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지에 서식하는 기생체, 히드라, 독수리 세 가지 형상을 통해
현대자본주의의 동학과 대안적 주체성을 설명하는 동물우화집
혼이 크면 클수록 동물성은 그만큼 더 크다.
현대의 디지털, 문화, 미디어 영역에서는
네트워크 공유지를 둘러싼 비물질 내전이 벌어지고 있다.
창조경제론의 본질은 공유지에 대한 공격과 착취이다.
‘동물몸’의 제거는 현대의 문화적 풍경 전반을 타진(打診)하기 위한, 특히 경제의 동물혼이 미디어스케이프와 문화생산의 새로운 공장들의 뒤편에서 어떻게 다른 형태들로 다시 떠오르는지 고찰하기 위한 예비적인 가설이다. 따라서 인간 본성의 동물적 측면이라는 문제는 급진 문화 및 지배 담론 양자의 비판적 마디로 고려되어야 한다. 동물몸은 오늘날 과학기술 물신주의와 디지털 소외 전반에서 자신의 본능적 힘들을 드러내며, 그 정치학은 평화 행동주의와 반포르노 십자군에 반대한다. 동물혼 개념은 이론, 예술, 행동주의라는 세 개의 헛된 고리들의 실종된 기반을 보완해 준다.
― 본문 중에서
동물혼(動物魂)이란 무엇인가?
동물혼은 “동물”과 “혼”의 조어로 이 책의 원문 제목 Animal Spirits의 번역어이다. 경제학자 케인스는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에서 “경제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고 예측할 수 없는 인간적 충동”을 ‘animal spirits’라 불렀다. 이는 흔히 ‘야성적 충동’으로 번역된다. 노벨상 수상자인 조지 애커로프와 로버트 쉴러도 금융위기 이후 『야성적 충동』(랜덤하우스코리아, 2009)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심리적인 요인”을 분석하면서 신케인스주의적인 요법을 주장한 바 있다. 이들에게 ‘animal spirit(s)’는 경제적 발전이 근거하고 있는 충동이지만 다스려져야 할 대상이다. 동물혼(야성적 충동)은 경제라는 틀 속에 포획되어 조절되고 균형을 이룰 때만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
파스퀴넬리는 케인스의 이 개념을 전용하여 그것에서 다중의 이미지를 이끌어낸다. 동물혼은 부정적인 힘이 아니라 역사를 추동하는 살아 있는 힘이다. ‘동물’은 오늘날의 세계를 생성하는 데 노동을 투여하는 모든 사람들, 즉 ‘다중’을 의미하며 ‘혼’은 다중의 ‘노동활동’ 전반을 포함한다. 디지털 창조(블로그, SNS, UCC), 예술활동, 다양한 지식노동·정보노동뿐 아니라 육체노동도 물론 포함된다. 이런 점에서 ‘동물혼’은 ‘다중지성’을 의미한다.
다중의 본성은 협력적이고 동시에 공격적이다
저자는 다중을 왜 동물로서 이해하려고 하는가? “다중은 선하다”는 통념을 뒤집기 위해서이다. 다중은 선한 것이 아니라 동물이다. 동물로서의 다중은 악하며, 악한 존재로서의 다중은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사보타주할 수 있는 부정의 힘과 혁신의 힘을 동시에 갖고 있다. 악하기 때문에 부정할 수 있고, 파괴할 수 있고, 혁신할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데모크라시(민주주의 democracy)를 데몬크라시(demoncracy)로 바꾸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동물혼의 강조가 휴머니즘을 대체하는 동물[보호]주의, 동물신화, 동물 권리 이데올로기를 창조하거나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동물혼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을 동물로 축소[환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의 분리를 중지시키려는 것이다. 저자의 의도는, 새로운 ‘동물우화집’의 구성을 통해 인간 동물의 몸을 전쟁터로 하여 치러지는 착취와 전복의 드라마를 밝히려는 것이다.
공유지에 대한 강력한 정치적 정의가 필요하다
파스퀴넬리는 이탈리아의 젊은 자율주의 이론가이자 문화활동가이다. 그는 안또니오 네그리, 빠올로 비르노,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 크리스티안 마라찌, 마우리치오 라짜라토 등 1970년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발전한 자율주의적 맑스주의(포스트오뻬라이스모)의 생각과 공명하며 현대자본주의 분석을 펼친다. 이 이론가들은 모두 인지자본주의, 기호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 등의 용어로 현대 자본주의의 새로움에 주목한다.
인지자본주의 시대에 경제적 전투의 주요한 무대는 공통적인 것(공유지)이다. 이때 공유지는 물질적인 “토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중의 욕망, 지성, 관계, 정동들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형성된 오늘날 자본 축적의 토대는 디지털 공유지, 네트워크 공유지, 문화적 공유지 등의 용어로 불린다.
파스퀴넬리는 우리가 공유지에서 작동하는 동물혼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공유지에 대한 관념적인 정의에 머무르고 있다고 지적한다. ‘정보는 비경쟁적’이고 ‘인터넷은 중립적인 공간’이라고 주장하는 디지털리즘이 한 예이다. 공유지에서의 착취는 지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자본은 공유지에 기생적 촉수를 내리고 잉여가치를 추출하고 있다. 금융(이자, 수수료), 부동산(이자, 지대), 지식(지적 재산권료), 임금 등과 관련하여 작동하는 이질적인 종류의 지대들이 존재한다. 다중과 자본의 동물혼의 각축이 펼쳐지는 전쟁터로 공유지의 동물우화집이 다시 서술되어야 한다. 그럴 때 새로운 정치학을 상상하기 시작할 수 있다.
현대 자본주의의 동학과 대안적 주체성을 치밀하게 분석하기 위해 저자는 세 개의 동물 형상을 다룬다. 첫째, 디지털 공유지(네트워크)에 기생하는 기업적 기생체, 둘째, 토지 및 문화 공유지(메트로폴리스)에 기생하는 젠트리피케이션의 히드라, 셋째, 미디어 공유지(미디어스케이프)에 기생하는 권력과 욕망의 독수리이다. 저자는 이 세 개념을 통해 흔히 “착한” 것, “무결한” 것으로 칭송받는 오늘날의 세 영역(디지털, 창조도시, 미디어)의 동물본성을 밝힌다.
디지털 공유지에 기생하는 기업적 기생체
자본주의는 부동산, 석유, 식량, 기반시설, 소통, 협력, 지식 등 모든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공유지 자원에 저장되어 있는 다중의 산 노동을 착취하는 기생체다. 예컨대 디지털 산업은 공유지에 서식하면서 동물혼의 창조성을 먹이로 기생생활을 한다. 네이버, 다음, 구글 등 대형 포털사이트들이 네티즌들의 자발적인 창조성을 이윤으로 탈바꿈시키는 일은 전형적인 디지털 자본주의 기생체의 작동이다.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회사들은 “불법” 파일 복제를 한편 용인하여 디지털 공유지에서 자사 프로그램 사용을 확산시키고, 다른 한편에서 새로운 버전을 유료로 배포하고 불법 복제를 명목상 반대하는 전략으로 돈을 번다. 가수들은 이후 발표될 앨범 수익을 높이기 위한 ‘마케팅 전략’으로 일부 음원을 인터넷에 무료로 공개하곤 한다.
그러나 다중의 악한 본성처럼, 공유지의 동물들은 양가적이며, 파스퀴넬리의 정치학은 양가성에 기초한 정치학이다. 우선 인간 역시 자연에 기생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가장 분명한 기생체다. 포털사이트들의 예로 돌아가면, 우리는 네이버나 다음을 통해 우리의 정서들, 생각들을 유포시킬 수 있다.
자유 소프트웨어,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등으로 대표되는 자유문화 운동이 기업적 디지털 기생체들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인터넷 예찬론자들의 말처럼 “정보는 비경쟁적인가?” 파스퀴넬리는 기생체 개념을 통해 만연한 온갖 종류의 네트워크 유토피아를 비판한다. 디지털 및 네트워크 전위들(자유 소프트웨어,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등)은 진정한 자율이 아닌 기생체들과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술적 동맹이 아닌 전략적 사보타주만이 새로운 공유지들을 보호할 수 있는 다중의 효과적인 유일한 정치적 행위이다.
나의 창조성이 나의 갈등이다 : 문화 공유지의 히드라
창조경제론이나, 최근 몇 년 사이 급속도로 성장한 문화산업, “창조도시” 슬로건 등은 모두 독점, 부동산 투기, 착취라는 히드라를 덮어 가리는 데 사용되는 가면이다.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문화공장이 되었다. 여러 모호한 측면들 때문에 비판을 받고 있는 박근혜의 창조경제론 또한 사회 전체, 다중의 삶 전체, 공유지 전체를 문화공장으로 재편하고 거기에서 지대를 추출하기 위한 전략이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디자인 서울’ 기획을 시작하기 몇 년 전 유럽에서 도시에 상표를 부여하고 투기를 촉진하려는 움직임이 먼저 시작되었다. 때문에 『동물혼』에서 주로 분석되고 있는 바르셀로나와 베를린의 사례는 지난 몇 년 간 국내 여러 곳에서 전개된 도심 미화 사업과 공명하는 지점이 많다. 특히 예술가들은 도심 재개발의 첨병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심지어는 저항적 움직임조차 임대료 상승과 투기 촉진의 한 고리로 배치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재개발에 반대하며 형성된 문래동 지역의 예술가 네트워크가 서울시의 ‘창작공간 사업’과 합류하는 과정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마을만들기, 사회적 기업, 재능기부 등 정부나 지자체가 주도하는 “착한” 사업들이 파스퀴넬리가 제안하는 양가성의 프레임에서 재고찰될 필요가 있음을 이 책은 시사한다. 국가와 자본은 점점 더 “착한” 외관을 띤다. 인문학, 예술, 창조성, 모든 것이 지배의 도구로 활용된다. 그러나 창조경제, 아이디어 경제, 창조성은 선하고 평온하고 추상적인 것인가? 창조경제론, 창조도시 조성작업을 비롯한 모든 문화산업은 갈등적인 과정이다. 지대를 수탈하고, 서로를 먹어치우는 히드라가 문화 공유지에 서식하고 있다.
미디어 공유지에 서식하는 머리 둘 달린 독수리
미디어에서도 현대자본주의의 동물성은 드러난다.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의 포르노적인 고문 사진들을 보고 아무도 분개하지 않았다는 사실, “9·11의 비극을 보도록 우리를 이끌었던 바로 그 관음증”은 미디어스케이프의 숨겨진 야수성을 드러낸다. 전쟁은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 화면 속 하나의 스펙타클이 되었고, 하위문화의 미디어스케이프는 포르노의 지배를 받고 있다. 잔혹하고 폭력적인 이미지들, 영상들이 매 순간 개인 미디어와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유포되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찾아서 본다. 미디어 영역은 권력과 욕망의 머리 둘 달린 독수리가 활약하는 비물질 내전의 장소이다.
평화운동의 반전 담론이나, 포르노에 대한 규제를 주장하는 것은 자기검열 속에 갇혀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는 효과적이지 못한 대처법들이다. 파스퀴넬리는 제임스 발라드를 인용하면서, “전쟁은 우리에게 혐오감을 주기는커녕 우리를 매료시킨다.”고 주장한다. 또 “포화 상태의 정보계에서, 신체의 직접적인 지각 방식은 포르노이다.”라는 프랑코 베라르디의 분석을 중시한다. 한 발 더 나아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비물질노동과 네트워크 사회는 더 이상 인터넷 포르노에 대한 참조 없이 언급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대항문화가 자기 검열을 극복하기 위해 전쟁포르노를 비극적인 방식으로 활용하는 “전쟁 펑크”의 등장을 예감한다.
새로운 정치적 동물 세대의 출현을 기다리며
제국의 병폐와 질병을 치료하는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급진적인 비판 이론(보드리야르, 지젝), 예술계(공공예술이나 예술행동주의), ‘올바른’ 행동주의(기존의 사회운동) 들은 오히려 제국의 질병을 악화시킬 수밖에 없다. 이들은 모두 지나간 ‘포드주의’ 틀 내에서 저항을 모색하고 있으며 인간에게서 동물혼을 제거하려 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현대의 삶정치적 경제가 바로 동물몸 위에서 기생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 책은 인간과 동물의 분리를 극복하고 동물혼의 복원을 통해, 즉 다중의 양가성에 대한 인정을 통해 공유지를 둘러싼 투쟁에서의 저항 전략을 모색한다.
파스퀴넬리는 인간 본성의 동물적 측면에 대한 재인식을 통해 이론, 예술, 행동주의가 빠뜨리고 있는 실종된 기반을 재구축하고자 한다. 비물질적이고 문화적인 삶형태적 무의식, 본능적이고 불합리한 힘들, 다중들의 생산적 엔진, 산 노동을 ‘동물혼’ 개념으로 정립하여 급진 문화와 지배 담론을 비판한다. 기생체, 히드라, 독수리 등 각각의 동물형상들이 보여준 것은 지적 담론이 동물몸/혼에 무지한 동안 인지자본주의는 동물혼으로부터 이윤을 빨아들이고 이 동물혼의 에너지를 자신을 경호하는 힘으로 활용해 왔다는 것이다.
동물혼은 현재적이고 잠재적이며, 본능적이며 문화적인 삶형태적 무의식이다. 때로는 공격적이고 때로는 통일하는 복수성, 갈등적인 히드라인 다중 개념을 통해 포스트모던적 비관론, 청교도적 급진주의, 네트워크 자본주의가 비판된다. 파스퀴넬리의 동물우화집을 통해 마찰과 갈등 없는 매끄러운 장으로 인식되는 문화, 언어, 계몽주의, 네트워크 들이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키는 계급투쟁의 현장이자 비물질 내전이 치러지는 전쟁터임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