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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lvet Under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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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Velvet Underground (벨벳 언더그라운드) - Velvet Underground [LP]
Universal
[밴드] The Velvet Underground (벨벳 언더그라운드) - 3집 Velvet Underground [화이트 컬러 LP]
Universal
[밴드] The Velvet Underground (벨벳 언더그라운드) - 1집 Velvet Underground & Nico [LP]
Universal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우리 나라에서는 영화 ‘접속’에 삽입됐던 ‘Pale blue eyes’로 한번 대중들에게 소개되며 대중들의 관심을 모으기는 했었지만 그야말로 잠시 잠깐이었고, 밴드에로의 조명은 거의 이루어진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경제적 공황에 처했던 영국의 런던에서 펑크 록의 세계를 전세계적으로 확산시킨 섹스 피스톨스 이전에 펑크의 공격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정신이 꿈틀대며 기지개를 켠 곳은 런던에서 바다 건너 있는 미국의 도시 뉴욕 - 미국에서 가장 언더그라운드 적이면서도 가장 전위적인 모든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던, 변태적인 공격성과 시적인 낭만이 공존했던 온갖 변종들의 도시 - 이었다.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던 팝 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이 있었고, 그와 함께 시작한 밴드, 그 안에 펑크와 뉴 웨이브의 응어리를 내포하고 있던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있었다. 그 오리지널 멤버 중에 단 한 명의 허튼 멤버도 없었던 (이제는 거의 196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미미한 음반 판매량과 전혀 무관한 그 컬트적인 명성과 록 음악사에서의 확고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았던 밴드다. (이후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벨벳으로 약칭) 1960년대 중반은 록에 있어서 급진적인 성장과 실험의 기간이었다. 미국의 서부에서는 평화의 사랑의 물결이 넘실대며 파도치고 있었고, 그 속에서 록이 급진적인 성장과 실험을 하고 있던 때가 바로 1960년대 중반이다. 그리고 루 리드와 존 케일의 천재적인 영감으로 점철되어 있던 벨벳의 음악은 이러한 캘리포니아의 록 르네상스에 대한 뉴욕의 언더그라운드의 화답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이미 대중적인 스타의 길을 달리던 (사랑과 평화, 애시드를 주창하던) 캘리포니아의 많은 밴드들과 달리 벨벳은 사후에 그 음악적 영향은 인정받았지만 결코 스타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벨벳은 록의 에너지와 전위적인 사운드를 뒤섞은 혁신적인 음악과, 그들의 음악 속에서 말하는 방식으로 사회 리얼리즘의 새로운 단계를 소개했다. 그들의 시대에 벨벳은 컬트적인 청중들과 몇몇 평론가들에게 거대한 찬사를 받았지만 상업적인 성공은 거의 없었으며 많은 대중들은 그들의 음악에 무관심하거나 경멸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져 버리기에 벨벳의 음악은 많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벨벳이 서거한 후에 점점 늘어나는 그들의 숭배자들은 오늘날까지 그들의 명성은 계속 확산되고 있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벨벳은 1960년대 뿐 아니라 지금까지 전 시대를 통해 가장 중요한 밴드로 알려졌다. 벨벳의 음악이 가지는 거대한 의미는 부진했던 그들의 음반 판매량으로는 측정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평론가들은 그들을 펑크와 이어지는 뉴 웨이브에 끼진 그들의 거대한 영향력으로 그들을 극찬하고 있으며 사실 벨벳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러한 움직임에 대한 열쇠의 역할을 했다.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내는 음악이라... 그것만큼 음악의 역사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또 무엇이 있을까. 하지만 이런 기본적인 의미론적인 시각으로만 벨벳을 바라보는 것은 벨벳 이야기의 작은 한 부분이고 자칫하면 벨벳의 음악적인 매력을 놓칠 수도 있는 우려를 낳기도 한다. 벨벳은 그들의 음악과 가사에 있어서 결코 그 어느 것과도 타협하지 않는 자세를 지켰다. 그리고 다음 세대 음악 작업의 영감을 된 거칠고 황량한 침울함과 단순하고 미니멀한 원시주의를 지지하고 신봉했다. 벨벳의 음악에는 컬러풀하고 귀를 사로잡는 음악적 파노라마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잘 짜여진 노래들은 보다 인간적인 느낌도 놓치지 않았다. 벨벳의 멤버들 중에서 이러한 음악적 방향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기타리스트이자 송 라이터였던 루 리드였다. 시니컬한 듯 따뜻하며 락킹하면서 읊조리는 보컬로 청중을 압도하는 그 가사들을 쏟아내던, 그리고 지금까지도 벨벳의 요소들을 그의 솔로 작업 속에서 이어가고 있는. # 노란색 바나나가 시대의 아이콘이 되기까지 벨벳의 서거 이후 꾸준한 솔로 작업으로 어둠의 왕자(Prince Of Darkness)라는 닉네임을 얻기도 했던 루 리드는 30년이 넘는 세월을 많은 음악적 변화 속에서도 독특한 개성과 창조적 영혼을 간직하고 있는 닐 영과 그리고 팝 계의 카멜레온 데이빗 보위와 함께 록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도 개성 있는 뮤지션이다. 데이빗 보위와 비슷한 노선을 걸어왔지만 결코 메이저에 몸을 맡기지 않는 은둔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루 리드는 1942년 3월 12일 중산층 가정에서 회계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유태인 소년은 어렸을 때부터 록 음악에 관심을 보이며 롱아일랜드의 10대 소년이었던 1950년대 말에는 쉐이즈(The Shades)라는 밴드에서 두 왑 스타일의 싱글을 녹음하기도 했다. 뉴욕의 시라큐즈 대학을 졸업하면서 그는 픽 윅(Pick Wick) 레코드 회사에 취직하여 음악을 만드는 일을 한다. 비트닉 문화와 델모어 슈와츠(Delmore Schwartz)의 시, 재즈 음악에 매력을 느끼게 되면서 픽 윅 레코드에서의 일에 싫증을 느낀 루 리드는 1964년 그가 썼던 ‘The ostrich’라는 곡을 계기로 만나게 된 존 케일과 함께 벨벳으로 발전할 전위 부대를 만든다. 이 두 명의 남자가 만든 전위 부대의 멤버들은 루 리드(보컬, 기타), 존 케일(기타, 비올라, 키보드), 스털링 모리슨(베이스), 앤거스 맥라이스(Angus Maclise, 드럼)였다. 이 중 주로 봉고를 연주하던 퍼커션 주자였던 드러머 앤거스는 공연의 리허설에 나타나지 않는 등의 태도로 밴드의 신뢰를 잃어 스털링 모리슨의 친구 여동생이던 모린 터커(Maureen Tucker)로 교체된다. 이렇게 짧았던 생애를 함께 할 멤버들이 모이게 됐고, 존 케일과 루 리드는 토니 콘라드(Tony Conrad)가 쓴 < Velvet Underground >의 카피본을 발견하고 그 느낌과 어감이 좋다는 이유로 이것을 팀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음악적 통찰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루 리드와 음악적인 역량이 뛰어났던 존 케일의 탄탄한 음악적 배경에서 만들어진 혁신적인 음악을 가지고 벨벳은 그리니치 빌리지 주변의 다양한 클럽들에서 공연을 시작한다. 이 당시에 한 클럽에서는 ‘Black angels death song’을 연주한 후에 쫓겨나는 일을 당하기도 하는데, 어쨌든 벨벳은 당시 뉴욕 언더그라운드의 대표적인 클럽이던 맥스 캔사스 시티 (Max`s Cansas City) -후에 이 곳에서의 그들의 라이브를 담은 앨범을 발표하기도 한- 에 데뷔를 한다. 맥스 캔사스 시티는 많은 뉴욕 아방가르드와 언더그라운드의 명사들이 붐비는 사교의 장이었는데, 맥스에서의 데뷔 후 벨벳은 바로 이 곳의 단골이던 앤디 워홀(Andy Warhol)과 세기의 만남을 하게 된다. 앤디 워홀은 곧 벨벳의 음악에 주목을 하며, 이들의 후원자이자 매니저가 되기를 자청하며 자신이 알고 있던 아름다운 독일의 모델이자 배우였던 니코를 벨벳에 참여시켰고, 1966년 자신의 멀티 미디어 사이키델릭 쇼 ‘Exploding Plastic Inevitable Media’에 벨벳을 출연시키기도 하는데, 이 전위적인 쇼에서 벨벳은 사이키델릭한 분위기의 소음이 뒤섞인 무대를 만들었다. 또한 벨벳의 재정적 후원을 맡은 앤디 워홀은 곧 자신의 프로듀스로 당시엔 그저 찬밥 신세였고, 후대에 록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인정받게 될 벨벳의 1집 < Velvet Underground & Nico >를 제작한다. 존 케일과 루 리드는 벨벳 이후 자신의 솔로 작업을 꾸준히 하며 각각 조금은 다른 영역에서 그 음악적 입지를 굳혀갔다. 벨벳 당시 맛보지 못했던 어느 정도의 상업적 성공과 함께. 그 자신의 아티스트적인 색깔을 가지고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펼쳐나간 존 케일과는 달리 루 리드는 벨벳에서 보여주었던 음악적 요소들을 자신의 솔로 작업에서도 지속적으로 사용했다. 초창기의 벨벳 디바 니코는 루 리드, 존 케일, 브라이언 이노 등의 도움으로 < Chelsea Girl > -니코는 벨벳에 합류하기 이전 앤디 워홀의 동명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등의 앨범을 꾸준히 발표했지만 1988년 사고로 사망했다. 평론가들과 대중들의 벨벳을 재조명하며 뒤늦게 그 업적을 치하하며, 1980년대 이후의 수많은 밴드들이 그들의 음악의 빚을 벨벳에게 돌리는 분위기 속에서 1993년, ‘덕 율을 제외한’ 오리지널 멤버들이 모두의 상상을 뒤엎는 재결성을 하면서 투어를 했는데, 모르긴 몰라도 벨벳이 마지막 공연을 했을 당시 태어났을까 말까한 어린 팬들이 엄청난 환호를 던졌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존 케일과 루 리드 사이의 오래된 상처가 다시 돋기 시작했고, 이후 1996년 벨벳이 록 앤 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기 위해 모인 것 외에 더 이상의 벨벳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안타깝게도 스털링 모리슨은 이 감격스러운 일은 몇 달 앞두고 사망했다.
 
자료제공: IZM (www.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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