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줌의 쌀과 소금을 위해 온전히 한 생을 바치는 사람들의 위대한 이야기"
유럽이 사라진 역사의 무대에서 실제보다 더 정교한 세계사가 시작된다!
'대체역사소설'의 진정한 매력을 느끼게 해줄 최고의 소설
때는 14세기, 인류 역사상 가장 세기말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중세 유럽을 말 그대로 암흑의 시대로 바꾸어버린 흑사병. 역사는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음을 전해주지만, 만약 흑사병으로 인구의 99퍼센트가 사라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쌀과 소금의 시대 The Years of Rice and Salt』는 중세 유럽을 휩쓴 대재앙이었던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아닌 99퍼센트가 목숨을 잃고 중국과 이슬람이 세계의 패권을 차지한다는 가정 아래, 서기 14세기부터 21세기까지 7백여 년에 걸친 세계사를 재구성한 '대체역사소설(alternate history novel)'이다.
『쌀과 소금의 시대』는 '오늘날의 SF 고전'이라 할 만한 '화성 삼부작' 시리즈의 작가이자, 휴고상 2회, 네뷸러상 2회, 로커스상 6회 수상을 비롯해 세계판타지상(World Fantasy Award), 존 캠벨 기념상(The John W. Campbell Memorial Award), 브리티시 SF상(British SF Award) 등 유수의 SF 문학상을 수상한 킴 스탠리 로빈슨(Kim Stanley Robinson)의 국내 첫 소개작이기도 하다.
걸출한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현존하는 가장 탁월한 SF 작가 중 하나로 손꼽히는 킴 스탠리 로빈슨은 그의 작품 중 이례적인 대체역사물이며 가장 방대한 규모의 작품인 『쌀과 소금의 시대』에서, 불교와 이슬람이 지배적인 종교가 된, 우리가 아는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건설한다. 그리고 이 가상의 무대를 배경으로, 수백 년을 넘나들며, 왕조와 국가의 거듭되는 흥망과 끔찍한 자연재해와 가슴 뛰는 개혁들을 그려내며 역사와 인간에 대한 대담하고도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대체역사소설은 기존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만약의 역사'를 상상하여 쓴 소설로, SF의 하위 범주를 넘어 이미 하나의 독자적인 장르로 자리잡은 소설 기법이다. 상상 속에서 쓰여진 가상 역사이긴 하지만 그것 자체가 논리적 적확성을 지닌 또 하나의 완결된 세계이며 이를 통해 실제 역사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대체역사소설은 역사를 소재로 한 가장 지적이고도 전복적인 소설 장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 철학, 신학, 과학, 동양 문화 등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는 해박한 인문학 지식과 사회학적 통찰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며, 동양이 역사의 승자가 된 가상의 세계사를 실제보다도 더 정교하게 그려낸 야심찬 역작인 『쌀과 소금의 시대』는, 타고난 이야기꾼인 킴 스탠리 로빈슨의 명성을 확인하게 해주는 작품이자, 대체역사소설의 진정한 매력을 느끼게 해줄 최고의 소설이다.
『쌀과 소금의 시대』는 2003년 전세계 독자들의 투표에 의해 결정되는 로커스상을 수상했으며 휴고상 후보에 올랐다.
■ 낯설고도 낯익은, '허구'의 역사이자 '은유'로서의 역사
『쌀과 소금의 시대』는 서양 문명을 역사의 피고로 지목하고 그 대안으로서 동양에 대한 끝없는 찬사를 늘어놓고자 하는 소설은 아니다. 서양은 몰락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계는 계속된다. 왕이 백성을 지배하고 남성이 여성 위에 군림하는 세계, 탐험의 첫 발이 정복과 식민으로 이어지는 세계, 기술의 진보가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동시에 삶을 위협하는 양날의 칼이 되는 세계…….
『쌀과 소금의 시대』에는 '해양대륙' 발견, 과학혁명, '긴 전쟁', '만인기구연합' 등 기시감을 느끼게 하는 닮은꼴 사건들이 이어진다. 이를테면 케임 제독이 160일간의 표류 끝에 발견한 해양대륙 '잉저우' 원주민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그랬듯 낯선 이들이 가져온 질병에 목숨을 잃는다. 중국과 이슬람이 격돌하여 약 70년간 계속되는 '긴 전쟁'은 이슬람력 1333년에 즉, 서기로 말하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에 일어난다.
이슬람력 12세기, 중국과 이슬람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는 란저우에서 '두 종교의 위대한 화해'를 위해 애쓴 이브라힘 알란저우의 '충돌에 의한 발전 이론'은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을 떠올리게 한다. 전쟁배상금 반대 폭동, 엄청나게 치솟는 인플레이션, 군부 쿠데타에 맞선 시민들의 시위 등 <9부>에서 유럽 현대사를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10부>에 등장하는 신화(新華) 운동은 문화혁명을 연상하게 한다.
작가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호데니사우니(아메리카 원주민 연합)의 통치 체제를 '인간이 발명한 통치 체제 중 가장 뛰어나다'고 이야기할 때에는 미국인인 작가의 역사 의식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소설 속에서 '중동(中東)'이 '중서(中西)'로 불려질 때, 우리는 그것이 지명 하나에조차 배어 있는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풍자임을 깨닫고, 역사란 승자에 의한 '기록'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된다.
사실과 허구, 실존인물과 가상의 인물이 혼재되어, 하나하나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사소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계산된 『쌀과 소금의 시대』의 세계사는 실제 역사와 거울처럼 닮아 있다. 마치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린다 하더라도, 인간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 한 역사는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을 것임을 말하려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쌀과 소금의 시대』는 희망적이다. 지배와 피지배, 불평등이 종식되고 사회ㆍ경제적 정의가 실현되길 바라는 유토피아적인 비전을 행간에서 엿볼 수 있으며, 마지막 <10부>에서 보듯이 과학기술과 환경 문제를 대립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고, 과학기술을 운용하는 인간이 둘 사이의 균형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남성 중심의 '히스토리(He-story)'가 아닌 '허스토리(Her-story)'로서 '가상 역사'를 기술하려 애쓰며, 종교적 영성이 때로는 이성보다 더 필요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허구의 역사를 은유로서의 역사로 독해하게끔 함으로써 인간의 지나간 역사를 곱씹어보게 하는 힘, 그리고 지금 여기의 독자로 하여금 불가능한 세계를 상상하게 하는 힘이야말로,『쌀과 소금의 시대』가 지닌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 '환생' 모티프, 윤회의 삶 속에 계속되는 '쌀과 소금'의 나날들
『쌀과 소금의 시대』는 7세기에 걸친 장대한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위한 방법으로 '환생' 모티프를 사용한다. 절름발이 티무르의 노병에서 인도의 시골 계집아이로, 중국 환관들에게 거세당한 흑인 노예 소년에서 정글을 누비는 암호랑이로, 항저우의 식당 여주인에서 전쟁학자로, 윤회의 업(業)으로 한데 얽힌 세 명의 주인공들은 대륙과 시대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다시 태어난다.
세 주인공들은 멈추지 않는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친구로, 부부로, 동지로, 때로는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다시 만나 운명을 공유하며,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채 전생의 삶이 남긴 미완의 과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예를 들면 '거세'당한 흑인 소년 '키우'는 '손목이 잘리는' 형벌을 받는 사마르칸트의 연금술사 '칼리드'로, '전족'에 싸인 작은 발로 뒤뚱거리며 걷는 청조(淸朝)의 미망인 '캉'으로 환생을 거듭한다. 하지만 다른 육체로 다른 시대에 태어났음에도 성마르고 조급한 성격, 그리고 그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분노는 여전하다. 또한 여전히 세계는, 바꿀 수 없는 거대한 무엇이다.
동양권의 일상을 대표하는 물품인 '쌀과 소금' 즉, '미염(米鹽)'은 식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서, 잗다랗고 번잡스러운 일을 뜻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쌀과 소금의 시대'란 동양이 주도권을 잡은 시대, 일상을 통해 역사가 구현되는 시대라는 의미가 된다. 역사라는 거대한 이야기는 결국,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의 '쌀과 소금의 나날'들이 모여 씌어지지 않는가. 삶과 죽음과 환생을 거듭하는 『쌀과 소금의 시대』의 주인공들은 역사를 왜 흔히들 유장한 물줄기에 비유하는지, 이에 비하면 인간이란 한 톨의 쌀알처럼 얼마나 덧없는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한다. 그리고 동시에, 역사란 언제나, 일용할 한 줌의 쌀과 소금을 위해 온전히 한 생을 바치는 이름 없는 사람들에 의해 켜켜이 쌓여간다는 것을 일깨운다.
■ 동양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
환생 모티프에서도 드러나듯, 동양 문화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조예는 보통 이상이다. 이 책이 서양 작가의 손에 씌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동양의 독자로서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 소설의 첫 장을 펼친 독자들은 <1부>의 각 장 첫머리와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이 장은 폭풍우와 같은 결말을 맞는다"라거나, "다음 장을 보면 알 수 있다" 같은 서술 방식에 당황스러울 것이다. <1부>에만 등장하는 이 같은 서술 방식은 『서유기』를 패러디한 것으로, 영산(靈山)에 이르는 길을 묻는 『서유기』의 한 구절로 소설을 시작함으로써 주제를 암시한 것, 그리고 <1부>의 등장인물인 '볼드'가 손오공의 환생이라는 설정과도 관련된다.
또한 중국을 배경으로 하는 <1부>와 <6부>에서는 한시(漢詩)를 본뜬 시가 자주 등장하여 소설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한편, 해양대륙 '잉저우'를 발견한 중국 선원들이 원주민 계집아이에게 '버터플라이'라는 별명을 붙여주며, 그것은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아이의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넌지시 빗댄 말이기도 했다"(1권 371쪽)라는 구절에서 독자라면 누구나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떠올릴 것이다. 게다가, '잉저우'라는 이름은 전설상의 인물 '서불'이 불로불사의 영약을 찾으러 떠났다는 삼신산 중 하나인 '영주(瀛洲)'의 중국어 발음이기도 하다.
수피즘(금욕과 고행, 청빈한 삶을 중시하는 이슬람교의 신비주의)에 대한 묘사, 베일을 쓰길 거부하는 이슬람 여성이 『코란』 구절을 조목조목 근거로 대며 이슬람교의 가부장적 관습이 무함마드의 본뜻과는 달리 교조적으로 변질된 것임을 주장하는 대목, 곳곳에 등장하는 이슬람 시인들의 시(詩) 등 이슬람에 대한 작가의 이해 역시 결코 피상적이고 배타적이지 않다.
물론, 독자에 따라서는 일본에 대한 호의적인 묘사에 아쉬워할 수도 있고, 오리엔탈리즘의 혐의를 씌울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을 더욱 설득력 있게 하는 데 기여하는, 중국, 이슬람, 인도, 불교 등 동양 문화에 대한 작가의 해박한 지식은 『쌀과 소금의 시대』를 읽는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 해외 리뷰
* 탁월한 SF소설가의 사색적이고 장대한 대체역사소설! <뉴욕타임스>
* 철학과 신학, 과학 이론에 대한 최고의 개념들이 흘러넘친다! <퍼블리셔스위클리>
* 『쌀과 소금의 시대』는 가장 풍부하고, 섬세하고, 감동적인 소설이다. 역사와 휴머니즘에 대한 사색은 역사에 대한 쉬운 해답이 아니라 현실 뒤편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워싱턴포스트 북월드>
* 우리는 이 책을 읽고 관념의 소용돌이에서 흥분할 수도, 장엄하게 펼쳐진 광경을 보고 가슴이 설렐 수도, 슬픔 혹은 조용한 열정의 순간으로 빠져들 수도 있다. <인디펜던트>
■ 구성과 등장인물
『쌀과 소금의 시대』는 모두 10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 부마다 시대 배경이 다르고, 각기 독립적인 이야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쌀과 소금의 시대』는 '열 권의 책으로 된 한 권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원서의 각 부가 '챕터(chapter)'가 아닌 '북(book)'으로 씌어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 '열 권의 책'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바로 주인공들의 '환생'과 '바르도'이다.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얽힌 주인공들은 한 생을 마친 후 '바르도'를 거쳐 다른 시대에 다른 모습으로 함께 환생하게 된다. '바르도'는 사람이 죽은 후 환생하기 전에 머무는 곳을 일컫는 불교용어로, 중음(中陰) 또는 중유(中有)라고도 부르는데, 7세기에 걸친 장대한 역사 속에 동일한 주인공들을 계속 등장시키기 위한 소설적 장치이자, 역사를 바라보는 각 인물들의 관점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주인공들은 환생할 때마다 'B, K, I'로 시작하는 같은 머리글자의 이름을 지니며, 전생에서의 삶과 연속성을 갖는다. 'K'는 문제를 그냥 두고 보지 못한다. 신이 아니라 정의를 믿으며, 첨예한 문제의식으로 새길을 개척한다. 'B'는 사랑만이, 신의 섭리에 따르는 것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다. 주로 다른 이들의 조력자로 등장하며, 진보는 단계를 거쳐 한 발 한 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I'는 주로 과학자, 지식인으로 등장한다. 지식과 기술 자체의 탐구에 생을 바치며 공리공론이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현실에 주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