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당신 죽음의 주인공인가?
당신의 신체와 죽음의 권리는 지금, 누구에게 있는가?
아버지의 노년은 풍요롭고 평온해 보였다. 웨슬리안 대학교 교수로 퇴직한 아버지와 예술적 재능이 풍부한 어머니는 지적이고 활동적인 노년 생활을 즐겼으며, 자기 관리에도 철저했다. 아버지에게 뇌졸중이 찾아오기 전까지, 아니, 여든한 살에 심박조율기를 달기 전까지는 그랬다. 느리게 뛰는 아버지의 심장이 제대로 기능하도록 시술받은 심박조율기는 아버지의 고통을 연장시켰고, 한 가정의 기반을 흔들었다. 최첨단 의학기술로 탄생한 심박조율기가 왜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 한 가정을 무너뜨렸을까? 그 후 딸은 왜 아버지가 죽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게 되었을까?
현대의학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익숙한 풍경이다. 존엄사, 안락사라는 이름으로 죽을 권리를 주장하는 환자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 하지만 이 책이 서 있는 지점은 조금 다르다. 인간의 존엄과 권리라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죽을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수명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질병의 고통에서 우리를 해방시켰다고 평가받는 현대의학의 손에서 죽을 권리를 되찾아 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저자는 인간의 신체에 과도하게 개입하여 우리의 신체적 자율권을 빼앗는 현대의학에 비판의 초점을 맞춘다. 늙는다는 것, 그로 인해 질병을 얻고 기력이 쇠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고 받아들여야 하는 순리이다. 하지만 의학의 발전은 노화를 치료해야 하는 질병으로, 반드시 고쳐야 하는 장애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기계 장치들은 몸의 의미에 변화를 초래했다. 몸은 이제 영혼이 거하는 사원이 아니라 여분의 부품처럼 제거, 변경, 대체 가능한 장기들이 모인 곳으로 변했다. 지혜, 사랑, 용기가 자리한 신비한 기관이자 단단해지고, 깨지고, 부드러워지고, 두드리고, 열 수 있는 마음이었던 심장은 단순한 펌프로 전락했다. 폐는 풀무, 신장은 체가 되었다. 전에는 죽음의 무대에서 임종을 앞둔 사람이 주역이었지만 이제 영웅은 의사로 바뀌었다.”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7년 동안 이어진 아버지의 투병, 어머니의 간병을 통해 현대의학이 우리 몸을 상대로 벌이는 놀랍도록 성공적인 전장 속으로 뛰어든다. 때로는 투사가 되어,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주관해야 하는 죄책감 깃든, 환자의 보호자가 되어 의료계 내부의 비뚤어진 관행과 경제적 유인이 어떻게 우리의 신체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전능한 절대자가 되었는지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아버지의 7년간 투병생활을 회고하면서 가족 간의 갈등과 화해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러나 이 책이 존엄사를 주장하는 뻔한 이야기에 머물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경제적 이윤을 위해 결탁한 의료계 내부의 비리와 문제점, 의료기술과 개인적 성취에만 매몰된 의료진의 과욕이 오히려 우리를 고통과 혼란에 빠지게 하고, 죽음의 의미를 변질시켰다는 날선 비판 의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적 제약이 치료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을 들으면 의사들은 모욕감”을 느끼겠지만, “주택모기지 공제가 주택 소유를 촉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인센티브와 그 반대되는 요인들, 즉 죽음을 지켜보는 불편함, ‘사망선고위원회’ 역할을 했다고 고소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전문가로서 실패했다”는 의료진들의 감정이 환자의 연령과 몸 상태를 감안하지 않은 채 심박조율기를 시술하고, 제세동기를 작동시키고, 위에 구멍을 뚫어 영양을 공급하게 만드는 등 과잉진료의 이유가 된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많은 사람들이 온갖 의료기기들이 즐비한 집중치료실에서 죽음을 맞으며, 죽는 순간까지 산소호흡기를 매단 채 가족과 마지막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현실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하고 있다. 과연 이것이 선진적인 의학 체계, 선구자적인 의학 연구진들이 원했던 결말일까?
첨단 의학기술이 난무하는 미로 속을 헤매는 우리
우리는 분명 첨단 의학기술로 많은 것을 얻었다. 수명은 비약적으로 늘어났으며 나이에 비해 훨씬 활동적이고 건강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발전이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노년이 늘어난 만큼 다양한 질환들(시력 감퇴, 관절 경직, 서맥, 혈관 막힘, 폐와 장의 기능 저하, 근육 약화, 신장 기능 저하, 뇌수축 등은 물론이고 치매 환자의 증가도 고령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이 우리를 습격하고, 병원과 의약품과 의료기기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의료비 부담은 가중되고(우리나라의 65세 이상의 노인은 전 연령층의 10.2퍼센트 수준이나, 의료비 비율은 32.3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과잉의료는 국가적, 개인적으로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킨다(“과잉치료로 인해 미국 의료체계가 지는 부담은 한 해에 1580억~2260억 달러로 추정된다. 노인들의 4분의 1은 인생의 마지막 5년 동안 간병비 및 의료비에 쪼들린 나머지 살던 집을 포함해 저축을 모두 써 버린다”). 그와 비례에 죽음에 대한 공포는 짙어간다. 인간을 치유하고 위로해야 할 병원과 의사들은 기계적으로 진찰하고 진단하고 치료할 뿐이다. “죽음이 닥치는 것은 의학적 실패로 간주되므로 예전과 같은 성스러운 통과의례는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다. 간호사들은 먼저 모니터를 살펴본 다음에야 환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의사들은 개별 인체장기를 다루는 기술적 전문가들이었고, 죽어 가는 환자나 그 가족들의 정서적 혹은 영적 필요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의료진이나 의료 지식과 격리된 고령의 환자, 불치병을 앓는 환자들 대부분은 공포와 무지와 희망 속에서 의료진의 처치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인다. 첨단 의학기술은 “죽어 가는 환자의 고통에 의료진이 둔감해지도록 만들었고 건강 회복 없이 죽음만을 미루기도 했다. 또한 일부 의사와 환자들에게 비현실적인 불사의 희망을 일으키는 동시에 오늘날까지도 의사들과 환자들 사이에 이어지고 있는 불신을 심었다. 훌륭한 기술적 기량을 갖췄지만 정서적인 의사소통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은 의사가 양산되었고, 사경을 헤매는 환자에 대한 의사의 윤리적 역할 변화를 두고 문화적 공감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무엇보다 연명치료와 과잉치료가 초래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자율권을 빼앗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훼손시킨다는 데 있다. 이 책에서도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은 뇌졸중에 걸린 아버지 자신이 아니라 저자인 딸과 부인이다. 남은 생에 대한 선택권 없이, 어떻게 살고 싶다는 의사 표현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아버지는 죽음을 향해 간다. 죽음을 택하든, 투병을 택하든 그 선택에 있어 자신의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타의적인 삶이었다. 그런 희망 없는 치료 속에서 갈수록 피폐해지는 가족들의 삶 또한 외면할 수 없는 문제다. 불치병에 걸린 환자의 가족,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환자를 둔 보호자의 입장에서 언제 치료를 중단해야 하는지, 이젠 됐다고 언제 의료진에게 말해야 하는지를 결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을 맞는 방식과 시점을 결정해야 하지만 무엇이 최선이고,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 도움을 주는 전문가도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환자의 가족들은 깊은 “죄책감과 종교적 갈등에 시달리고, 환자가 겪는 고통에 번민하고, 가망이 없는데도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환자의 배우자와 자녀들은 비극이 발생하기 전에는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던 영적이고 법적이고 의학적인 질문들을 숙고해야 한다. 가족들에게 의사의 말에 반대할 권리가 있는가? 치료를 계속 해달라고 할 권리가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리 고통을 받더라도 생명 연장을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신의 뜻인가? 치료받기를 거부하면 그것은 자살인가? 치료하기를 거부하면 살인인가? 그것은 죄인가? 사랑하는 사람이 의사를 밝히지 못할 때 가족들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이런 질문 속을 지도 한 장 없이 헤매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저자 또한 만약 의사가 아버지에게 심박조율기를 달기 전에, 수술 후 환자의 인지 능력과 신체 활동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의학적 소견을 좀 더 풍부하게 제공했더라면, 심박수가 느려지는 등의 노화 현상을 굳이 첨단의술로 치료해야만 하는지, 또는 환자가 전신 마취를 견딜 수 있는 연령인가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하고 다양한 정보를 주었더라면 아버지의 남은 생이 본인과 가족들에게 그토록 고통스러웠을까에 대해 반문한다. 저자는 죽음을 의료의 실패로 간주해 환자에게 끝없이 새로운 치료를 권하는 의료계 내부의 오래된 관행, 소송을 피하려는 병원의 이해관계가 죽음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환자와 보호자의 공포와 결부되면서, 자연사를 평온하게 받아들이던 예전의 미덕이 사라졌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의료계와 의료진의 과욕, 그리고 환자와 보호자들의 무지와 혼란이 의료기기업체나 제약업체의 경제적 이득과 맞물리면서 관련 산업은 의료계 내부로 과감하게 진입하여 시장을 독점하고 사실상 가격 결정권을 갖게 되었다. 이런 비대화되고 왜곡된 시장으로 인해 심박조율기를 비롯한 신생 의료기술과 최첨단 제약품들은 사실상 아무 견제도 받지 않고 병원, 의사, 환자 들에게 전달된다. 이 업체들은 의사들과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수백만 달러의 로비를 벌이고, 수명 연장이 장밋빛 인생을 약속하는 것인 양 소비자들에게 상품을 과대 선전한다. 우리의 신체가 수익성을 논하는 격전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빠른 의학’에서 ‘느린 의학’으로
저자는 우리 몸을 성장판 삼아 증식하는 이런 의료기술을 ‘빠른 의학Fast Medicine’이라고 칭하면서, 그 반대편에 ‘느린 의학Slow Medicine’이 있다고 소개한다. 이탈리아의 심장병 전문의 알베르토 돌라라Alberto Dolara가 2000년에 발표한 논문에 등장하는 ‘느린 의학’은, 빠른 의학처럼 급히 처방된 검사 및 치료 중심의 치유가 아니라 “슬로푸드와 마찬가지로 억제, 평온을 중시하며 무엇보다 시간을 들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의료기술이다. “의학적 처치에 따르는 정서적이고 물리적인 비용을 따지는 시간, 새로운 방식과 기술을 평가하는 데 들이는 시간, 종말이 가까워졌을 때 광적인 처치를 중단하고 환자 및 그 가족의 전반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쏟는 시간을 중시한다.”
저자는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빠른 의학’에 의한 연명치료가 아니라 환자에게 인간적이고, 현실적이고, 적절한 치료를 하는 고전적 방식의 ‘느린 의학’이라고 이야기한다. “공포에 질려 응급실로 이송하는 일, 준비되지 않은 가족들, 수십만 달러에 달하는 공공비용 및 개인비용 허비, 환자의 소생술 거부 의향 및 치매를 고려하지 않는 것, 전에 한 번도 가족들을 대면한 일 없는 의사가 노인이 죽어 가는 현실을 직시해 진실을 말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무익한 치료를 행하기에 바쁜 것. 그것이 ‘빠른 의학’에 의한 죽음, 질질 끌면서 많은 비용이 들고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기는 죽음”이라고 단정한다. “과잉치료의 해독제는 부족한 치료가 아니라 적절한 치료”다. 이런 치료는 “몸은 도저히 고칠 수 없다 해도 가족을 위한 치유, 환자의 영혼을 위한 치유”를 가능하게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호스피스 및 연명의료이며, 죽고 싶다고, 이제는 그만하고 싶다고, 심폐소생술을 받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연명치료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자율적인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물론 이것은 치료 비용에 대한 부담에서 오는 반강제적인 선택이 아니라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수긍하는 ‘죽음 교육’에 의한 자발적 선택이어야 한다.
저자는 의료계 내부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난장판의 근본적 원인을 “죽음이 면전에 닥칠 때까지 죽음과 얽히는 것을 꺼리는 우리 문화 내부”에서도 찾는다. 죽음과 자연사를 예전 우리 선조들이 그랬듯, 다시 성스럽고 친숙한 것으로 만드는 길을 발견해야 자신의 죽음에 직면할 용기를 회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삶의 종말기에 이르렀을 때 기술적 의료가 우리의 공포 및 무지와 계속 결탁하면서 거기에서 이득을 취할 것이다. 죽음이 닥치기 훨씬 이전부터 죽음을 준비하는 새로운 절차들을 만들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공포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면서 죽음을 영원히 미룰 수 있다고 암묵적으로 약속하는 목소리에 계속 넘어갈 것이다.”
‘좋은 죽음’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이 책은 과도한 연명치료가 한 가족의 삶을 어떻게 황폐화시키는지, 죽을 권리를 빼앗은 최첨단의학기술이 삶을 어떻게 인위적으로 연장하며 수많은 갈등과 폐해를 낳는지 파헤치고 있다. 저널리스트 출신의 저자는 의료계와 관련 산업 내부의 문제를 짚어내고 둘 사이의 밀월을 폭로하면서, 현대의료체제가 환자와 환자의 가족들을 위한 치유에 집중하지 않고 경제적·재정적인 수익에 몰두하고 있다고 고발한다. 그런 날카로운 비판의식의 저변에는 고통 받는 부모를 바라보는 딸의 사랑, 본질적이고 거대한 질문 앞에서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이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이 책이 예외적인 일을 겪은 한 가족의 회고록으로만 평가받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런 사적인 경험에서 확장된 공적인 비판의식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좋은 죽음’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환자의 이름도 잘 알지 못하는 의사, 아무 의미 없이 수명만을 연장시키는 차가운 현대의학에서 우리의 신체와 삶에 대한 결정권을 되찾아올 수 있다. 그 길은 “그리 쉽게 찾을 수 없고 출입문에 잡초가 우거져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직관과 사랑에 의지해, 주위의 모든 도움을 긁어모아, 자신의 도덕적 나침판을 사용해 그 길을 찾아야 한다.” 삶이란 무엇인가, 늙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가 의사와 간호사, 우리에게 인생의 가장 중요한 화두로 흘러야만 가능한 일이다. 내 몸이 나의 것이듯, 내 죽음도 나의 것이라는 권리의 회복. 그것만이 ‘좋은 죽음’으로 가는 험난한 길의 나침반이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