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전쟁 이후 미래 세계에서 살아남은 늑대인간들의 야성(野性)인 울음소리(野聲)를 회복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적 세계관을 시극의 형식을 통해 우화적이며 부조리하게 품고 있는 작품!
극작가로서 김경주가 직접 정리한 줄거리는 이렇다. 1막. 엄마 늑대의 돈을 훔쳐 밖을 떠돌던 아들 늑대가 두 팔이 없이 돌아온다. 어머니는 도대체 팔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물어보고 아들은 어머니가 임신중에 먹은 살모사 때문에 팔이 태어날 때부터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집 나가서 만나게 된 여자 이야기와 앞으로 무슨 짓을 해서 먹고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둘은 말씨름을 한다. 무능한 자신과 공장에서 두 팔을 잃고 그 보상금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다 떠나버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즈음에, 엄마 늑대가 낳은 새끼 늑대들이 배고픔에 낑낑거린다. 아들은 갑자기 창밖을 향해 긴 울음을 토해낸다. 그리고 엄마 늑대의 품안으로 파고들어 젖을 빨기 시작한다. 2막. 다시 찾은 엄마 늑대의 집, 아들은 다른 사냥감을 물고 등장한다. 엄마는 새끼 늑대를 판 돈을 세며 좋아하다가, 아들의 방문에 당황한다. 하지만 아들이 사냥터에서 개처럼 일하다가, 주인 몰래 훔쳐온 사냥물에 마냥 신이 난다. 아들의 무용담을 듣다가 기쁜 마음에 사냥물을 확인하던 중 엄마는 놀라움에 휩싸인다. 그건 다름 아닌 예전에 집을 나가 떠돌던 남편 늑대였던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에 공황상태에 빠져들고, 어머니는 늑대를 냉장고에 잘라 넣고 감추려 한다. 이때 등장하는 임신한 아들의 여자 ‘쥐’와 먼 미래에서 온 경찰들. 집은 발칵 뒤집히고, 아들은 경찰에 끌려가기 전, 어머니와 마지막 성교를 나눈다. 자신이 떠나고 나면 먹고살 길 없는 어머니에게 마지막 생계수단인 ‘씨’를 주려는 것이다. 그리고 경찰에게 끌려가는 아들. 아들은 긴 울음을 토해내고, 엄마는 밑을 닦다가 자궁 깊은 곳에서 울리는 아들의 울음소리를 듣게 된다. 3막. 아들이 떠나고 난 후, 집은 이제 아들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 ‘쥐’가 차지하게 된다. 눈을 잃은 엄마 늑대는 앵벌이를 하며 돈을 벌어오고, 아들의 여자는 엄마를 생계로 구박하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여자는 출산 시기가 훨씬 넘었는데도 뱃속에서 나오지 않는 아이가 두렵기만 하다. 아들의 여자는 엄마 늑대를 밖으로 내보내고, 벽장 속에서 살모사가 든 병을 꺼내 마시려 할 즈음, 엄마 늑대가 소리치며 등장한다. “그 아이는 아들의 우주야. 난 아들과 똑같은 울음소리를 가졌어. 보여…… 보여.”
시와 극의 원형적 결합, 이것이 바로 ‘시극’이라는 거다!
이 줄거리는 이렇게 짧게 다시금 정리된다. ‘자해공갈단의 우두머리로 몸을 팔고 새끼를 팔아 삶을 연명해가는 엄마 늑대와 아들 늑대의 이야기’라고. 먹고살 걱정에 우울한 늑대 모자의 모습은 가난한 우리네 소시민과 별다르지 않는데 그래서일까. 이 희곡은 술술 읽히다가도 꾹꾹 명치끝을 누르는 듯한 통증을 일으키게 하여 책장 넘기는 손끝을 무디게 만들곤 한다. 쉽다가도 어려운 그것, 알다가도 모른다할 그것, 그것이 우리네 인생을 비유하는 말임을 아는 이라면 이 희곡의 대사 곳곳에 빈번히 밑줄을 긋느라 바쁠 것이다. 희곡의 몸뚱이로 시극의 옷을 걸쳤기 때문이다.
한국 문학사에 있어 희곡이라는 장르는 폐사 직전이자 아사 직전이라 할 만큼 외면되어온 것이 사실인 바, 더군다나 이 작품은 ‘시’라는 장르의 상징성과 비유성, 특히나 어법에 있어 특유의 분절된 문체가 생생히 살아 있는 ‘시극’으로 그 접근성에 있어 보다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시의 울림이 주는 집약적인 아름다움을 동시에 맛볼 수 있기에 더한 끌림으로 다가왔던 건 아닌가 싶다. 시극만의 매력을 정의하고 정리한 다음과 같은 김경주의 글이 이 희곡을 이해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시극은 문학의 장르 안에서 레제드라마로서 여전히 유효하다. 공연을 전제로 하는 대본으로서의 기능성뿐만 아니라 희곡으로서의 중요성 또한 크다. 엘리엇의 『캣츠』 『대성당의 살인』, 로르카의 『피의 결혼식』 외 고대 비극의 여러 작품은 여전히 중요한 시극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시극은 시어가 가지는 함축성이나 리듬 못지않게 서사 속에서 침묵의 질을 주요하게 다룬다. 즉 말해지는 것보다 말하여지지 못하는 것에 주목한다. 시는 언어보다 언어 너머의 세계에서 그 본래성을 찾아왔으며 시극은 언어로 공간을 만들지만 그 공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시적 언어로 공간을 비우는 작업에 그 고유성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극의 장소는 언제나 세계가 아직 만나지 못한 새로운 공간이 태어나는 곳이다. 수많은 극시인들은 새로운 공화국에 자신의 시를 산란해왔다.
-서문 「이 세계는 기형이다」 중에서
희곡은 책이 되고 책으로 쌓여가야 힘을 얻는다!
오늘도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많은 연극인들이 무대 위에 오를 것이다. 그들의 손에는 저마다 대본이 들려 있을 것이고 그들을 보러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일회성으로 산화되고 마는 배우들의 대사에 아쉬운 탄성을 지르다 말 것이다. 왜 우리들의 희곡은 책이 되기 어려운가. 왜 우리들의 희곡은 배우들만의 교재로 쓰였다 버려지는가. 서울대 대학생 권장도서라는 사뮈엘 베케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고도를 기다리며』한 권 읽어놓고 희곡을 다 안다고 자신만만해하는 건 아닌가.
시인을 꿈꾸는 이들에게 시집이 가장 요긴한 교재였듯 극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희곡집은 가장 긴밀한 교재가 되어줄 것임이 분명하다. 다양한 스타일의 시집이 출간되기 시작하면서 우리 시단은 각양각색의 수종으로 풍요로운 시의 수목원을 이룰 수 있었으며 덕분에 독자들은 그 그늘 아래 자주 머물게 되었다. 나는 혼자 크는 희곡에 언니의 전례로 시를 꼽아주고 싶다. 경쟁하듯 출간된 수많은 시집들로 우리는 폭넓은 시의 저변 확대를 이룰 수 있었으니 활발한 희곡 출판의 분위기가 확산되면 연극의 저변 확대도 반드시 이뤄질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다.
어쨌든 책을 통한다는 건 남긴다는 뜻이다. 남기면 공유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공유는 고리가 되어 또다른 재미를 잇게 마련이다. 배우들 연기 잘하더라, 보면서 느낀 데다 배우들 대사 좋더라, 읽으면서 느낀 걸 더했을 때 보다 입체적이 되는 희곡. 그러니까 책이 있어야 희곡은 완벽해진다는 거다.
한국을 대표하는 문학전문 출판사에서 희곡에 관심을 둔 곳이 몇이나 있으려나. 안 된다고 우두커니 서 있는 게 아니라 된다고 밀고나가야 길도 나는 것이다. 희곡집은 문학계의 무모한 도전이 아니라 문학계의 이행하지 못한 의무 중 하나다.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이 책의 절반은 번역가 한성례 선생님의 도움으로 일본어 번역본이 차지했다. 여전히 연극이 왕성하게 공연되고 있는 일본에서 이 책과 이 연극은 어떤 반응으로 선을 보일까.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작가의 말
이 텍스트는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와 『기담』에 실린 몇 편의 시에서 이야기의 가능성을 토대로 출발한 희곡이다. 그 안에는 우리의 세계(언어)가 여전히 기형과 불구의 세계를 담고 있고 그것에 우리 삶의 구체성이 관계하고 있다는 작가의 세계관이 담겨 있다. 우리 모두는 원형(모체)으로부터 분리된 후 하나의 기형을 앓고 있다는 연속성에서 이 이야기는 가능성을 가지고 움직인다.
첫 시집과 두번째 시집에서 주목했던 ‘세계의 불구성’이란 관점은 그런 점에서 이생이 불구의 연속임을 인식하고 거기서 발견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연민과 비애를 ‘늑대의 울음소리와 야성’을 통해 극적 형상화를 시도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한 작품이 갖는 온도를 따라가면 작품에 등장하는 ‘유괴’ ‘불구의 다양한 이미지들-기억, 언어’의 양상들은 시극의 형식을 가지고 움직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극은 문학의 장르 안에서 레제드라마로서 여전히 유효하다. 공연을 전제로 하는 대본으로서의 기능성뿐만 아니라 희곡으로서의 중요성 또한 크다. 엘리엇의 『캣츠』 『대성당의 살인』, 로르카의 『피의 결혼식』 외 고대 비극의 여러 작품은 여전히 중요한 시극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시극은 시어가 가지는 함축성이나 리듬 못지않게 서사 속에서 침묵의 질을 주요하게 다룬다. 즉 말해지는 것보다 말하여지지 못하는 것에 주목한다. 시는 언어보다 언어 너머의 세계에서 그 본래성을 찾아왔으며 시극은 언어로 공간을 만들지만 그 공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시적 언어로 공간을 비우는 작업에 그 고유성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극의 장소는 언제나 세계가 아직 만나지 못한 새로운 공간이 태어나는 곳이다. 수많은 극시인들은 새로운 공화국에 자신의 시를 산란해왔다.
유럽이나 일본의 경우 문학 교육에 있어 희곡의 중요성은 그 뿌리가 깊다. 문학의 자장 안에서 인간을 성찰하고 인간의 표현을 이해하는 데 희곡이라는 장르는 대중과 함께 존재감을 깊게 잉태해온 것이다. 그런 연유로 우리 문학 교육에서 희곡이나 시극에 대한 이해와 감상의 부재, 공연 정보의 분말로만 이루어진 연극 잡지의 획일화는 시극이 대중으로부터 멀어진 결과를 초래해온 것도 사실이다. 희곡(시극)을 가까이 경험할 수 있는 지면의 부족이 아쉽다.
연극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는 2006년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에서 초연 이후 다섯 차례 이상 공연된 레퍼토리로서 꾸준히 관객을 만나왔다. 2008년에는 시인이자 일본문학 번역가 한성례 선생님의 도움으로 일본 잡지 『공작예술』에 특집으로 소개되었으며 현재 일본에서의 공연을 계획중이다. 여기 실린 일본어 번역본은 그러한 연계성을 염두에 두고 특별히 작업한 결과이다. 독자가 이 텍스트를 통해 시와 극의 멀어진 거리를 회복하고 희곡에 대한 애정을 가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작가로선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