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미군 탱크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이 무죄평결에 이르자, 그해 11월 자발적인 촛불시위를 통해 그 파문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사건은 피의자와 미군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을 넘어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의 개정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해방 후 처음으로 우리 사회에서 ‘반미=위험’ 콤플렉스가 무력화되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졌다. 이러한 반미의식의 고조에도 불구하고 미국식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의 숫자가 세계에서 가장 빨리 증가하는 나라 또한 한국이다. 촛불시위를 마치고 스타벅스에 들러 커피를 마시는 우리의 모습은, 간헐적으로 표출되는 반미감정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 문화가 여전히 우리 사회를 압도하고 있음을 반증해 준다.
이와 같이 근대 서구문명의 전 세계적 지배를 뒷받침하고 있는 문화적 기제의 핵심이 바로 ‘서구중심주의’이다. 궁극적으로 서구중심주의는 비서구인들로 하여금 서구문명이 우월하고 보편적인 것이라는 관념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서구의 문화적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아울러 비서구인들은 서구의 세계관, 가치, 제도 및 관행을 보편적이고 우월한 것으로 인식하여, 그것을 욕망하는 동화적 사고를 지니게 되고, 또 스스로를 주변인화함으로써 자기비하와 자기부정의 의식을 내면화하게 된다.
이러한 서구중심주의는 우리의 일상생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학계의 지배적 현실이기도 하다. 국내 학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인문사회과학 대부분이 역시 지난 1세기 동안 서구학문의 영향에 따라 기본틀이 변형?주조되어 왔기 때문에 ‘서구중심주의로의 매몰’이라는 식민성이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이는 오늘날 ‘학문적 문제의식의 서구화’, ‘서구 이론에 따른 한국 현실의 동화주의적 해석’, ‘서구중심주의에 의한 한국 현실의 주변화’라는 구체적인 폐해로 나타나고 있다.
서구중심주의의 개념/역사적 전개 과정 밝히고, 중화주의와 서구중심주의의 비교 검토
먼저 제1부에서는 서구중심주의의 개념을 분석하고, 그 역사적 전개과정을 살펴본 후, 서구중심주의를 중화주의와 비교 검토하고 있다.
이 책의 핵심개념이 ‘유러센트리즘(eurocentrism)’을 서구중심주의로 옮긴 이유를 밝히고, 서구중심주의의 개념을 ‘서구우월주의, 서구보편주의/역사주의, 문명화/근대화/지구화(?)’라는 세 가지 명제로 압축하며, 나아가 서구중심주의를 그 유사개념들과 비교, 검토하고 있다.
그리고 서구중심주의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중심주의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개념과 사상들(유럽, 기독교, 계몽주의, 무명과 진보, 인종주의, 국제사회, 근대화, 지구화 등)을 중심으로 고찰한다.
또한 오늘날 우리 사회에 군림해 온 서구중심주의를 전통시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경험했던 중국중심주의와 비교, 검토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이 작업은 우리 사회의 바람직한 문화적 정체성을 모색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는 오늘날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오늘날 우리 사회가 여전히 안고 있는 중화주의의 부정적 유산을 청산할 필요가 있고, 둘째, 21세기 세계의 거인 중국의 재부상 전망과 관련하여 우리 사회는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물론 중화주의의 부활을 경계하는 양면적 자세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양자의 비교를 위해 먼저 중화주의의 개념, 역사적 기원과 전개과정을 간략히 서술한 후, 이어서 양자를 ‘개념’, ‘기원, 우월성의 근거 및 적용범위’, ‘인종주의’, ‘핵심적 종교(이념체계)와의 관계’, ‘전개과정’, ‘국제질서관’, ‘고상한 야만’이라는 일곱 가지 항목을 통해 비교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로크, 헌팅턴 등 서양 사상사에 나타난 서구중심주의 분석
제2부에서는 서구중심주의의 전개 과정을 서양 사상사를 중심으로 검토하고 있다.
먼저 서구중심주의의 근대적 전개를 본격적으로 논하기에 앞서 그 연원을 구성하고 있는 그리스 정치사상, 그 중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사상을 ‘그리스중심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서구중심주의의 사상사적 전개과정을 대표적인 서구 근대 사상가, 예를 들면 로크, 몽테스키외, 헤겔, 마르크스, 밀, 베버 등을 중심으로 간략히 고찰한다.
그 다음으로 마르크스를 제외한 이들 대부분은 크게 자유주의 사상가로 분류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자유주의 사상의 선조로 인정받고 있는 로크의 사상을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로크는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정복을 정당화하기 위해 유럽 문명과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를 비교한 바 있는데, 저자는 여기에서 서구 근대성의 초보적인 삼위일체적 결합[기독교, 사유재산(농업자본주의), 정치사회(자유주의)의 결합]이 잉태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근대성에 대한 이러한 로크의 초보적인 삼위일체적 결합은 2차 대전 이후 미국 학자들이 전개한 자유주의적 근대화론에서 좀더 완숙한 형태(기독교, 자본주의, 자유민주주의의 결합)로 재정식화된다. 이를 밝히기 위해 저자는 헌팅턴의 자유주의적 근대화론에 나타난 서구중심주의를, 동아시아의 민주화에 대한 그의 주장, 즉 기독교, 유교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그의 논변을 중심으로 비판, 분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보수 이념은 없다?’ : 서구중심주의가 한국정치사상에 미친 영향 규명
제3부에서는 서구중심주의가 현대 한국의 정치사상을 조형, 해석하는 데 미친 영향을 살핀다. 논의의 중심은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한국적 전개 과정인 보수주의와 민주주의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주의, 보수주의에 대해서는 비정상적인 것(일탈), 부족한 것(부재)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인데, 먼저 저자는 이러한 경향이 서구중심적 시각의 소산임을 적시한다. 서구 보수주의나 민주주의와의 차이를 일탈이라고 부당하게 전제하지 말고, 그 차이를 초래한 다양한 역사적, 정치적 조건과 변수를 여러 차원에서 고려하여 균형 있는 설명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자기비하적 태도에서 벗어나 더욱 창조적이고 역동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조건과 전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에서 꼭 살펴야 할 중요한 지점으로 저자가 꼽는 것이 바로 근대화의 조건 및 경험의 차이이다. 다시 말해 근대화를 자율적, 내생적, 선진적으로 진척시킨 유럽의 근대화와 근대화를 타율적, 외생적, 후발적으로 떠맡은 제3세계의 근대화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서 서구 보수주의, 민주주의와의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먼저 저자는 서구에서 출현한 보수주의의 개념과 역사적 전개과정을 살피고, 서구와 다르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우리 보수주의의 특징과 이념적 위상을 1987년 민주화 이전 시기를 중심으로 좀더 상세하게 검토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보수주의의 발전 가능성을 보수세력과 진보세력 간의 세력균형, 전통사상의 긍정적 전유에서 찾고 있다.
다음으로 저자는 서구중심적 세계관에 따라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보수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이어서 후발국인 아시아 국가의 ‘신생’ 민주주의를 서구 민주주의와 비교해서 일종의 일탈에 해당하는 ‘아시아식 민주주의’라고 규정하는 서구학자들의 입장이 과연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비판, 분석하고 있다.
다중심적 다문화주의와 혼융적 담론 전략으로 서구중심주의 극복해야....
제4부에서는 서구중심주의가 초래한 학문적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 시도된 담론 전략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 그 극복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세계사적 조건과 우리나라에서 정치사상을 연구하는 학자가 담당해야 할 과제를 탐색, 정립하고 있다.
먼저 저자는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시도, 구상된 담론 전략들을 동화적, 역전적, 혼융적, 해체적 전략으로 나누어 각각의 장점과 한계를 면밀히 분석하고 있다. 나아가 이 전략들이 다른 형태의 중심주의(중국중심주의, 백인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 부르주아중심주의)에 대한 대항과정에서도 유사하게 표출되어 온 모습을 간략히 일별한다. 그리고 서구중심주의의 극복과 관련하여 원칙적으로 여러 전략의 다원주의적 활용을 옹호하지만, 전반적으로 혼융적 전략이 유효함을 보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서구중심주의의 극복이 가능한 조건으로 지구화에 따른 지구적 의식의 출현, 다중심적 다문화주의와 이를 가능케 할 교차문화적 대화의 필요성, 그리고 그 출현을 가능케 할 정치?경제적 조건으로 동아시아의 부상을 논하고 있다. 아울러 다중심적 다문화주의적 상황에서 혼융적 담론 전략의 추진을 위해 정치사상 연구자들이 수행해야 할 지적 작업으로 ‘전통의 현대화’라는 과제를 강조하면서 책 전체를 마무리한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드리워져 있는 서구중심주의의 잔재와 그 극복의 방안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는 이 책은 학문적 정체성과 지향점을 시급히 모색해야 할 학계 전반에 신선한 자극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