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음껏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 수영장에 다니거나 조깅을 하면서 배의 군살을 빼고 있다."

                                                                  -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344쪽.

대학생 때 나름 세웠던 알바 원칙은, 앞으로 공립 학교에서 교사가 될 사범대 학생으로서 사교육인 과외나 학원 강사는 하지 말자는 원칙이었다. 그래서 편의점, 공장 알바를 하거나 학교 신문사나 교지에서 여는 문학상에 투고해서 용돈을 벌곤 했다. 그런 맥락에서 학기 중에 학교 후문 칵테일바에서 서빙 알바도 했는데, 마침 당시 사장님이 바뀌시면서 아주머니 사장님께서 칵테일 만드는 법을 배우고 계실 때라 우리도 함께 칵테일 이름, 주조에 들어가는 리큐어와 용량, 맛에 대해 공부를 할 기회를 얻었다. 덕분에 각종 칵테일, 맥주, 양주 맛을 볼 수 있었던 꿀 알바였다. 하루키 마니아로서 그의 글에 팝이나 재즈, 야구나 달리기 이야기가 나오면 너무 생소한 한편, 클래식이나 수영, 각종 술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몹시 반가워지곤 한다. 위에 인용한 문구는 언제나 핵공감이다!! 그래서 이번에 이 책 저자가 하루키+술 조합으로 신간을 출간했을 때 당장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읽고 있으면 각종 술이 땡긴다는 부작용이 있으니 주의하기 바란다. 책맥, 자연스럽게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주종과 함께 하는 독서를 수행했다.

""재즈 바를 하면서 저에게 있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적어도 10명 중에 1명의 바텐더는 정말 좋은 칵테일을 만드는 타고난 재주를 가지고 있더라고요. 전 그런 재능을 믿는 편이에요. 그런데 그와 동시에 그 타고난 재능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어요."

 

이 인터뷰에 따르면, 하루키는 칵테일 실력이 제각각인 여러 바텐더를 보면서 선천적 재능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한다. 동시에 자신에게는 어떤 선천적 재능이 있는지 고민하게 됐고, 결국 글쓰기라는 걸 알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찾아낸 하루키는 연습과 훈련에도 힘을 쏟았다. 스스로 "다른 사람 두 배의 인생"이라고 말할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다. 일을 하다가도 짬이 날 때마다 펜을 들었고, 가게 문을 닫은 뒤엔 피곤에 찌든 몸으로 부엌 식탁에 앉아 원고지를 메워 나갔다.

선천적 재능과 후천적 노력, 성공을 하려면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하루키는 칵테일을 통해 배운 셈이다." 206쪽.

하루키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하루키의 생활 방식(운동, 건강한 식습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를 비롯 어려서부터 성실히 수행한 독서, 번역, 매일 아침 같은 시간 글쓰기)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테다. 그러한 모습을 보면 하루키는 여느 '천재적인 예술가'들 이미지와는 달리 너무나도 성실하게 살고 글을 쓴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글쓰기와 작품 세계를 깊이 이해할 수록 재능은 성실하게 만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루키가 그러한 자세의 중요성을 바텐더에게서 배웠듯, 재능을 만들어가는 일이란 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 있을 듯하다.

하루키와 술 덕후로서 하루키에 관한 거의 모든 글과 자료를 쌓아놓고 연구, 분석해서 논문 수준으로 정리해서 단행본으로 출간했으니 저자야 말로 '성(공한)덕(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루키 글 속에서 언급한 술 종류와 술에 관한 문장이 좀 많아야지, 그 문장들을 성실하게 다시 술 종류 별로 정리하고 이야기를 덧붙여 나갔다. 술만 알거나 하루키 문학 세계만 알아서는 할 수 없는 작업이라 대단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겠다. 나처럼 하루키와 술 모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즐겁게 읽을 수 있을 듯하여 강추하고 싶다. 깨알같이 책 초반부와 출간 기념으로 찍은 영상에서 웹툰 '생활의 참견' 김양수 만화가(나에게는 "페이퍼" 초창기 기자로 더 익숙)를 만나게 되어 몹시 반가웠다. 그야말로 하루키+술 마니아로 저자와 참 잘 통했을 듯한 사람이라. 아무튼 국내에 출간하는 하루키 서적은 모조리 찾아 읽는 자로서 디테일한 내용 중에는 이미 알고 있는 정보들도 있었으나, 그 방대한 정보를 '술'이라는 키워드로 정리한 저자의 솜씨가 놀라웠다. 

+ 저자는 성덕 답게 마치 "하루키를 찾아가는 여행": http://blog.yes24.com/document/9247880 저자처럼 실제로 일본 여행을 가서 하루키+술 흔적을 밟았다. 유명 칵테일바에서 짤막한 인터뷰를 수행하기도 했다. 휴직 기간 동안은 해외 여행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기에 조만간 가보기는 힘들 듯하고, 대신 저자가 소개한 경의선책거리 북카페 '피터 캣'에는 언젠가 꼭 들르고 싶어졌다. 하루키 책들을 모아서 볼 수 있는 점도 매력적인데 칵테일까지 맛볼 수 있다니 하루키 마니아로서 들르지 않을 수 없는 성지다.

"홍대에서 신촌으로 넘어가는 경의선 책거리에 자리잡은 '피터 캣'은 하루키를 사랑하는 이들에겐 천국이나 다름없다. 구구절절 얘기하기에 앞서 하나만 콕 집어 말하자면, '피터캣'에서 소장하고 있는 하루키 작품만 120종에 달한다. 국내에서 출간된 모든 소설과 에세이는 물론이고, 일본 원서나 영어 번역본도 있다. 또 1990년대 소형 출판사들이 정식 계약 없이 찍어낸 희귀 '해적본'까지 구해서 갖다 놨다..." 3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