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삶을 바꾸는 철학, 새로운 사유방식으로 바뀔 삶을 말하다
고병권이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는 그의 분류법에 따르면 세상의 책들은 네 등급으로 나뉜다. 세계를 변혁하는 책, 세계를 해석하는 책, 세계를 반영하는 책, 세계를 낭비하는 책이다. 이 책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1부에 등장하는 책들은 그의 분류법상 앞에 위치한 두 종류의 책, 즉 세계를 변혁하거나 해석하는 책들이다. 그러나 그는 직접 그 책들을 요약하거나 해설하지는 않는다.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현재 우리 삶이기에, 그가 말하는 것 역시 우리가 삶 속에서 고민하게 되는 문제들이며, 이 문제들을 다시 사고해보기 위해 세계를 변혁하거나 해석한 책들의 사유를 빌려오거나 참조한다.
가령 언제나 자신의 삶이 자유롭기를 원하는 우리에게 ‘자유’란, 곧 ‘간섭이나 제약 없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고병권은 “자유는 선택이 아닌 능력의 문제”라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이전에, 내가 진정으로 ‘좋은 것’을 원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 그것이 자유가 아닐까”라고 질문한다. 예컨대 알코올 중독자는 술이 자신의 기호라 주장하겠지만 우리는 그의 자유가 술에 대한 예속과 무능력에서 벗어나는 데 있음을 아는 것처럼. 이렇게 통념과는 다른 자유를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그는 베르그손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과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인용하여 그들의 철학이 “자유가 능력의 문제”임을 일깨워주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고병권은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잠재력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베르그손이 말했듯 자유란 행위 자체의 독특한 색깔인데 고정된 삶 속에서의 행동이란 타성과 습관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현재 상태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할 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알코올 중독자가 술에 대한 의존을 극복할 때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고병권은 거창한 철학 개념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당연시하는 행위의 관점에서 개념어들을 풀어내며, 결국 다른 삶의 가능성을 말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한나 아렌트, 하이데거, 맑스, 니체 등의 철학이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단초로서 제공되고 있는 것이다.
세상 ― 소수적 시선으로 우리 사회 대중의 삶을 말하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명동성당 앞에서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외치며 외롭게 투쟁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장애인이자 무학력에 가까운 사람이었으며, 아이의 양육권을 빼앗긴 이혼녀이고, 가난한 사람이었다. 이 책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2부는 바로 그녀, 최옥란에 대한 글로 시작한다. 고병권은 “1970년대 소수자의 보편적 형상이 전태일이었듯이, 2000년대 소수자의 보편적 형상은 최옥란이 아닐까”라며, 그녀의 모습에서 지금 한국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모든 소수자들, 장애인·빈민·여성·저학력자 등의 모습을 읽어낸다.
고병권이 세상을 말하는 2부의 첫글을 최옥란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는 것은 현재 그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단순히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들에서 배제당한 사람이라는 의미의 소수자를 넘어서 우리 사회의 현재 상황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적극적 의미의 소수자를 이야기한다. 여기서 소수자는 사회학자 이진경의 표현을 빌리면 “고통과 결여에 시달리는 고통받는 존재가 아니라 그 고통으로 인해 그게 없었다면 볼 수 없었을 것을 보고, 들을 수 없었을 것을 듣는 존재, 그 고통으로 인해 자신의 고통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고통에 마음을 열고 이해하려는 존재, 나아가 수많은 타자들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촉발할 수 있게 된 존재”에 가깝다.
고병권이 「문턱에 좌절하는 사람들」(본문 116~118쪽)이라는 글에서, 보통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순간 특정한 장소에서 문턱을 느끼지만(가령 취업이라는 문턱에 선 지방대 학생이나 비정규직이라는 문턱에 선 여성, 사교육이라는 문턱에 선 빈곤층 학생 등), 장애인들은 모든 곳에서 문턱을 느끼는 사람들이라고 했을 때, 장애인은 정확히 앞서 말한 적극적 의미의 소수자를 뜻한다. 그렇기에 “비장애인들에게 제공되는 편익은 국가의 존재 목적처럼 생각하면서도 장애인들에게 제공되는 편익은 예산 낭비처럼 생각하는 사회, 모든 절망을 개인 탓으로 돌리고 시혜와 동정을 구걸하도록 만드는 사회, 자기 구성원을 죄수 아니면 거지로 만드는 사회”인 사회에서 “장애인들의 존재방식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성격에 대한 가장 섬세하고 날카로운 증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의 독특한 소수자 관점은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대장정(2006년 5월 이들은 2주 동안 새만금부터 서울까지 천리 길을 낮에는 걷고 밤에는 그 지역 주민들과 이야기하며 보냈다) 때 발표한 글 「걸으면서 질문하기 ― 위기에 빠진 생명, 그 권리를 묻는다」(본문 148~152쪽)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는 물과 흙과 바람이 소수자였습니다. 처음에는 새만금의 조개와 천성산의 도롱뇽만이 소수자였습니다. 처음에는 늙은 농부와 어부들만이 소수자였습니다. 처음에는 장애인과 비정규직, 여성, 청년들만이 소수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만물이 소수자입니다. …… 각자 처해 있는 삶의 구체적 상황이 다르고, 각자 지키고 싶은 삶의 내용이 다르지만,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이 파괴된 이유를 다른 이의 파괴된 삶 속에서도 발견합니다. 홈 패인 차별의 공간에서 우리 모두는 장애인이고, 시민권이 거부되는 곳에서 우리 모두는 이주노동자이며, 삶이 불안정한 곳에서 우리 모두는 비정규직 노동자이고, 삶의 터전을 잃게 된 곳에서 우리 모두는 농민이며, 생명의 위협을 받는 곳에서 우리 모두는 새만금의 조개입니다. ……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 대중임을, 우리 스스로 소수자임을 깨닫기 위해, 그리고 또 그렇게 되기 위해 걷습니다.”
각자의 삶이 파괴된 이유를 다른 이의 파괴된 삶에서도 발견한다는 것, 지식인이 대중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때는 지식인 스스로가 대중일 때뿐이라는 것, 그리하여 결국 우리 모두가 소수자라는 선언은 소수자의 ‘연대’ 선언에 다름 아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뜻을 대신 말해줄 ‘대표’를 가져본 적 없는 소수자들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는 지금 그곳에서 이 사회를 바꾸어갈 새로운 힘이 생성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 사회의 대중은 국민의 뜻을 대신 말한다며 한 번도 말하지 않은 그들의 대표자들을 떠나 새로운 대중 정치의 영역으로 이동해 가고 있다.
대표는 적고 추장은 넘쳐나는 사회,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꿈꾼다
대한민국 국민은 4년마다 한 번씩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한다. 그리고 많은 표를 얻은 사람들은 자신이 국민의 ‘대변자’이며, ‘국민의 주권행사’를 위임받은 존재라고 말한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자. 4년 내내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국민이 아닌 그들이고, 주권자인 국민은 4년 동안 단 하루만 아니 단 한순간만 주권을 행사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 나라의 진짜 주권자는 누구인 걸까? 대의제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우리는 그 동안 이런 질문을 던지기가 쉽지 않았다. 그들에게 주권을 위임했다며, 제대로 못한다고 비판하긴 했지만 한 번도 우리가 진짜 주인인지 되묻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나라의 주인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가 4년에 한 번 행사한 주권으로 선택한 사람들과 그들 주변의 몇몇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쩌면 이 사실을 그간 외면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러나 고병권은 이런 우리 모습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정신상의 주권자 노릇은 그만두자”고 말한다. 우리가 정말 주권자라면 주권을 대신 행사해줄 대표를 뽑기 위해 4년을 기다리지 말고, 잘못된 것은 그때그때 바로잡자고 한다. 4년 내내 주권자인 사람만이 4년 동안의 어느 하루에도 주권자일 수 있는 거라며 말이다. “매일매일 민주주의 사회라면, 주권도 매일매일 행사되어야 한다. 시민들은 어느 하루만 주인인 게 아니라 항상 주인이기 때문이다. 동료 시민을 계몽해야 할 어리석은 양떼처럼 취급하는 정치인은 민주주의 사회에 살 자격이 없다. 민주주의 사회는 시민들을 공손한 신민이 아니라 훌륭한 군주로 대접하는 사회인 것이다. 우리 시민들 역시 군주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복종하는 법보다 지배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서로 대화하고 행동하면서 주권을 행사해야 한다.”(본문 176쪽)
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에서 원시사회에는 추장이 군주로 전환되는 것을 막는 다양한 장치들이 존재했다고 말한다. 추장은 부족민들이 복종하는 대상이 아니었으며, 그에게는 어떤 권력도 없었다. 부족민들은 자신이 복종해야 할 절대적 권력의 출현을 의식적으로 막았다는 이야기다. 그들은 그들의 뜻을 대신 말해줄 대표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추장이 권력을 가지려 하면 그를 왕따 시켰다. 고병권 표현을 빌리자면 ‘왕’(王)은 ‘따’를 당하는 사회였던 것이다.
원시사회의 부족민들이 미개해서 왕의 출현을 막았다고 말하지 말자. 구성원 스스로 자기 권리를 행사하는 사회와, 권리 행사를 다른 이에게 맡겨 결국 자기 목소리는 사회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게 만드는 사회, 과연 어느 쪽이 미개한 사회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2007년에는 전 국민의 대표를 뽑는 행사인 대선이 있다. 우리가 진정한 대의제 사회를 꿈꾼다면, 우리가 정말 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이 대선에서 그리고 내년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에서 뽑을 사람은 ‘대표’가 아니라 ‘추장’일 것이다. 더불어 이 사회의 모든 조직에서 권력을 가지고 군림하는 대표가 아니라 구성원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추장’이 속속 생겨나서 이 사회의 어느 구성원도 자신의 목소리가 어느 곳에서도 들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일이 없게 하자고,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추장 고병권은 지금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