쓰는 라디오 오락 작가(허길우)의 모습도 있다. 영상물을 번역하는 영상 번역 작가(김승연), 각종 스포츠 프로그램 구성 및 대본을 집필하는 스포츠 전문 작가(기영노), 각종 음악 프로그램의 선곡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전문 음악 작가(성우진), 새로운 매체인 DMB 프로그램을 기획, 집필하는 DMB 방송작가(남나비)의 모습은 세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아 더욱 새롭다.
화려할 거라는 환상을 버려라
‘방송’ ‘작가’. 상당히 화려한 단어의 조합에 걸맞게 방송작가는 ‘유명짜’한 연예인들과 함께 일하며 친하게 지내는 등 매우 화려할 것이라는 세간의 인식은 이 책에서 산산이 부서진다.
<발리에서 생긴 일> <신입사원> 등 쟁쟁한 드라마를 집필한 김기호 씨는 자신의 아들이 여섯 살 즈음 ‘시체처럼 자고 있는 제 부모를 내려다보며’ “드라마 작가는 사람이 못할 짓”이라고 결론 내렸다고 전하며 드라마 작가의 처지를 이렇게 단언한다.
드라마 작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골방 신세이다. 어쩌다 운 좋게 근사한 곳으로 기획 회의를 하러 가거나 장소 헌팅 때 함께 가거나 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일단 대본을 쓰기 시작하면 드라마가 끝나는 순간까지 작가는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작가에게는 드라마와 드라마 속 캐릭터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자식도 부모도 배우자도 보이지 않는데 자신의 몰골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김기호, 「나만의 캐릭터와 울고 웃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중에서)
제작 일정 빡빡한 드라마는 그렇다 치더라도 한가하고 느긋하고 우아해 보이는 라디오 작가 또한 만만치 않다. 라디오 시사·교양 작가로 일하고 있는 최지영 씨는 힘들면 살이라도 빠져야 하지 않느냐며 투덜거린다.
일단 친구가 사라진다. … 살이 찌고 건강이 나빠진다. 속 모르는 누군가는 잠을 못 자니 살이라도 빠지겠지 하지만 모르시는 말씀이다. 를 맡은 3년 동안 무려 6킬로그램이 쪘고, 지금까지 나를 힘들게 하는 다크 서클과 오십견 증상도 모두 이때 얻은 훈장이다. 성질 또한 까칠해진다. … 연애? 있던 남자 친구도 사라진다.
(최지영, 「낭만적이지 않은, 그러나 너무 매력적인」 중에서)
TV에서는 한없이 착하고 예쁘게 비치는 연예인 때문에 눈물을 머금는 버라이어티쇼 작가도 있다.
행여 대본에 하기 싫은 대사나 곤란한 질문이라도 있으면 어찌나 까탈을 부리는지. 예전에 연예 정보 프로그램 일을 할 때는 아예 게스트용 대본, MC용 대본을 따로 써 놓고 비밀 장부처럼 숨기며 녹화를 뜬 적도 있다.
고스톱 잘 친다는 말을 빼 달라던 요정 같은 그룹의 L양, 스캔들 기사가 난 후 엄청 투정을 부리던, 지금은 영화배우가 된 T씨, 스캔들 기사를 대본에 언급했다며 생각 있는 사람이냐고 성깔 내던 미스코리아 출신의 탤런트 L양 등 나는 정말정말 무수히 많은 연예인 때문에 울었다.
(신여진, 「‘작가’이거나 ‘잡가’이거나」 중에서)
프리랜서? 프리땐서!
대부분이 방송사 정규 직원인 PD와는 달리 프리랜서인 방송작가들은 소위 방송계에서 ‘학기’라고 불리는 개편 때마다 ‘고용 불안’을 느낀다고 토로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프로그램이 폐지되면 자신의 일자리도 따라 없어지는 처지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또 프로그램의 방향을 두고 PD와 갈등하는 현실과 고액의 원고료 등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의 어둠도 가감 없이 전한다.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방송작가는 개편 때마다 그만의 촉수로 프로그램을 찾아 헤맨다. 때로 방송작가들을 ‘보따리장수’ 혹은 ‘프리땐서’라고 한다. 자신의 책상 하나 없이 프로그램 따라 보따리를 풀고 장사한다고 보따리장수, 음악이 바뀔 때마다 그에 맞춰 춤을 추는 댄서처럼 프로그램에 맞춰 자유자재로 실력 발휘를 해야 한다고 해서 프리땐서라고 하는 것이다.
(이정란, 「‘큰’ 작가가 되기 위한 인고의 시간」 중에서)
고액 원고료로 기사에 오르내리는 몇몇 작가들 뒤에는 원고료는 고사하고 단 한 번의 기회라도 찾아오길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훨씬 더 많은 무명작가와 작가 지망생들이 존재한다. … 그럼에도 몇몇 스타작가의 명성과 수입에 혹해서, 또는 자신의 능력만을 믿고 드라마계에 투신하려는 이들이 줄을 잇고 있으니 능력 있는 신인의 출현을 갈망하는 드라마계로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나 항차 이들에게 닥칠 생존의 위기는 누가 책임질지 답답하기만 하다.
(김기호, 「나만의 캐릭터와 울고 웃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중에서)
섭외 전쟁! 아이템 전쟁!
프로그램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이템 선정과 섭외 과정은 프로그램 제작진, 특히 작가에게 더 많은 부담을 준다. 이는 연예인들이 대거 출연하는 드라마나 버라이어티쇼, 오락 프로그램뿐 아니라 교양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나 라디오, DMB에 이르기까지 방송작가가 겪는 ‘천형’에 가까운 어려움이기도 하다.
잘난 척만 너무 하면 재미가 없으니 실수담이나 실패한 사연도 반드시 인터뷰해 주셔야 한다, 아내와 자녀들은 물론이고 외가나 친가를 비롯해 다수의 주변인들도 수시로 등장해야 하니 알고나 계시라…. 어찌 보면 철면피도 이런 철면피들이 없다. 그런데 고사에 고사를 거듭하는 사람들을 회유와 협박, 갖은 치사한 방법까지 다 동원하여 결국 섭외를 하고야 마는 그가 바로 교양?취재 작가이다.
(이소정, 「내 아이가 보아도 좋은 프로그램을 위해」 중에서)
가능한 한 방송에 노출되지 않은, 5부작의 스토리가 나와 줄 만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용기를 얻고 희망을 품게 하는 인물을 백방으로 찾는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지만, ‘싱싱한 날것’ 같은 소재와 인물을 찾는 순례는 방송 일자부터 거꾸로 계산하되 반드시 필요한 촬영과 편집과 후반 작업 일수를 제외한 나머지 날 동안 계속된다.
(한정, 「영화보다 재미있는 다큐멘터리를 꿈꾸며」 중에서)
영화나 연극을 볼 때도 재밌는 상황이나 대사가 나오면 얼른 수첩을 꺼내 메모한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깜깜한 영화관에서 메모하는 게 익숙해져 버렸다. 영화고 드라마고 광고고 간에 패러디할 만한 것이면 일단 기억해 둔다. 심지어 CM송에도 귀를 쫑긋거린다. 직업병이다.
(김은미,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웃겨라!」 중에서)
경기 중인 홍명보 선수 대신 그의 아내를 공략하기로 하고, 월드컵이 시작될 무렵부터 자주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며 친분을 쌓았다. 홍명보 선수가 스페인전에서 기념비적인 골을 넣었을 때는 축하 꽃다발도 보냈다. 다음 날 우리는 방송에서 기분 좋은 홍명보 선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최지영, 「낭만적이지 않은, 그러나 너무 매력적인」 중에서)
그래도 ‘방송작가’가 좋은 이유
이 외에도 방송작가들이 겪는 어려움은 많다. 프로그램 기획 단계에서부터 함께 일했는데 프로그램이 편성도 되기 전에 ‘엎어지면’ 그간 일했던 보수는커녕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다거나 아주 잘나가는(김수현 작가 같은) 작가가 아닌 한 작가 선택권이 전적으로 PD에게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갈등, PD와 작가는 동반자 관계라는 명제는 그야말로 죽은 구호에 불과한 현실, 밤을 꼴딱 새고 아침에 퇴근하는 여성들 중 얼굴이 예쁘면 속칭 ‘나가요 걸’(유흥업소 종사자)이요, 못생기면 방송작가라는 자조적 푸념 속에 녹아 있는 만만치 않은 노동 강도 등 이 책의 필자들이 말하는 방송작가들의 일과 생활상을 듣고 있노라면 도대체 왜 이 일을 계속하는 걸까 하는 궁금증도 생긴다.
이 책의 필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고 주저 없이 대답한다. 어느 방송작가의 말처럼 ‘나도 모르는 저주 받은 작가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루의 피로를 시트콤 한 편으로 달랬던 기억이 있는가? 나 역시 좋아하는 시트콤을 보며 아무 생각 없이 깔깔 웃다가 펑펑 울었던 추억이 있다. … 무명의 배우들이 인기를 얻어 가고, 내가 만들어 낸 캐릭터가 시청자의 사랑을 바는 건 정말이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일이다.
(박민정, 「재미있는 시트콤 뒤의 재미없는 일상」 중에서)
내가 억지로, 억지로 썼던 글이 아픈 아이에게 힘이 된다니. 그때부터 나는 달라졌다. 방송작가를 해야만 하는 이유가 생긴 것이다. 나는 그냥 방송작가가 아니라 맑디맑은 아이들을 위해 글을 쓰는 방송작가니까. … 내 글은 그 아이에게 순간의 힘이 됐고, 나는 그 아이로 인해 평생의 힘을 얻었다.
(하지혜, 「유치한 하 작가, 스펀지를 꿈꾸다!」 중에서)
방송작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방송작가는 PD나 아나운서 같은 방송사 정규 직원이 아니므로 채용 과정이 명확하지 않다. 드라마 극본 공모, 부정기적으로 있는 코미디 및 교양 작가 공모를 제외하면 공채라는 절차가 거의 없다. 작가가 되려면 소위 ‘끈’이 있어야 한다는 세간의 인식 또한 이 때문에 생기는 오해이다. 작가가 되는 길은 여러 가지이다. 프리뷰 요원, 라디오 엽서 정리 요원, 연말에 있는 각종 시상식 행정 요원 등 대학 시절에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작가가 된 경우도 있고, 방송 관계자의 소개, 기성 작가들의 선후배 등 인맥을 통해 작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더 많은 방송작가들은 ‘끈’이 아니라 본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방송작가가 되었다. 눈물겨운 새끼 작가 시절과 좌충우돌하며 배우는 서브 작가를 거쳐 메인 작가가 되고,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아이템 선정부터 대본 집필에 이르기까지 오늘도 바쁘게 방송 현장을 누비고 있을 이 책의 필자들은 방송작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면 도전하라.”는 따뜻한 당부를 잊지 않는다.
높은 토익 점수나 해외 연수 같은 화려한 이력보다는 이 프로그램에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하고 싶어 안달이 났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 열정을 이글이글 살아 있는 눈빛에 담아 확실히 전달해 보시라. 승리의 여신은 당신의 편이 되어 줄 것이다.
(이소정, 「내 아이가 보아도 좋은 프로그램을 위해」 중에서)
6개월에 한 번은 어김없이 앞날을 걱정해야 하는 프리랜서지만 방송작가로 인생의 승부수를 띄워 보고 싶은 이들이라면 몸과 마음과 청춘까지도 던져 보라고 권하고 싶다. 소처럼 무지막지하게 성실하거나, 툭 치기만 해도 아이디어가 튀어나오는 아이디어 뱅크이거나, 너무 예쁘거나, 셋 중 하나에라도 해당되면 금상첨화이다.
(신여진, 「‘작가’이거나 ‘잡가’이거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