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는 그의 최초의 극작품이지만 「어느 계단의 이야기」보다 한 해 늦은 1950년 12월 1일, Mar뭓 Guerrero 극장에서 처음 공연된다. 「어느 계단의 이야기」처럼 열광적인 호응은 아니지만, 또 하나의 성공을 그에게 안겨다 준다. 비록 로페 데 베가 상은 앞에서 언급한 작품을 통해 받게 되지만, 그는 항상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작품이 그의 거의 모든 작품의 기틀이 되었고, 「어느 계단의 이야기」보다 훨씬 극작품으로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신이 극작품을 씀으로써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과 불안감을 무대 위에 올리고 싶었던 그로서는 이 작품이야말로 자신의 관심거리인 인간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라고 판단한다.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에서 작가는 그가 다루는 아주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인 실명을 다룬다. 총 3막으로 씌어진 이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한 장애인 학교에 모여 사는 선천적 시각장애자들은 학교가 마치 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자신들이 장애자라는 사실도 잊은 채 편안하고 자신감에 찬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학교에 이그나시오라는 학생이 오면서부터 문제는 시작된다. 이그나시오는 학교 안의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지팡이를 버리기를 거부한다. 이는 그가 자신의 실명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상징적인 의미이기도 하다. 이 학교의 모범생이자 학교의 교육목표인 “철의 정신”을 대표하는 까를로스와 새로 온 이그나시오와의 알력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그나시오는 “즐거움으로 중독돼 있는” 그 학교의 생활에 저항한다. 자신들이 맹인이 아니고 단지 “앞을 못 보는” 사람들이란 표현으로 자신들의 불행한 처지를 잊고 행복하게 살려고 했던 그들은 서서히 그들의 한계를 느끼고 방황하기 시작한다. 점차 이그나시오를 따르는 학생 수가 늘어나고 그 중에는 까를로스의 애인인 후아나, 엘리사의 애인인 미겔린도 포함된다. 이 연인들은 서로 다른 견해로 인해 멀어지게 되고, 결국 이그나시오가 주장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믿게 되는 후아나는 서서히 까를로스를 뒤로하고 이그나시오와 가까워진다. 작가는 그녀의 심정 변화를 통해, 아무리 현실이 편안하고 아름다워도 그 현실이 거짓 위에 세워진 것이라면 영원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허구 속에서나마 행복했던 그들에게 괴로움과 갈등을 가져다 준 이그나시오에 대해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던 까를로스는, 학교의 위협을 느낀 교장인 돈 빠블로가 이그나시오를 학교에서 떠나도록 설득해달라고 하자 전체 학생들의 행복을 위해 결국 사고로 위장해 이그나시오를 죽인다. 그렇지만 이그나시오가 없어진 후, 까를로스는 이그나시오가 간절히 바랬던 빛과 진실에 대한 열망이 자신에게까지 전염되었음을 깨닫고 이그나시오가 했던 똑같은 말을 혼자서 반복하면서 결말을 장식한다. “지금 별들은 마음껏 빛을 발하며 빛나고 있을 거야. 그리고 앞을 보는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즐기고 있겠지. 그 아주 먼 세상은 저 곳에 있지, 유리창 너머에…… 우리의 시력이 닿는 곳에…… 만약 우리에게 시력이 있다면……”
2. 어느 계단의 이야기
로페 데 베가 수상작인 이 작품은 1949년 10월 14일 마드리드에서`Cayetano Luca de Tena의 연출 아래 공연되어 187회 연속 공연이 이루어진 대 성공작이다. 스페인 내란 이후 프랑코 총통 시대는 철저한 규제와 검열이 이루어지던 시대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연극계에도 큰 영향을 미치어 당대 어두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지 못한 채, 단순한 희극이나 현실 도피의 연극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어느 계단의 이야기」의 등장은 비현실적이고 가식된 세계를 보여주기만 하던 연극계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다.「어느 계단의 이야기」는 전후 경직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에는 역부족인 중하류층의 일상생활을 있는 그대로 생동감 있게 전해줌으로서 어두운 사회 실상을 매우 투명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은 모두 3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어느 도시의 허름한 연립주택의 계단을 배경으로 한다. 모든 사건의 중심적 공간은 계단으로서, 이곳을 중심으로 등장인물의 대화가 전적으로 이루어지고 사랑@증오@사건들이 전개되어 나간다.제1막은 1919년 어느 날, 제2막은 10년이 흐른 1929년 어느 날, 제3막은 20년이 지난 1949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30년간의 3세대에 걸친 주인공들의 좌절된 삶을 통해 스페인의 어두운 사회적 현실을 잘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미 삶의 좌절을 맛본 두 주인공이, 비록 그들은 실패했지만, 그들이 젊은 시절에 지녔던 똑같은 환상을 자식들에게서 발견한다. 작가는 이들의 자식들이 미래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지 않고 관객들에게 결말을 맡겨줌으로 주인공들의 실패와 좌절이 어디에서 비록되고, 과연 자식들이 똑같을 상황에서 성공을 한다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내란 이후 스페인의 암울했던 독제시대를 엿볼 수 있다는 점도 의미가 있지만, 그 보다도 이러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중하류층의 꾸밈없는 일상생활을 엿보고, 등장인물의 뚜렷한 개성과 그들의 살아 있는 대화, 그들의 삶을 통해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공감할 수 있는 매우 재미 있고 인간미가 흐르는 작품이라 하겠다.
■ 20세기 스페인 희곡의 거장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의 최고의 희곡 작품
세계화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위해 각 언어권의 문화적 교류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20세기 스페인 희곡사에 한 획을 그은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의 초창기 작품인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En la ardiente oscuridad」(1946)와 「어느 계단의 이야기Historia de una escalera」(1947)를 번역 출간했다. 언어가 다른 문화의 이해가 가능하려면 여러 방법 중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문학 작품의 제대로 된 번역이고, 이 번역된 작품들을 공연을 통해 관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어느 문학 양식보다 빠르게 다른 문화권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사고방식을 전달할 수 있다. 소설이나 시가 읽히기 위해 씌어지는 데 비해 희곡은 읽힘은 물론 무대 위에서 행위를 통해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행동의 문학”이다. 또한 사건의 시작과 매듭 과정을 한 무대에서 볼 수 있으므로 훨씬 정확하고 흥미롭게 내용이 전달된다는 점에서 많은 희곡 작품들은 번역되어야 한다. 스페인 희곡 중에는 이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와 작품들이 상당히 많다. 부에로 바예호의 작품들은 그의 명성에 걸맞게 이미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 보급되었다. 그의 작품들 중에 이번에 번역된 두 작품은, 스페인어권의 여러 출판사를 통해 가장 많이 출판되고, 공연된 작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작품들은 부에로 바예호의 모든 작품의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부에로 바예호의 작품들이 이토록 높이 평가되는 데는 무엇보다도 작품 속에 깔린 작가의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으로서 어느 문화권을 막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것에 있다. 작품 속에 살아 숨쉬는 대사와 섬세한 지문 등은 우리 희곡 작가들도 읽고 연구해볼 점이 많은 작품이라는 면에서, 번역되어 공연되면 우리 희곡 작가들,연출가,배우,독자,관객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이 되고, 문화 교류에도 한 몫을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는...
2000년 4월 28일 마드리드에서 작고한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는 1916년 9월29일 스페인 과달라하라에서 태어난다. 학생시절 문학에 재능을 보여 문학상을 수상하긴 하지만, 그는 미술에 관심이 더 많아 예술대학에 입문하기 위해 마드리드로 간다. 그러나 1936년 스페인 내란이 발발하자 그의 아버지와 형은 총살당하고, 그는 공화정부군에 가담한 혐의로 1939년 투옥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는다. 8개월 뒤 사형이 면제되지만 1946년이 되어서야 가석방된다. 이때 그가 직접 겪고 목격한 많은 사람들의 고통은 이후 그의 작품 속의 등장 인물들과 상황으로 형상화되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추구하는 바탕이 된다. 희곡에 대한 그의 관심은 감옥에 있을 때 싹트기 시작하여 출옥한 후 미술을 뒤로하고 본격적으로 극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1949년 마드리드 시청이 주관하는 로페 데 베가 상 공모에 「타오르는 어둠속에서」와 「어느 계단의 이야기」 두 작품을 응모한다. 이 과정에서 두 작품은 다 결선에 오르게 되는데 최종적으로 「어느 계단의 이야기」가 이 명예로운 상을 그에게 안겨준다. 3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1949년 10월 14일 Cayetano Luca de Tena의 지도 아래 마드리드 스페인 연극관에서 첫 공연되어 187회를 연속 공연하게 되는 인기를 누린다. 그후 그는 1972년 스페인 한림원 회원이 되고, 1986년 스페인 문화부가 작가에게 주는 가장 큰 영광인 세르반테스 상을 수상하며 스페인 현대 희곡사에 빼놓을 수 없는 작가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1950년대 스페인 극문학은 시와 소설의 혁신적 분위기에 크게 영향을 받아 세찬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즉 다양한 형태의 극문학 가운데서 새로운 개념이 나타나는데, 도피와 거짓된 이상화를 지양하고 사실주의적 성격을 지향하고자 하는 특징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희곡을 대표하는 극작가가 바로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로서, 그는 주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믿음의 바닥에 깔린 불안감을 작품으로 형상화한다. 부에로 바예호의 가장 큰 관심은 인간과 그들의 비극적 삶이다. 작가에게 비극은 인간 본질을 알아내는 방법의 하나이고 그는 이를 위해 그의 모든 관심을 쏟아 붓는다. 이는 스페인 문학에 한 획을 그은 98세대 작가인 우나무노Unamuno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비극적 삶이란 원초적으로 한계를 지닌 인간이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며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부에로 바예호는 작품들을 통해 자아 실현, 자유에 대한 열망, 사랑, 그리고 내면의 갈등 등을 보여줌으로써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하고자 한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결속된 존재이며, 근본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와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의 모든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다. 부에로 바예호의 희곡 세계는 크게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제1단계는 사실주의 성향이 짙은 작품들로서 내란으로 인하여 단절된 과거와의 재연결을 바라는 작가의 소망이 반영되고 있고, 또한 인간이, 주어진 문제에 대한 중대한 해결책을 찾으려는 작품들이다. 제2단계는 역사적 사실에 소재를 둔 극작품들이고, 제3단계는 사회적 정치적 특성들을 감옥,고문,폭력주의 등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보다 나은 세상이 존재하리라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부연 설명하자면 부에로 바예호의 작품은 현대 연극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의 작품들로서 그의 연극인생의 여정은 지난 40년간 스페인 연극의 모든 갈등을 대변하고 있으며 삶의 의미, 특히 사회적 환경 속에서 존재론적 의미와 사회적 불평등과 불의에 대한 고발을 작품의 기저로 삼으면서도 작가 자신이 직접 결론을 돌출해내지 않고 관객 내지 독자들이 그 해답을 찾도록 유도하는 놀라운 힘을 발휘함으로서 작가의 사회적 메시지가 더욱 강하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