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만일 모든 사람들이 ‘너는 네가 아니다. 쟤가 너이다!’라고 한다면 정말 ‘너’는 ‘너’일 수 있을까?
500년 전 피렌체에 한 뚱보 목수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동네 사람들은 한통속이 되어 그를 속여 먹기로 한다. 그에게서 ‘뚱보 목수’를 빼앗고, ‘마네토’라는 다른 사람을 덮어씌우는 것이다. 마네토는 ‘친절하지만 약간 모자란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뚱보 목수를 보는 사람들은 모두들 “어이, 마네토 안녕?” 하고 인사를 하고, 뚱보 목수가 자신의 집에 들어가려 해도 “누가 남의 집 문을 두드리느냐”며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 또 마네토가 진 빚 때문에 법원에 잡혀가기까지 한다. 뚱보 목수는 자신은 마네토가 아니라 뚱보 목수라고 필사적으로 외치지만 사람들에게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뿐이다. 뚱보 목수는 묻는다. “아니, 그럼 나는 누구야?”
우리는 무엇을 통해 우리가 우리 자신임을 입증할 수 있을까? 주민등록증? 여권? 운전면허증? 과연 이들 안에는 무엇이 적혀 있고, 그것들이 어떻게 신분을 증명해 줄 수 있을까?
이 책은 이러한 물음에서 출발한다. 신분 증명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사회적 배경과 변천 과정을 다룬 책이다. 얼핏 보면 상당히 어려운 담론들이 오가야 할 것 같은 주제이다. 하지만 이 책은 난해하거나 현학적이지 않다. 상당히 흥미롭고 ‘잘 읽힌’다. 바로 ‘정체성’이 아니라 ‘신분 확인’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먼저 중세의 신분 증명을 살피고, 현대의 여권이나 수배 전단에도 중세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와 중세는 과연 어떤 의미로 함께 만나고 있는가를 신분증을 통해 이야기한다. 오늘날 우리가 지니고 다니는 신분증에 담겨 있는 중세의 흔적을 추적해 중세와 현대의 씨실과 날실을 엮어 보는 것, 바로 이것이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 당신 지갑 안에 들어 있는 신분증을 보라. ‘내’가 봐도 낯선 ‘나’의 사진이 붙어 있을 것이다. 사진은 곧 중세 초상화의 다름일 뿐이다.
이 책은 “오늘날 우리의 신분을 증명해 주는 문서에는 중세의 등록 체계가 그대로 녹아들어 가 있는 것이다. …… 결국 신상 정보를 취합하고 관리하여 신분을 확인하는 현대의 복잡한 체계 안에는 중세의 관료주의적 등록 체계가 고스란히 살아 있다고 봐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신분증 안에 ‘사회사’가 있다!
신분증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신분 증명이 어떤 역사를 만들어 가는지-또는 역사가 어떤 신분 증명을 만들어 가는가-를 알 수 있다. 즉 신분 증명을 통해 당시 사회와 문화를 읽을 수 있다.
최초의 신분 증명 명부는 종교적 목적에서 탄생했다. 고해성사에서 영성체를 받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범죄인들을 다스리고 관리하기 위한 신분 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국왕은 각 지방을 돌아다니는 외교 사절들을 관리하기 위해 패스포트를 만들었다. 각 지방에 갈 때마다 증명서를 내보이고 거기에 인장을 받게 함으로써 외교관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
15세기 들어서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병사에게 신분증이 발급되었다. 왕국이 확실하게 징집하고 탈영병을 막기 위해 병사 신분증이 필요했다. 당시 왕국들은 용병을 직접 고용하지 않았다. 이미 휘하에 싸움패들을 거느린 일종의 ‘군대 장사꾼’에게 위탁해 전쟁을 치렀다. 문제는 이 장사꾼들이 있지도 않은 병사들을 있는 것처럼 꾸며 대기도 하고, 용병 수를 조작해 머릿수만큼 급료를 착복했던 것이다. 이것을 막기 위해 국가에서는 신분증명서를 발급했다.
15세기 후반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도 신분증에 영향을 끼친다. 소위 ‘위생증’이란 것이 도입된 것이다. 이 위생증을 통해 페스트균을 옮길 위험이 없음을 증명해 보여야 했다. 사실 오늘날의 신분증의 꼴을 갖추기 시작한 신분증의 시작이 페스트에 있다. 당시 프랑스 남부에 페스트가 창궐했고, 이 지역과의 모든 거래를 금지하기 위해 그쪽 사람들은 타깃으로 세세한 신분증을 만들었던 것이다.
신분증에는 과학의 발달도 담겨 있다. 이제 신분증에는 눈썹, 수염, 머리카락 색, 눈동자 색, ‘특기 사항’ 등을 적는 란이 없어지고 조그마한 칩이나 마그네틱 선이 생기고 있다. 그 안에는 엄청난 용량의 개인 정보가 들어간다.
이렇게 이 책은 신분증과 얽힌 사회와 문화, 역사, 풍습, 과학까지 풀어낸다. 그 이야기들의 이음새가 매끄럽고 무척 흥미로울 뿐 아니라 사회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각을 얻을 수 있다. 이 책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신분 증명에 초점을 맞춰 살펴본 중세 미시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너의 몸을 기억하마
원래 몸은 중요한 신분 증명의 수단이었다. 긴 여정을 마친 오디세우스를 확인시켜 주는 것은 다리의 흉터이다. 또한 <주홍글씨>의 ‘A’ 표식은 헤스터의 증명이다. 중세 노예들은 몸에 문신을 새겨 신분 제약을 받았다.
요즈음도 실종자나 수배를 다룬 TV 프로그램, 전단지를 보면 ‘중간 키에 약간 마른 체격’, ‘이마에 큰 흉터’ ‘툭 튀어나온 광대뼈’ 등으로 대상을 설명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몸이 곧 그 사람의 신분 증명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암울했던 시절 한 자락에도 몸이 신분 증명이 되어 주는 사례가 있었다. 사회정화를 위해(?) 삼청교육대로 붙잡아갈 사람을 색출할 때 남자들의 윗옷을 벗겨 문신이 있는가를 확인했다. 정육점 갈고리에 걸려 있는 돼지의 허연 몸통에 찍힌 것 같은 그런 마크가 곧 불량, 탈선의 신분을 증명해 주었던 것이다.
패스포트의 등장으로 몸으로 증명하던 시대에서 서류 증명의 시대로 넘어갔지만 아직도 몸은 훌륭한 ‘신분증명서’이다. 요즈음 과학 기술이 발달해 DNA로 신분을 인식하는 것을 보면 몸은 가장 확실한 신분증임에 틀림없다. 나와 타인을 구별 짓는 주체인 몸은 영원히 훌륭한 신분증이 될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몸을 주시한다. 피부색이나 흉터, 점, 문신 등 신체의 특징이 신분 증명의 표식이 되었던 사례를 살펴 몸과 사회사의 관계를 고찰했다.
너희가 위조를 알아?
‘증명’은 동시에 ‘위조’를 낳는다. 만원짜리 지폐에 은줄을 넣고, 주민등록증에 복제 불가능한 문양을 넣어 위조를 막고, 9?11 테러 충격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미국은 동공 인식 여권을 만든다고 한다. 위조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증명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 위조의 역사도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위조와 관련된 많은 사례들도 다루고 있다. 뉘른베르크의 기록 보관소에는 15세기 후반 도시가 외교관들과 주고받은 암호 문서를 풀어 볼 수 있는 암호 해독표가 보관되어 있다. 여기에 사용된 암호들은 상당히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왕을 두고 ‘저주받은 자’라고 했으며, 정의를 일러 ‘교회의 법도’라고 했으며, 뉘른베르크의 외교관들은 정보를 성공적으로 훔쳐 낸 경우에 ‘벌이가 쏠쏠하다’라고 했고, 새로운 정보가 급한 경우에는 ‘사냥개’를 풀라고 썼다.
그 먼 옛날에도 최대한 위조나 정보 유출을 막으려는 노력은 ‘꽤 치밀’했다. 증명을 위한 서류는 동시에 사기 수단이기도 했다. 온갖 서류를 위조하고, 얼굴도 감쪽같이 숨기는 범법자들이 대활약할 수 있는 장을 연 데에는 신분증이라는 제도가 크게 기여(?)했다. 이 책의 저자는 “결국 이들(범법자들)은 관인과 스탬프 등으로 그림을 복제하고 인쇄술로 동일한 내용의 증서를 대량생산하는 것으로 신분 확인이라는 문제를 새롭게 해결한 제도의 산물인 셈이다.”라고 재미있는 언급을 하고 있다.
어차피 신분 증명은 모사가 기본인 초상화에서부터 시작된 것임을 상기할 때 타당한 말이다. 그럼 이건 또 어떤가? 위조를 일삼는 도둑 일당이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증명 암호를 사용하는 것.
이 책은 이렇게 신분 증명 속에 켜켜이 자리 잡은 재미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관청은 너를 지켜보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원래 신분증은 귀족 등 상류층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특혜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러다가 중대 임무를 띤 사절, 귀중품을 수송하던 상인들의 추천서나 통행증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의 증서는 사람뿐만 아니라 물건이나 계급 등에 붙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세 말기 신분증은 커다란 의미 변화를 겪는다.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중반 사이에는 이러한 증서가 ‘통행 허가증’ 등으로 바뀌면서 점차 사람만을 대상으로 발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개인의 신분을 알려 주는 관청의 관인이 찍힌 신분증이 등장했고 이후 사람들은 관청과 정부의 관리에 놓이게 되었다.
신분증이 특혜에서 의무로 넘어가는 그 자리에서 감시와 처벌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결국 신분증이란 국민의 모든 움직임을 중앙에서 통제하려는, 절대 통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지배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당신의 신분증은 당신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신분증은 그것을 발행하는 당국의 재산이다. 따라서 신분증을 훼손하거나 내용을 조작하면 공공재산 훼손 혐의로 법적 처벌을 받게 된다. 이러한 패러다임을 책에서는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여러 새 기술들에도 불구하고 그 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 ‘부정의 논리’는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있다. 우리가 아무리 깔끔하고 확실한 신분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 신분을 보증해 주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닌 공권력이기 때문이다. 내가 얼마나 품행이 방정하며,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권리의 소유자라고 외쳐 봐야 법이 인정하는 신분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부랑자나 다름없는 신세이다. 유효하고 적법한 신분증을 허락해 주는 칼날은 어디까지나 관청이 쥐고 있지 않은가. …… 결국 신분증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다. 각기 전문 분야를 맡고 있는 관청들이 합심해서 인증해 준 공권력, 이게 바로 우리 신분의 주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