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빽판 키드들이여, 청계천의 구름다리를 기억하는가?
언제부터인가 ‘7080’이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이 말은 최근 <친구>, <말죽거리 잔혹사>, <품행제로> 등 70~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의 흥행과 복고풍이 유행하면서 새로운 문화 코드로 인식되고 있다. 《빽판 키드의 추억》은 이들 7080세대를 ‘빽판 키드’라는 또 다른 표현으로 이름 붙인다.
‘빽판’이란 무엇인가. 정식 용어로 말한다면 ‘불법복제음반’으로 ‘원판’과 똑같이 찍어서 만들어낸 음반을 말한다. 즉 편집을 거쳐 만든 음반들과는 달리 원판의 컨텐츠를 그대로 담아낸 음반을 말한다. 이 빽판이 끼친 영향력은 매우 엄청났다. 현대 30대 중반 이상의 사람들은 주로 이 빽판으로 음악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빽판의 유행은 싼 값이라는 경제적 이유도 있었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문화적 이유는 빽판에는 ‘금지곡’이 없었다는 것이다. 1975년 가요정화운동이 전개되면서 정식으로 발매되는 음반에는 불온하고 퇴폐적인 것으로 낙인찍힌 곡은 실릴 수가 없었다. 퀸의 《A night at the opera》를 사도 를 들을 수 없고, 밥 딜런이나 앨리스 쿠퍼처럼 ‘퇴폐’로 찍힌 사람들의 음반은 아예 정식 발매도 되지 않았다. 경제적 빈곤, 정치적 억압 속에서도 음악소비에 대한 문화적 욕구의 숨통을 트이게 해주었던 수단, 70~80년대의 시대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상징물이 바로 ‘빽판’이라는 존재였다.
? ? ? 이 모든 것이 구름다리에는 다 있었다. 거기 있는 빽판들을 모두 집으로 옮겨놓고 싶다는 상상은 그때 음악을 좋아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것이다. 게다가 왠지 단속이라도 올 것 같은 분위기에서 빽판을 한 장, 한 장 뒤적이던 심정도 많은 이들이 공유할 것이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부터는 동네 판 가게에서도 한 구석에 빽판을 대량으로 구비하고 판매하기 시작했다. 청계천이 ‘총판’이었다면 변두리의 판 가게들은 ‘대리점’이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빽판이 이렇게 일반화되면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히트 음반들은 동네에서 구하고, 희귀 음반들은 청계천으로 사러나가는 행태가 형성되었다. 그러니 청계천에 가는 날은 모아 둔 용돈도 지갑 속에 두둑이 다지고 무언가 진귀한 것을 찾으러 원정을 나가는 기분이었다. 어디서 주워들은 것은 있어서 《Life》나 《Time》같은 영어잡지를 끼고 다니던 기억도 있다.
- <빽판에 대해 기억하고 싶은 것들> 중에서
◎ 후진 오디오에 빽판이라도 음악이 있어 그는 행복했다!
‘빽판 키드’의 대표주자인 신현준은 자신의 기억 속에서 어린 시절 추억을 하나하나 꺼내어 그 시대를 함께 보낸 이들은 추억에 잠기게 하고, 그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에게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라디오나 TV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녹음하기 위해서 식구들에게 “녹음할 때는 제발 조용히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해도 어김없이 녹음되던 어머니의 “밥 먹어라!”라는 소리와 형이나 누나의 방문 여닫는 소리, 청계천 3가 세운상가의 비좁은 길을 헤매며 전축 부품을 쭈뼛쭈뼛 사와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부품을 달고 드디어 LP 위에 바늘을 얹어놓자 들렸던 그 음악의 감동, 제일 큰 건전지 12개는 넣어야 ‘휴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그 크고 무겁던 카세트 플레이어를 들고 소풍가서 춤을 추던 기억, ‘세상에서 오직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컴필레이션 테이프를 만들기 위해 하루 종일 한 곡 한 곡 정성스럽게 녹음을 하고 공테이프 커버에 음반 타이틀과 곡목 타이틀을 혹시 글씨가 틀릴까 조심조심 손으로 적어 넣던 일, 엄마 손 잡고 간 동네 변두리 극장에서 늙수레한 무명가수가 이미 알려진 기성곡을 부르고 악단의 반주에 맞춰 무희들이 춤을 추고 어설픈 마술 시범을 보이는 쇼를 보러 갔던 추억, 《최신 히트 팝송》 등의 노래책에 영어로 된 가사 밑에 소리나는 대로 한글로 적어놓고 기타를 튕기며 노래 연습을 했던 기억 등 한 사람의 평범한 추억이면서 동시대를 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릎을 치며 고개를 끄덕일 추억들이 이 책에는 가득하다.
? ? ? 1977년부터 1979년 사이 <대학가요제>와 <해변가요제>를 보고 난 다음부터는 대학생이 되면 당연히 그룹 사운드, 요즘 말로 록 밴드를 결성해서 전기 기타를 쳐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때만 기다렸다. 그런데 대학에 입학해 보니 캠퍼스는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고 그룹 사운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유유상종이라고 했던가, 나와 비슷한 부류의 인간들이 알음알음으로 모인 곳은 학생회관 라운지라는 곳이었다. 다들 서울내기들이었고 모범생과 날라리 사이의 ‘경계인’이었다. 우리들은 ‘라운저스’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라운저(lounger)'라는 단어가 영어로 ‘빈둥거리는 놈팡이’ 정도의 뜻이라는 걸 알고 ‘바로 우리 같은 군상을 말하는 것’이라고 키득거렸던 기억도 난다. 우리는 황량하기만 한 학교를 벗어나 시내 도처를 돌아다니면서 음주가무를 즐기며 되지도 않는 낭만을 구가하려고 애를 썼다. - <나의 스무 살, 라운저 시절의 이야기> 중에서
지금 세대가 누리는 문화적 혜택과 비교한다면 턱없이 부족한 환경이었지만 나름의 낭만과 청춘을 구가하던 시대, 비로 후진 오디오에 빽판일지라도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 하나로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 빽판에서 MP3로, 극장 쇼에서 라이브클럽으로
이 책은 미디어(방송), 테크놀로지, 레코드(음반), 라이브, 평론과 연구 등 대중음악과 관련하여 저자가 연을 맺었던 여러 범주들을 테마로 해서 각 장을 구성하고 있다. 이런 구성을 통해서 대중음악 평론가로서 음악적 토양이 마련된 70~80년대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그 음악적 환경들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1장 <트랜지스터 라디오부터 스트리밍 사이트까지>에서는 어린 시절 첫 음악적 경험이 되었던 어머니의 라디오를 시작으로 해서 1980년대 컬러 TV의 등장과 함께 방송이 음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다.
2장 <테크놀러지, 그 중독에 대하여>는 음악을 재생하는 매체, 즉 공동의 음악 체험이 가능했던 전축과 턴테이블을 지나 혼자서 이어폰을 끼고 자기만의 음악을 즐기는 것이 가능하게 해준 ‘워크맨’의 등장, 그리고 MP3 파일의 등장으로 이제 컴퓨터를 오디오처럼 사용하게 된 변화 과정을 담고 있다.
3장 <레코드는 영혼을 잠식한다>는 음악을 담고 있는 매체, 빽판과 원판, 김민기의 앨범 뒷 부분에 딥 퍼플의 노래가 함께 녹음했던 카세트 테이프, 대량복제의 슬픈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CD에 대한 이야기이다.
4장 <극장 쇼에서 라이브클럽까지>는 음악이 연주되던 공간, 영화 상영 중간중간 어설픈 마술 공연과 무희들의 춤을 보여주던 극장 쇼에서 중간계급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문화소비가 되었던 대학로 소극장, 젊은이들의 새로운 문화로 떠오르는 라이브클럽, 돌아온 포크 가수들이 활동하는 미사리 까페에 대해 회상한다.
5장 <음악이 공동체를 만들던 경험>은 저자의 대학시절 이야기로 1970년대의 ‘낭만’와 1980년대의 ‘투쟁’의 과도기에 방황하던 당시 젊은이들의 고민이 담겨 있다. ‘관제문화’와 ‘외래문화’를 배격한다는 명목으로 정부 주체의 <국풍‘ 81>을 저지하기 위해 모였던 ‘학우’들, 결국 최루탄이 터지며 이날 공연은 취소가 되었고 신문들은 ‘지성인들이 이래서야……’를 운운하며 앞 다투어 기사를 실었다고 한다. 대중문화와 구분되는 민중문화가 존재할 것이라는 환상, 한국의 청년문화의 역사에서 ‘잃어버린 세대’가 될 수밖에 없던 그 시대의 또다른 모습이다.
6장 <팬에서 평론가>는 음악에 열광하던 팬에서 평론가가 되면서 어쩐지 팬이라는 존재와 적대관계가 되버리기도 하고, 한국에 제대로된 평론이 어디 있냐는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 평론가의 역할에 대해서 고민한다.
7장 <문화기획자와 문화연구자 사이>는 어쩌면 저자가 현재 가장 고민하는 부분이고 과장을 좀 덧붙이자면 한국의 대중음악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모색을 담고 있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대중음악이라는 것을 연구까지 해야 하느냐?’라는 편견이 아직도 강한 한국에서 대중음악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자리잡았으면 하는 저자의 바람이 담겨 있다.
? ? ? 팬에서 출발하여 애호가와 평론가를 거친 지금 나는 다시 한 명의 팬으로 돌아온 것 같다.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을 재고 가리는 일로부터 어느 정도는 초연해졌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음악을 집요하게 듣던 열정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조금은 여유롭게, 조금은 거리를 두고 음악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이 무엇이고, 음악이 갖는 소통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통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의 집요한 음악 듣기 그리고 음악 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누군가의 노래 가사처럼 ‘마지막 그 순간은 또다시 시작’일 테니 말이다.
- <마치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