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이다. 이제껏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소개해왔지만 이제는 학생이 아니기에 소개할 때 '사람'이라는 단어를 쓰는게 낯설다. 영화라는 매체는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매체이다. 물론 영화뿐 아니라, 매체뿐 아니라 그 어떤 것이라도 인간이 만든 것은 모두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중요하다. 영화에서는 감독이 중요하고 문학에서는 작가가 중요하다. 글이라는 것도 글쓴이가 중요하다.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은 사회에서, 그래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사회를 안정적으로 보고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사회는 불안정하기 때문에 문제가 나타난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난 명백히 후자다. 그래서 난 자기계발서를 싫어한다. 개인의 노력으로 원하고자 하는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고? 10명이 노력하면 1명만 할 수 있게끔 정해진 사회룰에서 10명이 똑같이 노력해도 9명은 패배자가 된다. 사회는 패배자를 배출해선 안된다. 최근들어 영화를 감독별로 정리를 하고 있고 문학조차 작가로 나누어서 한 사람이 만든 모든 작품을 연달아보고 있다. 인문학쪽에서는 '오찬호'라는 작가의 책을 전부 구입하여 읽고 있다. 이 책과 <왜 그 남자는 이상해졌을까?>를 읽었고, 현재는 <대통령을 꿈꾸던 아이들은 어디갔을까>를 읽고 있다. 저자가 주장하는 만든 이야기들은 나와 비슷한 생각이 많고 다르더라도 근본적인 문제는 같은 경향으로 보는 시각이 많은 부분 존재하기 때문에 읽어나가면서 저자가 조사한 사례와 주장으로 인해 좀 더 설득력을 갖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책의 논쟁은 '자기계발서'에 뿌리를 둔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저자는 문제를 사회의 문제로 보는 경향이 있다. 다른문제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책의 제목에서 보듯 차별에 찬성하는 경향을 사회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난 그 뿌리는 한국의 자본주의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물론 저자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내용 곳곳에 보인다. 저자의 주장처럼 자본주의를 택한 나라에서 차별은 당연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차별의 격차가 심하며 인간의 존엄성까지 침해받는 일은 드물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한국의 자본주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저자가 사례를 이야기 할 때마다 저건 '자기계발' 이전의 '한국의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도 그 문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 뿌리를 지적하기보다는 그 뿌리에서 튀어나온 줄기를 지적한다. 난 이 부분이 상당히 거슬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주장하는 '자기계발'의 논리에서 볼 수 있는 몇몇 사례들을 보면서 수긍했다. 특히나 인용구같은 경우는 저자의 주장을 좀 더 설득력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확실했다. 저자의 주장은 사례를 들려주면서 확고히 해나가지만 간혹 그 사례가 너무나 일반적이고 우리가 자주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글은 분명하게도 충격요법이 필요했다. 그것이 인용구가 대신해주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이러한 글을 계속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사실상 저자가 책에서 주장하는 해결법은 직접적이지 않다. 오히려 저자가 TV프로그램에 나와 '정치참여를 해야합니다'라고 주장했을 때 그 자체가 좀 더 직접적이고 와닿았다. 사실 저자가 주장하는 바를 나 또한 주위사람들에게 주장해봤지만 돌아오는 말은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는데?'였다. 난 그 말에 충격을 받고 나 스스로 내린 답 또한 정치에 참여하는 방법밖엔 없다고 답을 내렸고 이제 약 한달가까이로 다가온 대선이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저자가 대학강사로 나가면서 무수히 많은 대학생들을 봐왔겠지만 난 예술계열의 학교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야구잠바의 정치학, 공무원을 준비하는 친구들은 극소수로 접했다. 물론 학점관리 또한. 내가 1학년 때는 학과행사가 있으면 출석률이 20%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졸업할 때가 되서는 80%로 급증가하는 현상을 보면서 씁쓸했다. 1주일 동안 고생해서 영화를 찍고 학과 친구들이 모두 참석해 영화들을 보고 즐기는 영화제 행사가 몇년 전에는 고주망태가 되어 그 동안에 스트레스도 풀고 못살게 굴던 선배한테 폭탄주를 말아주며 복수 아닌 복수를 하는 행사다. 그런 행사를 이제는 내일 출석해야 된다는 이유로 영화만 보고 집에 가버린다. 그런 현상을 보면서 이제 예술계열에 친구들도 졸업하고 현장에 들어간다거나(현장에선 학점이고 졸업장이고 스펙이고 전혀 쓸모없는 종이쪼가리다) 계속해서 직접 작품을 만들기보다는 살짝 뒤로 빠져서 회사에 입사하거나 진로의 방향을 틀어버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진로의 방향을 틀 생각이 없어도 저자가 주장하는 '불안'이라는 관점에서 그러는 친구들도 상당히 많다. 학과 분위기가 그렇게 바뀌다보니 점점 출석에는 민감에 진다. 학생이 학교에 나가는 것이 정말 당연한 일인데도 나에게 대학생활이란 정말 재미있게 놀고 대학가면 해보고 싶은 것을 다해봤던 공간이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강제하는 학점채우기보다 우리 스스로가 영화를 보고 이야기하고 영화를 찍으면서 고민하면서 공부했다. 사실상 이야기하자면 대학의 문제는 엄청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답게 살기 위해 죽어라 노력하는 그 현상이 예술계통 친구들에게도 보인다는 점이 씁쓸하다.
재작년과 작년에는 학과 통폐합, 프라임 사업, 구조조정 등 여러가지 문제들이 이슈가 되었지만 그 이슈를 보면 저자의 주장을 완벽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홍익대 본캠과 분교캠만 보더라도 같은 학과 합치기가 들어가면 학생들이 반대하면서 주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입결의 자료이다. 내가 볼땐 멍청해도 그런 멍청한 짓이 없지만 그들의 문제가 아닌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것이 문제다. 학과 합치기의 가장 큰 문제는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 바탕으로 '돈' 때문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대학'은 취업으로 향하는 하나의 관문이 됐다. '돈' 때문에 멀쩡한 학과를 없애버리고 '돈'때문에 커리큘럼을 바꿔버린다. 여러학교가 그 문제에 봉착했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각종 시위에도 학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본'에 침몰 당하는 '대학'을 비판하는 것이 아닌,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고 주장하면서 학생들 모르게 '독단적'으로 진행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닌 단지 아우성치면서 그들의 주장은 분산되고 결국 예민하게 곪아썩은 설국열차로 향한다. 난 학교 막바지에 통폐합에 대해 시위를 했고 여러 문제들에 대해 참여했지만 어떤 친구는 학교는 기업이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주장을 했다. 나는 저자가 주장하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1차적으로 정치참여가 이루어져야 하고 그 정치참여는 사람의 인식을 바꿔야한다. 정치참여가 법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식을 바꿔야 한다. 법은 지금도 존재하고 그 법망을 피해가는 것도 존재한다. 법은 인간이 지켜야 할 최소한이다. 이 사회는 최소한으로는 바뀔 만큼의 문제가 아니다. 대학은 기업이 아니다. 대학은 교육기관이고 정부가 잘못했을 때는 비판하는 역할까지 가능한게 대학이다. 그리고 그 대학을 다니는 사람은 20대다. 차별에 찬성하고 동조해선 안된다. 미국의 경제학자가 주장했다. CEO 와 가장 하위 직원과의 임금차이가 20배 이상나면 불평등하다고 인식한다고. 우리나라 삼성 추정치는 150배다. 영화판이나 CF를 따져보았을 때도 150배에서 300배의 차이가 존재한다. 자본주의는 차별을 동반한다. 당연히 능력주의는 인간이 선택한 최선의 제도다. 더 노력한 인간은 더 보상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헤치면 안된다. 또한 그 차이가 심하면 안된다. 부동산 부자 TOP10안에 드는 사람들은 아파트를 600~700채정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누군가는 따뜻한 물이 안나오고 화장실이 밖에 있는 집에서 사는데 말이다. 이러한 현상을 노력의 차이라고? 참 지랄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