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ciones :: Jorge Luis Borges
이렇게 오래 손에 붙잡고 있었던 책이 또 없다. 어디까지나 난독증 때문이긴 하지만 뒤숭숭한 시국 탓에 바깥을 전전하느라 더 그랬다. 처음에는 그야말로 이해를 못해서 끙끙대며 읽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매료되어 같은 문장을 암기하듯 읽고, 종반에는 현실 세계에서 도피하듯이 빠져들었다. 겨우 덮을 수 있었던 건 수록된 마지막 단편에서 비루한 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랄까. 보르헤스는 그걸 가르쳐주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보잘 것 없고 미약한 존재인지를. 그래도 구성하는 모든 것 하나하나가 전부 가치 있다고 보듬어주어 얼마나 고마운지를. 그의 우주에서 나는 한없이 겸허해지다가도 한없는 자괴에 빠지기도 했고 한없이 자신감을 갖다가도 한없는 절망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냉탕과 온탕을 오가다가 겨우 조금, 아주 조금 그 우주의 비밀을 알 것 같았다. 아, 이게 사람의 길인가 보구나, 하고.
솔직히 그의 책을 문학적으로든 주석적으로든 그가 의도한 그대로 읽어낼 자신은 없다. 문장 하나를 수십번을 읽어도 완전한 독해는 한 10년쯤 후에나 가능할 것 같다. 그런 주제에 그의 책에 대해 글을 쓰자니 참 송구스러운 노릇이지만,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 의 저자] 에서처럼 '읽기' 는 시대에 따라 달리 읽혀질 수 있다는 그의 너그러움에 편승하여 주제넘게나마 개인적 소회에 가까운 감상, 혹은 기억을 남겨본다. 보르헤스의 팬이시라면 나의 오독에 한숨을 내쉬게 될지도 모르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놓은 작가만큼 모쪼록 넓은 마음으로 [미로에서 길을 잃었지만 한쪽 길을 택해 걸어가는 이의 또 하나의 행보] 정도로 너그러이 읽어주셨음 좋겠다. (이런 점에 있어 포스트모던은 나같이 모자란 독자에게 너무도 편리한 양식이 아닐 수 없으니, 다시 한번 그 영역을 확장해준 보르헤스에게 무한한 감사를.)
먼저 언급한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 의 저자] 에 대해 좀더 메모하자면, 보르헤스는 '모든 역사는 반복되지만 시대에 따라 그 양상은 달라진다' 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요즘 같은 시국에 읽어서 그런지, '역사는 반복된다' 는 말이 이처럼 가슴이 와닿는 때가 없다. 그런데 같은 일이 반복되어도 꼭 같은 일이 반복되지는 않는다. 변증법적 진화가 타당성을 얻는 부분이랄까. 그래서 미래는 항상 희망적이고 좀더 다양해지고 또 더 다양해진다. 그런데 이 다양함은 언제나 뭉뚱그려져 양분화 된다. 즉, [끝없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길들] 로서의 무궁한 다양함인데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을 때는 항상 두개의 길만 보게 되는 것이다. 가령 100명의 사람이 보수와 진보의 길을 놓고 각각 50명씩 한쪽 길을 선택해 갈라졌다해도 또 앞서 만나는 길에서 그 50명은 25명씩 나뉘어질 것이고, 또 다음 길에서 그 반으로 나뉘어져 결국 언젠가는 혼자서만 끝없이 갈림길에 들어서게 된다. OX 퀴즈도 아니건만, 갈림길을 선택한 개개인은 모두 자신이 O의 길에 들어섰다 믿고 X의 길로 들어섰을거라 생각되는 다른 99명의 길을 쉽게 인정치 않는다. 그들이 지나간 길을 자신이 되풀이해 지나갈 수도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러나 최대한 단순화 하여 양분시키는 것만이 세상의 질서를 바로 잡는 것이라 사람들은 쉽게 믿는다. 바이너리가 시시하다 싶으면 혈액형이니 별자리니 하며 갯수를 늘려보기도 하지만 프레임은 여전하고 다양성은 그 안의 포로가 되고만다. 어쩌면 사람은 자신이 처음 들어섰을 때의 길만 겨우 기억하고 그 뒤로 계속 갈라지는 길을 맞으며 점점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자신이 선택한 길이 옳다고 믿고 싶으면서도 혼자서는 알 수가 없어 처음 50명으로 갈라섰을 때의 연대를 그리워 하게 되는 건 아닐까. 혹은 아예 스스로의 선택권을 내버린 채 다른 사람이 택한 길로 따라 들어서고만 있는 것은 아닌지. 다양함이 존중받자면 소통의 부재와 고독의 감내가 따르고, 다양함이 압축되자면 진화는 더뎌지거나 진정한 진실이 왜곡될 수 있다. 그럼 어떻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질서를 유지하며 다양함을 추구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보르헤스는 [무질서가 답이다] 라고 내놓은 것 같다. 어차피 사람은 존재론적으로 유일하기 때문에 이미 다양성이 확보되고, 그렇기에 이 다양성을 양분화하거나 특정 갯수로 나누는 것은 존재 부정이나 다름없다. 차라리 다양성을 확장하여 많은 가능성을 쏟아내는 것이 진화(혹은 진실)에 더 근접할 수 있다고 역설하며, 이미 인류는 그런 길을 걸어왔는데 인정하고 있지 않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이미 지나온 과거, 즉 역사에 '절대' 란 있을 수 없다. 많은 다양함이 한두가지로 '정리' 되었을 뿐이다. [바빌로니아의 복권] 을 통해 역사가 그동안 얼마나 날조되어 왔는가를 은유하며,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논고], [유다에 관한 세가지 다른 이야기], [끝] 의 이야기로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게 전부가 아니라 또 다른 가능성도 있지 않았을까' 에 대한 예시를 제시한다. 그는 세상에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시시각각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수많은 이야기가 생산 되어지고 있는데 어째서 역사는 한가지만을 기록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그동안 외면 되어왔던 무궁한 다양성에 관해 환기시킨다.
끝없이 갈라지는 길에 대한 선택은 어쩌면 우연일 수도 있다. 어느 환경에서 태어나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정보만을 접했느냐에 따라 지금 자신이 서있는 길이 정해지기도 한다. 그럼 그 강제적인 설정으로 인한 자신의 길이 '진실' 이라 우긴다면, 그거야말로 무지한 오만이 아닐까? 그만큼 자신을 선택받은 존재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물론, 그렇다고 '내 길은 진실이 아니다' 고 끝없는 무력감에 사로잡혀 주저앉을 필요는 없다. 그저 계속, 계속 길을 선택하고 또 선택하여 앞으로 나가는 것만이 일이다. [바벨의 도서관] 에서의 은유처럼 '신이 될 수 있는 완전한 책' 이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영영 찾지 못하더라도 찾아나가고 길을 선택하며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이 사람이 걸어온 길이며 앞으로 갈 길이다. 진실을 찾는 것, 되고 싶은 무언가가 되려하는 것, 그 모든 것이 앞으로 계속 선택하고 찾아 나가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 진실은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지나온 과정 중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적어도 개인의 진실만큼은 그 안에 있다.(※ [알모따심에로의 접근], [죽음과 나침반])
고작 요만큼만을 얻기 위해 이토록 짧은 인생을 고생했는가 하고 한탄과 허무에 젖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나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에 그나마 위안을 받게될 것이다. (※[원형의 폐허들]) 인간이 죽음의 비밀을 끝끝내 못푸는 것은 어쩌면 죽는 그 순간에 모든 것을 깨우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비밀의 기적]) 역설적으로 '누구나 죽는다' 는 인간의 한계는 결국, 무질서한 다양성 속에서 인간 사이의 연대와 소통의 끈이 되는 것은 아닐런지. 많은 것을 배우고 연구하는 지식인도, 현대의 문화에서 괴리되어 있는 오지인도 모두 '절대적' 인 것을 추구하거나 믿는다. 그 '절대적' 인 것의 속성은 어쩌면 '단 하나의' '같은 것' 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한계' 를 가진 인간으로서 추구하는 속성마저 같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소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만 두 개로 갈라진 길만 볼 것이 아니라 끝없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을 신의 눈으로 내려다 볼 수 있는 혜안을 길러야만 비로소 그 소통이 통할 것이며, 그것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길일 것이다.
우리는 같은 것을 꿈꾼다. 다만 다양화의 압축, 양분화로 그것이 다른 양 호도되고 있을 뿐이다. (※[불사조 교파]) 이상적인 세상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모든 일에는 결과가 없고 오로지 연속성을 가진 과정만 있기 때문이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그런데 그렇게 다르면서도 같은 우리가 왜 서로를 향해 칼을 들고 싸워야만 하는가. (※[남부]) 존중만으로도 연대가 가능한 것을, 왜 자신의 길만이 O의 선택이라고 세상에 강요하며 혼자만의 '천일야화' 를 꿈꾸는가. 나만 잘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로로 된 정원 전체를 보지 못할뿐더러 우연으로 세워진 자신의 위치에서 더이상 앞으로 가지 않고 정체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자리에서 아무리 아는 게 많다 자신이 옳다 떠들어댄들 그는 결국 죽음의 순간, 저너머의 '진실' 을 접할 때 때늦은 후회만 하게 될뿐이리라. (※[칼의 형상])
써도 써도 끝이 없다. 그의 글에서, 문장에서 느끼고 생각한 바를 다 적자면 이 공간 갖고는 턱없이 부족하다. 일개 독자인 내가 이러할진대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그에게 영향을 받았을까. 나는 심지어 호러 작가로 유명한 H.P 러브크래프트나 영화 [매트릭스] 에서조차 보르헤스를 느낄 정도였다. 시대가 낳은 또 하나의 천재지만 더이상 새로울 게 없다는 겸허함과 동시에 글쓰기에 대한 자부감, 뚜렷한 철학에 깊은 감화를 받았을뿐더러 문학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작가의 기준을 두지않는 너그러운 호방함에 나같은 사람도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기마저 했다. 아무리 같은 주제로 글을 쓴다한들 사람이 유일성을 가진 이상 그게 같은 글이 될 수 있겠느냐는 그의 말에 얼마나 많은 글쟁이들이 위로를 받았을런지. [※[허버트 쾌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 [바벨의 도서관]) 그런 그 앞에서 기본적인 자기 회의와 성찰을 해보지 않는다면 차마 어디 가서 글을 쓴다, 책을 읽는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