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와 노무현, 시간을 뛰어넘은 평행이론
1. 아버지를 잃은 정조, 일평생 돈에 시달린 노무현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켜본 어린 정조는 정치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잔혹한지를 잘 알았다. 최고의 환경에서 자랐지만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유년 시절이었다. 어린 노무현은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각고의 노력 끝에 사법고시에 패스했다. 그런 유년 시절의 한은 그들을 움직이는 동기가 되었다.
1776년 3월 10일, 정조는 경희궁 숭정문에서 옥좌에 올랐다. 정조는 이 첫 마디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사도세자. 노론이 죽인 정조의 아버지다. 죄인인 사도세자의 아들이라 손가락질 받던 이가 임금이 된 것이다. 1762년 5월 21일,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은 뒤 아들은 ‘가슴속 타오르는 분노’를 삭히며 14년을 보냈다. - 29쪽
노무현이 평생 싸운 것은 가난이다. 어머니 나이 마흔다섯에 노산에다 난산 끝에 태어난 노무현. 자라면서도 노무현은 굶주림에 익숙한 유년을 보낸다. 어른이 돼서도 가난에서 놓여나지 못했다. - 25쪽
2. 지도자 수업을 착실히 받은 정조, 갑자기 대통령이 된 노무현
김영삼 전 대통령은 노무현에 대해 “장래에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각오도 학습 기간도 없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190쪽) 그는 특권과 반칙이 통하는 사회에 분개해 출사표를 던졌고 인터넷과 반보수적 시대의 흐름을 타고 갑작스럽게 대통령이 되었다. 그에 비하면 정조는 왕세손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고 정병설이 《인간과 권력》에서 말한 대로, 사도세자와 달리 영조의 마음에 쏙 드는 총명한 차기 군주였다.
정조는 14년 동안 동궁으로 있다가 대리청정에 나선다. 정조는 14년 동안 임금이 되면 어떻게 정국을 운영할지 치밀하고도 세세하게 구상했다. 그가 생각한 정치는 왕권 강화였다. 모든 권력은 왕으로 향하고 당수들은 국왕의 영도를 보필하는 축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영조는 쌍거호대(노론과 소론이 각각 좌우 정승 한자리씩을 차지하며 하는 탕평 정책) 방식을 취했지만 정조는 세 당파로 조정을 구성한다. 노론과 소론에 이어 경제 정책에 밝은 남인까지 포용한다는 구상이었다. - 190쪽
“조선 건국 이후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 권력을 한 번도 바꿔보지 못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권력에 저항한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고 그 자손까지 멸문지화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권력을 얻고 싶으면 모두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습니다. …… 이런 우리 못난 역사를 이제 바꾸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 당당하게 우리가 권력을 쟁취할 때가 된 겁니다. 이것이 이뤄져야만 우리 젊은이들 떳떳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이제 떳떳하고 정의로운 역사를 만듭시다.” - 44쪽
3. 그들이 꿈꾼 개혁
정조가 집권 2년차에 민산·인재·융정·재용에 관한 개혁 방안을 선포했다면 노무현은 국가보안법 폐지, 언론개혁 특별법, 과거사진상규명 특별법, 사립학교법 개정이라는 4대 개혁을 들고 나왔다. 개혁을 통해 왕권 강화와 민생 안정,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려는 두 지도자의 비전을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개혁도 사람이 하는 일이므로 정조는 사람을 중시했다.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으며 많은 사람들과 접촉했다. 정조 주변을 오간 사람들은 자신의 시대를 빛내줄 사람들이었다. 반면 노무현은 개혁은 시스템이라 생각했다. - 240쪽
“모든 개혁은 때가 있으므로 지금은 낡은 제도를 고치고 새로운 것을 만들 때다.”
정조는 개혁을 ‘거문고 줄 고르듯이’ 정밀해야 한다고 자주 강조했다. 개혁은 정밀하고 반듯하며 불편하지 않아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때를 잘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 244쪽
4. 시장 권력을 고민하다
왕과 대통령은 특정 당파나 계급의 이념에만 충실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래서 그들은 민생을 중시했다.
정조는 채제공이 건의한 신해통공을 발표해 물가 안정과 자유로운 시장 경제를 꾀했다. 화성 천도도 경제적인 관점에서 접근해 수원을 상업 도시로 육성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자본주의가 싹을 틔우던 영·정조 시대. 그때에도 투기 세력들이 있어 백성에게 피해가 전가되었고, 상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집단시위를 벌이기도 했다.(235쪽) 이에 정조는 채제공에게 이들을 다독여 구휼할 것을 주문한다.
노무현은 부동산과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업자와 소비자, 신문사라는 견고한 카르텔은 그 역사가 깊었다.(229쪽) 참여정부는 투기 세력에게 휘둘리기 바빴다. 더구나 양극화라는 고통은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심화된 터라 노무현 시대의 정책은 즉각적으로 효과를 보기 힘들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수치만 중시했고 노무현은 경제를 잡지 못한 대통령이라슴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5. 정조, 노무현의 라이벌과 동반자
정조의 정치적 라이벌은 정순왕후였다. 조선 사회는 유교, 효의 사회였기에 제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대왕대비의 명을 거역하기란 힘들었다. 역모에 휘말린 은언군을 두고 정순왕후는 은언군을 죽이라는 의미로 탕약을 거부하고 누워 신하를 압박한 적이 있다. 대비가 탕약을 거부하고 누워버리자 정조 역시 식음을 전폐했다. 정조는 아버지의 마지막 혈육까지 자기 손으로 죽일 수는 없었다. 이 대립은 노론 인사면서도 정조의 측근이었던 김종수의 중재로, 은언군을 귀양 보내는 선에서 겨우 마무리된다.
한편 노무현 집권 당시 한나라당의 강력한 구세주는 바로 박근혜였다. 박근혜는 눈물 전략을 구사해 노무현 탄핵으로 위기에 몰린 한나라당을 구했고 사학법을 저지하는 데도 성공했다. 보수 측의 대공세에 국정 운영이 어렵다고 판단한 노 대통령은 그녀에게 연정을 제안한다. 이 연정 제안은 한나라당에 혼란을 가져다준 게 아니라 노 대통령 지지자들의 실망만 가져다주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 킹 메이커 이해찬,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을 자처한 유시민. 그들은 정조의 경제 개혁을 실현한 채제공에 비교된다. 여기서 저자는 그들을 정치인으로서 평가하기엔 아직 이르다고 하면서 그 가능성을 주목하고 있다.
유시민은 아주 셈법이 빠르고 영악하다는 소리를 듣지만 자세히 살펴보라. 막상 이익이 되지 않는 정치를 한다. 그것이 유시민의 결정적인 특징이다. 노무현은 퇴임하면서 고향길을 유시민과 동행했다. 아무도 없는 빈들에서 혼자 노무현의 영원한 경호실장으로 남은 유시민. 퇴임 대통령이 고향에 내려와서 사람들에게 유시민을 소개하고 연호하게 한 것은 그의 의리를 높이 샀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인으로서 갖춰야 할 소중한 덕목인 의리만큼은 충만한 사람이다. - 258쪽
그 외에도 이 책에서는 개혁의 걸림돌과 개혁 과정에서 나타나는 착오에 주목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권력화된 검찰의 행태 ▲한미 FTA 추진이다. 대한민국 검찰의 오만함은 집권 초반부터 노무현을 공격하면서 드러난다. 참여정부가 검찰과의 유착을 끊자 이들은 한나라당과 더욱 밀착한다. 민주화운동의 소산인 헌법재판소도 이미 권력화된 지 오래다.(180-181쪽) 노무현 정권이 추진한 한미 FTA. 2012년 3월 15일 0시부로 협정은 발효되었다. 그러면서 2007년 노무현이 한미 FTA를 추진한 책임에 대한 비난도 커지고 있다. 그는 “이는 정치의 문제도 이념의 문제도 아닙니다. 먹고사는 문제입니다. 국가 경쟁력의 문제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183쪽) 임기 말에 노무현 정권은 “좌 깜박이를 켜고 우회전했다”,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비난에 보수와 진보 양측으로부터 공격당했다. 본격적인 진보 정권이었던 참여정부가 이런 선택을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를 살펴보는 것도 개혁 세력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진보 집권 플랜: 새로운 개혁을 꿈꾸며
참여정부 시대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도 했지만 안타까움을 산 면도 있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을 맞아 새로운 진보 세력의 고민은 이것일 것이다. 새로운 진보 정권이 실패하지 않을 방법은 무엇일까 《정조와 노무현》에서 저자는 정조처럼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노무현처럼 깨어 있는 시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정권상을 제시한다. 그리고 새로운 진보 정권에 필요한 부분을 조심스레 지적한다.
노무현과 정조의 정치적 기교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결과가 선이고 공공의 이익에 부합된다면 과정이 교활하고 정치적 기교가 난무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해가 될 게 없다고. 그 과정에 사적인 이익이 개입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 201쪽
노무현이 실패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당정 분리다. 당정 분리는 대통령이 권력을 독점한 과거 때문에 생긴 듯하다. 그렇지만 당정 분리란 말은 사라져야 한다. 국민의 대의 기관인 국회가 국민이 직접 뽑은 대통령을 크게 도와주고 밀어주어야 개혁도 성공하고 국가도 발전한다. - 2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