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틀린은 이 책에서 미디어와 개인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미디어는 개인에게 무엇인가? ‘문제는 정보가 아니라 감각이다’라고 기틀린은 잘라 말한다. 뉴스 기사나 인터넷에서 쏟아내는 수많은 기사들은 우리에게 유용한 정보를 전달해주는 것 같지만, 그 속내를 파헤쳐보면 우리는 같은 기사를 반복해 봄으로써 어떤 감정적 흥분, 안도감, 즐거움, 슬픔 등을 느낀다. ‘정보를 검색할 때도 우리는 검색 자체의 즐거움을 추구한다. 9?11 테러 사건의 TV 보도 역시 사건의 새로운 진상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시청자에게 공포와 슬픔, 연민, 안심 등의 감정을 통해 연대감을 형성하도록 하는 일종의 제의(祭儀)였다’라고 그는 쓰고 있다. 여름마다 치르는 물난리 때, 3개 방송사가 하루 종일 특집으로 내보내는 홍수 관련 뉴스도 역시 마찬가지 기능을 한다. 결국 미디어를 통해 우리는 자극과 감각의 끝없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놀아야 한다. 기틀린은 감각을 끝없이 소비하는 오락을 추구하는 대중문화의 기원을 게오르크 지멜의 ‘주지주의’ 개념에 기대고 있다. 지멜에 따르면, 진실한 인간의 조건은 감정이다. 하지만 현대 화폐경제의 사회는 인간의 계산 능력만을 극도로 추구한 나머지 감정은 밀려나게 되었고, 그 결과 아무것에도 전혀 감동하지 않는 ‘무감동한’ 인간이 나타났다. 역설적으로, 무감동한 인간은 그 보상으로 ‘흥미와 극단적인 감동, 빠른 변화’를 추구하게 되었고, 이것이 오히려 감각의 문화를 가져왔다는 것이 지멜의 설명이다. “자연스런 흥분이 사라지고 무감동한 태도가 늘어날수록 감동, 관계, 정보를 추구하면서 ‘자극’에 대한 현대적 선호가 뒤따른다.”(지멜, 본문 63쪽) 따라서 ‘자극을 추구하며 열광적으로 자신을 버림으로써 자신을 발견하는 현대적 개인이 출현했고, 이런 역설적인 개인이 무한 미디어 사회를 예고했다’고 기틀린은 부연하고 있다.
현실의 자극에서 자연스럽게 발동하는 감정이 아니라 하나의 내면의 욕구로서의 감정 그 자체. 이것은 현실과는 동떨어지고 지속적이지 않으며 언제든 쓰고 버릴 수 있는 일회성의 감정이다. 대중문화가 미디어를 통해 폭포처럼 쏟아내는 이미지와 사운드는 이런 일회성 감정의 과포화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하며, 이런 관점만이 미디어에 대한 성급한 찬반의 판단을 유보시키면서 미디어를 인간의 존재 조건으로 파악하게 해줄 것이다.
미디어는 우리 삶을 어디로 이끄는가?
이렇게 해서 쇄도하는 이미지와 사운드에 점령된 일상이 만들어진다. 광고판의 강렬한 빛, 수없이 점멸하며 눈을 자극하는 인터넷의 배너광고, 스스로 복제하는 바이러스처럼 일상의 모든 공간을 잠식하는 광고음, 공간을 통일하고 브랜드화하는 공공장소나 상점의 배경음악. 기술이 발달할수록 취향은 파편화된다, 아니, 미디어 기업은 개인의 취향을 끊임없이 파편화시키며 소비자를 유혹한다. 당신만의 분위기를 만들지 않겠습니까? 당신만의 탑 텐을 만들지 않겠습니까? 왜 거실에만 그칩니까, 침실에서도 미디어에 접속하지 않으렵니까? 이러한 틈새 미디어는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를 무력화시킨다. 개인의 무한한 선택이 만들어내는 소비사회의 일상에 빅 브라더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그리고 드디어 미디어는 워크맨과 무선 인터넷을 통해 개인의 자기완결적인 해방을 선언하며 현대적 유목성을 완성한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의 유목성은 새로운 구속이라는 역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휴대용 장비를 장착한 노마드는 원할 때 언제든지 접속할 수 있는 자유의 대가로, 언제나 접속 가능한 대상이 되어야 한다. 송신자의 권리에 수신자의 의무가 동반되고,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이 상호 침투하기 시작한다. 또한 자신만의 분위기를 만들고 싶어하는 노마드는 극장이나 회의장 등에서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남의 휴대폰 소리에 공격받는 자신을 발견한다. 다시 이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각종 기술이 발달한다. 발신자 표시, 낮은 목소리를 훌륭하게 증폭시켜주는 장비, 공공장소에서 휴대폰 사용을 막는 장비들……. 현대적 노마드는 ‘개인의 힘’이라는 꿈의 실현을 위해 기꺼이 이 비용을 지불한다.
이것이 현대 문명을 추동하는 자유의 속성이다. 무언가를 볼 자유, 기분전환을 추구할 자유, 기분전환으로부터 다시 전환을 추구할 자유, 덧없음을 즐길 자유.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이 모든 고속도로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레너드 코헨, 본문 91쪽)
미디어 급류를 타고 가는 항해 전략
미디어 급류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각 개인은 나름대로 급류를 타는 자신만의 ‘항해 전략’을 가지고 있다. 맹렬하게 돌진하는 미디어를 길들일 전략. 기틀린은 이러한 항해 전략을 유형별로 분류하여, 팬, 비평가, 편집증 환자, 노출증 환자, 풍자가, 훼방꾼, 분리주의자, 폐지주의자로 이름짓고 이들의 전략을 상세히 관찰한다. 이들은 급류를 타고 즐겁게 순항하거나, 급류를 거슬러 오르려고 애쓰거나, 혹은 급류의 하류를 떠돌아다니거나, 혹은 암초를 헤치고 안전한 항구를 향해 조종해 간다. 혹은 급류 자체를 없애려고 애쓰기도 한다.
하지만 각 개인이 미디어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전략을 채택하든지간에, 미디어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전략조차도 끌어안고 이윤의 수단으로 재생산한다. 비평가는 아마존닷컴에서 책의 리뷰를 달아 안전한 항구로 독자를 이끌려고 하지만, 아마존닷컴은 줄줄이 달린 수많은 비평에서 오히려 광고 효과를 끌어낸다. 미디어를 등지고 은둔자처럼 살아가는 전략을 가진 분리주의자는-그러나 모든 미디어에 대해 분리주의 전략을 고수할 수는 없으므로 부분적으로만 분리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데-오히려 기업에게 좋은 수요를 창출해준다. 보기 싫은 채널을 금방 돌려버릴 수 있는 리모컨, 음소거 버튼, 귀마개의 기능도 하는 헤드폰, 받기 싫은 전화를 안 받게 해주는 자동응답기, 스팸메일을 알아서 체크해주는 우편함……. 미디어는 모든 것을 소화하여 자신을 살찌운다. “허버트 마르쿠제는 ‘위대한 거절’(Great Refusal)을 찬양했지만, 우리가 가진 것은 고작 작은 거절들의 흐름일 뿐이다”라고 기틀린은 냉정하게 말한다. 각각의 항해 전략은 삶의 스타일일 뿐이며, 어떠한 정치적 힘도 갖지 못한다. “단지 무한 미디어에 맞춰 살기 위한 일종의 기민함의 표시일 뿐이다.”
미디어의 승리, 공중(公衆)의 파편화
미디어의 도도한 흐름에 민주주의는 ‘곁다리 쇼로 축소된다’고 기틀린은 말한다. 그것은 미디어 제국을 이루는 권력자들이 편파적인 보도를 해서라기보다는, 미디어가 공중(公衆)을 파편화시키기 때문이다. 일회적인 느낌과 유희에 대한 끊임없는 열광은 공적인 삶의 속을 긁어내어 텅 비게 만든다. 뉴스는 대중의 시선을 끌기 위해 기아로 고통받는 지구촌의 아이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대중은 강렬한 고통과 연민의 감정을 느끼지만, 카메라가 이동하면 대중의 관심도 사라진다. 뉴스는 일회성 쇼이며 대중은 변덕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카메라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내보내는 영상은 정치적 힘을 갖는가? 정부는 물론 카메라가 전달하는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행동을 개시한다는 구실을 들먹이지만, 과연 TV 보도가 천안문 광장의 유혈진압을 막을 수 있었는가, 기틀린은 묻고 있다. TV는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사라예보와 보스니아의 ‘인종청소’를 주요한 뉴스로 다뤘다. 하지만 결국 밀로셰비치를 제재하지 못했고, 미국이나 유럽이 보스니아에 군사적 개입을 하는 것에 의미 있는 지지를 만들어내지도 못했다. 사람들은 TV를 보면서 자극을 받고 행동을 결심하기보다는, 먼 곳의 재난을 지켜보는 일쯤이야 두렵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불안과 죄의식, 짜증과 슬픔 등 속수무책의 복합적 감정을 느꼈다는 것이다.
미디어 급류는 언제 어디서나 승리한다. 급류는 모든 것을 흡수한다. 이슈는 극적으로 부각되었다가 극적으로 가라앉으며, 미디어에 취한 열정은 그만큼 덧없는 것이다. 암울하지만, 즉각적인 행동지침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묵시론 징조가 나타나듯이 비관에 빠질 일도 없다. 길고 험한 미디어 연구의 숲 끄트머리에 서서, 기틀린은 단 두 마디의 행동지침(?)만을 조용히 말할 뿐이다. “충동을 자제하면 추하건 고결하건 열정 자체가 진정된다. 그러면 엘리트들이 밀실에서 공적인 문제를 차분히 숙고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