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의 등장, 그리고 절망 속에서 일군 위민사상
정도전은 우왕 원년(1375) 5월 개경에서 나주까지 머나먼 귀양길에 오른다. 그가 귀양길에 오른 것은 친원정책을 주장하는 전통적인 보수파에 맞서 친명정책을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려는 외교정책을 두고 신구 세력이 갈등하고 있었는데, 이인임, 경복흥 등의 구세력은 친원정책을 주장했고,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의 신세력은 친명정책을 주장했다. 신세력의 주장은 공민왕의 유지를 계승해 원나라의 속박에서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친원 세력인 구세력은 계속 북원과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신세력의 반대 주장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정도전에게 원나라 사신 접대를 명했다. 격분한 정도전은 경복흥을 찾아가 “나는 원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오든지, 아니면 오라 지워서 명나라로 보내겠소”라고 따진다. 이를 항명으로 판단한 이인임, 경복흥 등이 정도전을 유배형에 처함으로써 정도전의 인생은 급전직하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렇게 유배형에 처해진 정도전은 장장 9년 동안 유배·유랑 생활을 하게 된다. 살아 있는 권력의 표적이 되어 복권될 희망을 점점 잃어가던 그의 괴로움과 외로움을 달래준 사람은 뜻밖에도 유배지의 부곡민들이었다. 편견의 시선 없이 온정을 베풀어주고, 책이 아닌 경험으로 습득한 인생의 지혜를 알려준 부곡민들 덕분에 그는 마음속에서 자라나던 절망을 버리고 희망의 싹을 틔우게 된다. 그가 발견한 희망은 바로 백성, 곧 민중이었다. 다시 벼슬아치로 돌아갈 수 없는 사대부의 현실에 놓이게 되자 비로소 백성의 삶이 보였고, 백성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것이 고려 474년 왕조가 멸망하는 단초가 된다. 현실에서 절망한 한 지식인이 민중의 삶에 주목하게 되었고, 민중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정도전은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나 세상을 위해서나 승부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9년간의 유랑 생활에서 쌓은 사상을 실현할 무대가 필요했다. 그래서 정도전은 우왕 9년(1383), 승부수를 던진다. 바로 함주에 있는 이성계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결합은 단순히 불우한 지식인과 촉망받던 무장의 만남이 아니라, 극심한 양극화에 시달리던 고려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가진 지식인과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진 무장의 만남이었다. 이 만남은 그의 인생과 고려의 운명에 대전환점이 된다.
토지제도를 개혁하다
고려 말, 백성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겪고 있었다. 고려 말 권문세족들이 가진 토지의 크기는 산천으로 경계를 삼을 만큼 컸다. 그렇게 거대한 토지를 만드는 방법은 가난한 농민의 땅을 강탈하는 것이었다. 대다수 농민들은 권세가에게 땅을 빼앗기고 전호, 즉 소작인이 되거나, 권세가의 집에 자신의 토지를 기탁해 노비로 전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 〈부전〉에서 고려 말의 토지 상황을 “토지제도가 무너지면서 세력 있고 강한 자는 남의 토지를 겸병해서 농토가 끝도 없이 이어졌지만, 가난한 자는 송곳 꽂을 땅도 없게 되었다”라고 개탄했다. 또 《고려사》 〈식화지〉에는 “권세가들이 남의 땅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이라고 우기면서 주인을 내쫓고 땅을 빼앗아 한 땅의 주인이 대여섯 명이 넘기도 하여 전호들은 세금으로 소출의 8~9할을 내야 한다”라는 구절도 있다. 가난한 전호가 소출의 8~9할을 빼앗기고 어떻게 먹고살 수 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이 농장들은 국가에 세금도 내지 않았다. 그러니 국가로서도 여간 큰일이 아니었다. 국가에 세금을 내는 백성들이 권귀에게 투탁해 노비로 들어가 세입원이 줄어든 데다 막대한 땅을 가진 권귀마저 세금을 한 푼도 안 내니 국가는 가난해진 반면, 권귀들만 부자가 되었다. 백성의 불만은 점점 거세졌고, 부곡민들과의 교류를 통해 농민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정도전은 백성을 위한 새로운 토지제도를 구상하게 된다.
정도전은 대사헌 조준이 전제개혁, 즉 토지개혁에 관한 상소문을 올리게 한다. 1388년 7월, 조준은 “임금의 정사 중에서 경계를 바로잡는 것, 즉 토지제도를 바로잡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라면서 강력한 토지개혁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조준 등은 1389년 12월 다시 상소문을 올려 토지 문제에 대한 처리 방안을 이야기하고, 대대적인 양전 사업의 결과 총 50만 결의 토지를 찾게 된다. 그간 이 농지 상당수가 권세가들의 개인 소득이 되었던 것인데, 이것이 정도전, 조준 등의 역성혁명파가 새 나라를 개창할 물적 토대가 된다.
토지는 사회 구성원 전체가 나누어 사용해야 하는 유한재이므로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이 독점할 수 없다. 역성혁명파는 이런 당연한 진리를, 그러나 실천하기에는 너무도 힘든 진리를 실천한 것이다. 과전법은 이런 토대 위에서 공포되었다. 조선 개창 1년 전인 1391년 5월의 일이었다.
과전은 공전과 사전으로 나누었으며, 죽으면 반납해야 하는 토지이므로 토지의 소유권이 아니라 수조권, 즉 세금 받을 권리를 주었다. 조와 세에 대해서는 이렇게 규정되어 있다.
무릇 공전과 사전을 막론하고 1결당 조는 수전, 즉 논이면 조미 30말이고, 한전, 즉 밭이면 잡곡 30말인데, 그 이상을 제멋대로 거두는 자는 장죄, 즉 뇌물죄로 처벌한다.
무릇 토지를 점유한 자는 세를 나라에 납부해야 하는데, 논은 1결에 백미 두 말, 밭은 1결에 황두, 즉 누런 콩 두 말로 한다.
정리하자면, 국가에서 과전을 받은 벼슬아치는 관직 수행의 대가로 해당 과전 소출량의 10분의 1을 조로 걷고, 그렇게 받은 곡식 중 10분의 1을 국가에 세로 내는 것이 과전법의 요지였다.
또한 풍년과 흉년에 따라 세금의 양을 달리했다. 풍년과 흉년의 등급을 10등급으로 나누어 흉년 때 수확이 10퍼센트 줄어들면 조도 10퍼센트 감해주었다. 20퍼센트 줄어들면 20퍼센트, 50퍼센트 줄어들면 50퍼센트를 감해주었고, 만약 대흉년이 들어 수확이 80퍼센트 줄어들면 전액을 면제해주었다.
해당 농지의 수확이 몇 퍼센트 줄어들었는지 판단하는 것도 체계적이고 공정했다. 각 주현의 수령이 직접 가서 조사하여 이를 감사, 즉 지금의 도지사에게 보고하면 감사는 담당관을 보내 재심하게 하고, 감사와 수령관이 삼심하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또한 벼슬아치들이 수조권을 남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농민들의 경작권을 강력하게 보호했다. 농민의 경작권은 벼슬아치의 수조권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법적인 권한이다. 과전법에서는 농민의 경작권도 국가에서 법으로 철저히 보호했다. 높은 벼슬아치라고 마음대로 농민의 경작권을 빼앗을 수 없었다. 경작권이 사실상의 소유권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경작권을 타인에게 매매하는 것을 금지해 사전의 발생을 억제하고 농민생활을 보장하려 했다.
정도전은 당초 모든 백성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계민수전計民授田의 이상을 실현하려 했다. 그러나 구가세족의 반발과 백관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기 바랐던 이성계의 욕심 때문에 모든 백성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지는 못했다.
과전법, 조선 개창의 토대가 되다
과전법을 공포함으로써 역성혁명파는 왕씨 임금을 이씨로 바꿀 수 있는 기반을 획득했다. 과전법은 어떤 면에서 보면 새 왕조 개창을 지지하는 벼슬아치들이 큰 이익을 본 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려면 물적 토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500년 가까이 존속했던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개창하는데 개창 주도 세력만 이익을 본다면 저항이 강할 수밖에 없다. A라는 권세가가 차지하던 정치·경제적 이득을 B라는 신흥사대부가 고스란히 차지하고, 농민들의 처지는 똑같다면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도둑놈이다”라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면 구가세족과 온건파 사대부가 농민들을 부추길 때 농민들이 가담하게 되고, 격렬한 투쟁이 발생하는데, 이 경우 구세력이 이기기 쉽다. 그래서 역성혁명파 사대부들은 일반 백성에게도 이득이 되고 자신들에게도 이득이 되는 최대공약수를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과전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흥사대부는 과전법을 통해 농민들의 지지도 확보하고 새 왕조 개창의 물적 토대도 마련했다. 동시에 사전개혁으로 구세력의 물적 토대를 무너뜨렸다. 사전개혁으로 고려 말 농장들이 갖고 있던 불수조 특권을 폐지하니 국가로서는 세금이 늘어나서 좋고, 구가세족의 물적 기반을 해체해서 좋고, 백성의 지지를 확보해서 좋은 일거삼득의 방안이 바로 과전법이었다.
과전법은 또한 새 왕조 개창을 찬성하는 신진 관료들에게 경제적 기반을 제공했다. 사실 500년 가깝게 유지된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개창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또 개창했다고 해도 이를 유지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위기가 닥쳤을 때 목숨 걸고 싸울 수 있는 핵심 지지 세력이 필요했고, 문무반 벼슬아치뿐만 아니라 국가의 역을 맡고 있는 모든 백성에게 경제적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새 왕조 개창을 지지하는 세력을 크게 늘린 것이다.
조선 개창의 이념, 성리학
정도전이 고려 말의 혼란을 극복하고 새 왕조 개창을 주도하게 된 사상적 배경에는 성리학이 있었다. 끊임없이 토지를 확장해나가던 고려의 권문세족들은 나중에는 중소지주의 토지까지 침탈하게 된다. 그런데 중소지주인 사대부들은 지식인들이다. 일반 백성처럼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는 않는다. 지식도 있고, 벼슬도 있고, 어느 정도 경제력도 있다. 그래서 권문세족의 경제 침탈에 강력하게 반발하게 되고, 결국 이들의 토지 침탈을 용인하는 사회 구조가 문제라는 체제 문제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는 체제 내 지배 세력이던 사대부들이 체제 자체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변하게 된다. 고려 말 조선 초에 성리학이 체제를 전복하는 혁명사상으로 전환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성리학은 북송 시절 성립되기 시작한다. 북송의 지배층은 형세호形勢戶라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대토지 소유자로서 자기 농장의 전호들을 지배하고, 더 나아가 다른 중소 토지 소유자들까지 지배하려 했다. 송나라가 요나라나 금나라에 힘 한 번 못 써보고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군사력이 약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이들 소수의 형세호가 정치·경제 권력을 독점했던 계급 구조에도 큰 요인이 있다. 소수가 정치·경제 권력을 독점하면 그 사회는 망하게 되는 것이 역사의 이치다. 그래서 금나라에 쫓겨 양자강 이남으로 내려와 남송을 건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남송의 사대부란 정치적으로는 과거에 급제한 관료나 학문이 있는 학자를, 경제적으로는 수전농업에 바탕을 둔 중소지주를 뜻하게 된다. 대토지 소유자인 형세호에 맞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자신들이란 철학에서 나온 것이 성리학이기도 하다. 바로 이 대목이 고려 말의 신흥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가 된다. 모든 사상, 모든 역사적 현상에는 뿌리가 있다. 이 뿌리를 이야기하지 않고 현상만 이야기하는 것은 현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정도전의 삶은 현재의 우리를 비추는 거울
역사는 반성의 도구다. 역사서에 송나라 사마광의 《자치통감》이나 조선 서거정의 《동국통감》처럼 ‘거울 감鑑’ 자를 쓰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현재의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란 뜻이다. 옛사람들은 역사를 전철, 즉 앞서 지나간 수레바퀴라고 했다. 잘못된 길로 가다가 수레가 엎어졌던 시대를 교훈 삼아 현재의 우리를 돌아보고 미래의 길을 잘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정도전과 그의 시대’를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도전이 살았던 쉰여섯 해는 현재의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로 부족함이 없다.
한 지식인, 한 사상가의 전략으로 고려가 무너졌다는 것은 그만큼 체제 내에 문제가 많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런 문제가 비등점을 향해 달려갈 때 체제 교체의 기운이 싹트는 것이다. 정도전의 인생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근본적인 메시지는 ‘한 사회가 내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경우 체제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과 부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고, 이를 사회 내부에서 순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비등점을 향해 치닫게 될 가능성이 있다. 정도전의 인생은 그런 불행한 사태를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자신에게 배우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