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 황의 서술태도
이 책에 나타난 그의 서술태도를 네 가지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우선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이야기에서 논의를 이끌어낸다. 만리장성 이야기를 할 때는 낙양에서 관광한 얘기에서 시작하고, 자신이 미국의 뉴 폴츠란 곳에서 경험한 내용을 들어 자본주의의 본질에 접근한다. 또 만주 일대의 풍경에서 쿠빌라이의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그리하여 독자로 하여금 쉽게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게 한다.
-둘째로 그는 일개인이나 특정 사건에 역사적인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 물론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개인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사건이나 개인 때문에 어떤 결과가 빚어졌다는 식의 논의는 철저히 배제한다. 따라서 현종이 양귀비와 놀아나느라 당나라를 망쳤다는 식의, 도덕적인 잣대로 역사를 판단하는 시각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는 역사를 전체적인 안목으로 조망한다. 따라서 당나라 멸망의 원인도 양귀비나 당현종이 아닌, 당시 당왕조의 구조적 모순에서 찾는다.
-셋째, 그의 거시사관은 한 가지 사건을 논할 때 그 사건이 일어난 시대의 전후 시대와 그 사건을 둘러싼 동서남북의 사회·지리·문화까지 두루 살피는 것이다. 가령 진시황이 기원전 3세기라는 이른 시기에 중국 전체를 통일한 것은 그의 개인적인 능력이 탁월해서라기보다는, 중국의 기후와 지리적인 요건 및 조숙한 정치사상이 결합되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결과였다는 주장이다. 진시황은 다만 이런 자연스러운 역사적인 추세에 따라 중국을 통일했을 뿐이다. 황인우 교수의 종합적 시각은 영웅사관을 탈피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역사학의 일반적인 고려 범위를 지리와 과학으로까지 넓혀놓았다.
-넷째로 그의 거시사관은 국제성을 띠고 있다. 그는 역사학이 세계가 한집안이라는 정신 아래 동서양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그 사이에 놓인 편견을 없애는 데 기여하기를 희망했다. 예를 들어 원나라는 중국사 안에서 보느냐, 아니면 세계사 안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주제가 달라질 수 있는 사료이다. 칭기즈 칸과 그의 후예들은 13세기에 유럽과 아시아를 뛰어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당시 이들에게 수치를 당했던 유럽인들은 아직까지도 몽고를 중국민족 전체와 연결지어 비난한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이 '북방의 소수민족'과 자신들을 분리시켜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레이 황은 이러한 논쟁을 뛰어넘어 칭기즈 칸이란 정복자를 만들어낸 당시 중국과 유럽의 역사적 상황을 최대한 합리적으로 구성해낸다.
거시사적 시각으로 풀어낸 새로운 중국사
역사 속의 인물과 사건은 변화하지 않는다. 변화하는 것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레이 황은 역사를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역사자료를 선택하거나 그 인과관계를 배열하는 것이 달라진다고 말한다. 따라서 과거 사실을 배열하는 작업에서 역사가가 담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는 동시대 사람들의 입장에서 역사를 해석하는 일이다.
레이 황은 과거 중국의 역사책은 전통적인 관료정치의 시각으로 편찬되었고, 현대 역사책은 자본주의를 경계해야 할 노선으로 보는 계급투쟁의 입장에서 씌어졌다고 보았다. 그러나 지금 중국은 사회의 전 조직을 상업화하고, 숫자로 관리하는 방향으로 나아나고 있다. 이 말은 곧 이러한 변화된 시각으로 중국역사를 새롭게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레이 황은 중국인들이 지난 2,000년 동안 만들어놓은 정치·경제조직 및 문물에 대한 자부심은 그대로 유지한 채, 이 과정에서 발생한 잘잘못을 '멀리 넓게 보는' 거시사적 시각으로 유장하게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문학과 역사학을 아우르는 한 시대의 읽을 거리
대만의 원로 역사학자 타오시성은 레이 황, 곧 황인우의 작업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황인우 박사는 몇몇 인물과 몇 가지 사건을 선택하여 뜻 가는 대로 써내려갔지만, 역사 속의 사회와 정치·경제·사상을 마치 한 줄로 꿴 염주같이 계속 이어가기 때문에 독자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염주를 한 알 한 알 헤어가듯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오늘날 문학과 역사학에서 한 시대의 읽을 거리로 팔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레이 황의 이러한 매력에 독자들이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옮긴이의 상세한 주석과 더불어 각 장의 첫머리에 그 장의 핵심적인 내용을 요약해놓아 설령 중국사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도 어렵지 않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중국은 왜 일찍이 자본주의를 실행하지 못했을까?
이 책을 통해 레이 황이 독자들에게 궁극적으로 던지고 있는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이에 대한 답을 중국사 안에서 찾아낸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자본주의의 본질을 고려하지 않은 채 중국의 자본주의를 논한 오류를 먼저 지적한다.
그는 국가체제를 거쳐서 모든 국민의 지지를 얻어야만 자본주의가 형성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은 종교와 신앙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절대로 천천히 발육하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결국 뼈를 깎는 개혁 없이는 자본주의의 실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중국은 자본과 물자의 소통이 어려운 대륙국가로서, 수천 년 동안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해왔기 때문에 자본주의로의 개혁이 여타 유럽국가에 비해 더 어려웠다.
하지만 반드시 중국역사 속에 자본주의를 억압하는 부정적인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부정적인 요소들도 역사 발전에 공헌했다는 것이 레이 황의 주장이다. 이 주장과 관련하여 그가 내세우는 개념이 '장기간의 역사적 합리성'이다. 중국역사는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자본주의의 전제요건이라 할 '숫자를 가지고 사회를 관리하는 상태'로 변화해왔으며, 그 결과 현재 중국은 "비가 오고 나서 맑게 개인 상태"라고 레이 황은 보았다.
역사를 멀리 떨어져서 넓게 본다는 것
레이 황의 저술태도는 그가 주창한 거시사적 역사서술법과 깊이 연관돼 있다. 그는 최근까지도 역사서술의 주류가 되고 있는 미시사적 역사서술의 문제점을 처음으로 제기하고, 그 대안으로 '거시사(巨視史, Macro History)'적 역사서술을 제창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주장한 거시적 역사관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장기간을 대상으로, 그리고 멀리 떨어져서 시야를 넓게 하는 태도로 새롭게 역사를 검토"하는 것이다. 레이 황은 자신의 역사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즉, 작자와 독자는 역사 속 인물들이 똑똑했는가 어리석었는가, 잘했는가 실패했는가 비교하는 단기적이고 단편적인 시각에 머물러선 안 된다. 역사를 보는 중점은 과거의 역사와 지금 우리의 처지를 상호간에 비교·검증하는 데 있지, 단지 한 마디 말이나 한 가지 일로 제목을 잡아서 작가의 재능을 발휘하는 데 있지 않다. 당시의 사회 윤곽을 그리는 데 최선을 다하면, 비록 자료에는 많은 차이가 있어서 가지런하지 못해도, 한쪽으로 치우친다는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철저히 실제 경험에 뿌리내린 역사관
레이 황은 기존의 역사관은 상층구조에 국한된 관점을 갖고 있어서, 정책을 비교하거나 인물을 비평하면서 그것을 하층의 역사현상과 대조해보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런 편파적인 역사관이 수많은 역사적 맹점들을 생산해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몸소 체험한 10여 년간의 군대생활이 그에게 농촌으로 들어가서 하층사회를 경험하고, 역사를 관찰하는 시야를 넓히는 계기를 만들어줬다고 밝혔다. 사실 레이 황은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헤쳐온, 또 자신의 힘겨웠던 인생역정을 토대로 학술적인 업적을 쌓아온 보기 드문 학자로 손꼽힌다.
그 결과, 레이 황은 일부 지식층끼리만 공유하고 끝나는 '자위적' 학문 태도를 철저히 배격해왔다. 그는 생전에 "내가 쓴 역사는 대부분 통속적인 것이다. 그러한 내용이 내가 공헌할 수 있는 부분이고, 아울러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라고 공공연히 밝히곤 했다.
"중등교육을 받은 독자면 내 글을 읽을 수 있다"
이 책을 비롯하여 레이 황의 저작들은 확실히 기존의 학술논문 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그는 어떤 역사적인 사건을 설정한 뒤, 그 길을 포장해가면서 도도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건의 진면모를 하나하나 복원해낸다.
그의 목표는 중등교육을 받은 정도의 독자들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작 태도가 최선의 방법은 아니지만, 그것을 계기로 기존의 역사기록 태도가 고쳐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레이 황의 거시사적 시각이 잘 드러나는 이 책에는 중일전쟁의 참상, 장개석과 모택동의 갈등, 군 제대 이후 미국에서 만학도로서 고생한 일, 자본주의 미국 사회의 진면목 등 그가 직접 듣고 목격한 이야기들이 군데군데 등장한다. 그래서 그의 책은 진정한 인생 경험 없이 사료에만 파묻혀서 써낸 저술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